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선택의 가능성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모든 2 2018. 4. 13. 21:13



선택의 가능성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
도덕군자들을 더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얻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민중들의 영토를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만일에 대비하여 뭔가를 비축해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리된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 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책상 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불운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 시선집 『끝과 시작』(문학과지성사, 2007)-


 

  1923년 폴란드 태생의 시인은 대학에서 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 ‘문학과 인생’이라는 잡지사의 편집부에서 일하면서 문화칼럼을 고정 기고하다가 194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시인들이 고국의 공산화에 투항하거나 저항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으나 그녀는 순수문학인의 자세를 힘겹게 고수했다. 그런 힘겨운 상황에서도 쉼보르스카는 쉽고 단순한 시어의 날카로운 언어감각이 돋보이는 시를 꾸준히 발표했고 1996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한림원은 ‘그녀의 시는 정교하게 깎여 있으면서도 매너리즘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평가하면서 '현대시의 모차르트'라고 극찬했다.

 

 맞선이나 미팅에서 묻고 답했듯이,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면 그 사람이 저절로 보인다. 그로부터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쉼보르스카가 좋아하는 목록을 보면 딱 부러진 이념 지향은 감지되지 않으나 우상의 권위가 해체되고 자유분방한 상상력들이 삶으로 녹아들어 뜻밖의 활기를 띄고 있다. 낯설고 이질적이기에 오히려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우주적 스케일로 보자면 인간이란 참으로 하찮고 한계가 분명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프레임을 극복하거나 초월하고자 하는 상상력의 통로가 필요하다. 늘 그 상상의 공간을 갈구해왔고, 그에 대한 인간의 탐닉은 여러 갈래에서 다채로운 형태로 진보하면서 인간의 삶에 기여했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현실과 가상공간 사이의 경계를 파죽지세로 무너뜨렸다. 예술과 문학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상상공간이 현실로 대거 편입됨으로써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했다. 현대시는 현실과 상상력의 세계가 함께 엮이고 섞여 풍부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현실에 상상을 덧씌웠으니 새롭고 낯선 시가 태어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삐딱하게 보이고 이른바 난해시 논란에 휘말려들기도 한다. 하지만 난해시도 수용되는 게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그 속에 숨겨진 리얼리티가 있거나 적어도 복원 가능한 리얼리티가 존재해야만 한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고 아무런 교감이나 감흥도 없는 말장난으로 도포한 시까지 시로 쳐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릴린 몬로가 즐겨읽었다는 제임스 조이스의 시는 자동기술법(혹은 자동연상법)으로 유명하다. 시뿐 아니라 '날개'의 이상이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율리시즈' 등도 의식의 흐름 기법을 이용한 소설로 알려져 있다. 하나의 단상과 감각이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자유로운 연상을 이어가듯 생각이 생각의 가지를 쳐서 뻗어나가는 형식이다. 얼핏 필연적 인과의 요소가 부족해 보여 난해하게 읽힐 수도 있다. 이 시도 얼마간 그런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나도 이처럼 가끔 시를 읽다가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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