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꽃의 체온 / 전비담

모든 2 2018. 4. 13. 22:14




꽃의 체온 / 전비담



겨우내 엠뷸런스가 울어서 그 병원에는
곧 떨어질 이름들만 피었다
영안실로 가는 침대의 난간을 움켜쥐고
절뚝이며 따라가는 얼굴처럼
하얗게 질려서

기어코 봄날 초입에
한주먹 틀어막은 울음이
툭, 떨어진다
이제는 저 혼자 복도를 걸어나갈 수 없는 것들이
군데군데 멍이 들거나 구멍이 뚫린 채로
하나씩 호명될 때마다
한 줌의 시든 수의로 기록되는,

목련! 하고 부르면
뚝,
뚝,
한웅큼의 하얀 종말이 뛰어내릴 때
찬란하게 하얀 것들에서는
포르말린의 체온이 풍긴다

꽃,
하고 입술 오므리면
죽음,
하고 휘어진 복도를
힘없이 돌아 나오는 메아리

건물 뒤편에서
시신을 말리는 냉각팬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누가 저걸
죽은 꽃들의 누적된
향이 앓는 소리라 했나

목련 피는 소리 갸르릉거리는 밤에는
죽은 내 친구가 입 안 가득
덜 삭은 생을 물고 양치하는 소리 들리지

하얀 꽃색 버려두고
꽃향이 자꾸 내 뒤를 밟는 건
일찍 떠나 비릿해진
꽃의 체온 때문,

- 2013년 제8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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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지방에는 이미 목련이 지고 있고 또 중부지방엔 목련이 피고 있다. “아름다움은 더럽혀지기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고재종의 '목련의 꿈'이란 시가 있다. 류시화는 목련의 이른 결별을 두고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고 했다. 복효근은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라고 했으며, 박주택은 전 생애로 쓰는 유서라고 단정 지었다. 등불을 켜듯 피어난 아름다움만큼이나 시인들은 그 낙화를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언제까지나 예쁘게만 살려고, 아니 예쁜 모습으로만 보이고픈 여성들에게서 우린 흔히 "나는 60까지만 살래. 더 늙어지면 추할 거 같아"란 소리를 듣는다. 아름다운 꽃의 생명주기를 닮고 싶은 열망이고, 귀엽기 짝이 없는 언사이긴 하지만 대체로 그 바람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늙어갈 것이다. 花無十日紅, 특히 목련의 지는 모습에서 멜랑꼴리는 구체화된다. 봄의 첫 빛을 반사하여 흰빛이 더욱 눈부신 꽃잎. 그러다가 다른 유색의 꽃들이 퐁퐁 터질 때면 이미 목련은 누런 수의로 갈아입고 세상의 꽃 가운데 가장 남루하고 참혹하게 땅으로 낙하한다.


  “, , 한웅큼의 하얀 종말이 뛰어내릴 때 찬란하게 하얀 것들에서는 포르말린의 체온이 풍긴다이 무렵의 목련꽃잎은 피돌기라도 하는지 다른 꽃잎에서 느끼지 못하는 맥박과 호흡과 체온이 느껴진다. 도톰하게 살점의 질감이 만져지는데 한 잎 한 잎 개체로서의 생명인양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악착같이 치러낸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지면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리고 비에 찢겨지면서 떨어지는 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그래서 목련의 생의 주기만큼이나 빨리 찾아온 친구의 죽음은 비릿해진 꽃의 체온만큼이나 서럽다

 

  “목련 피는 소리 갸르릉거리는 밤에는 죽은 내 친구가 입 안 가득 덜 삭은 생을 물고 양치하는 소리 들리기도 하겠으나, 그렇다고 매양 서러워만 해야 할까. 등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눈물만을 뿌릴 것인가. 흩뿌리는 봄비를 보며 또 꽃의 체온을 생각하며 더듬더듬 자신 없이 중얼거린다. 꽃을 피우는 것 못지않게 꽃 지는 것 또한 긍정하지 않는다면 꽃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으리라. 더구나 늙어 죽음을 무엇으로 탓하랴. 박범신이 <은교>에서 말했듯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닌" 것을. 그늘과 노을, 주름과 일몰이 아름답지 않고서는 어디 살아갈만한 세상이겠냐고.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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