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맛이 사는 맛*/최정란
통이 비었다 쓰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이따금 큰 숟갈로 썼구나
시간이 없는데 식탁을 차려야할 때
급한 불을 끄듯 설탕을 더한다
그때마다 요리를 망친다
손쉬운 달콤함에 기댄 대가다
마음이 허전하고 다급할 때
각설탕 껍질을 벗기듯
손쉬운 위로의 말을 찾는다
내가 나를 망치는 줄도 모르고
임시방편의 달콤함에 귀가 썩는 줄도 모르고
생의 시간을 털어가는 달콤한 약속들은
내 안이 텅 비어
무언가 기댈 것이 필요할 때
정확히 도착한다
내 안에 달콤함을 삼키는 블랙홀이 있다
주의하지 않으면
언젠가 생을 통째로 삼킬 것이다.
* 경남 양산 서창 효암고등학교 앞 큰 돌에 새겨져 있다
-시집 『사슴목발 애인』 (산지니, 2016)-
'쓴맛이 사는 맛'은 경남 양산의 기숙형 자율학교인 효암고등학교 앞 큰 돌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이 학교의 재단법인 효암학원 이사장은 우리에게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파격의 인간’이라 불리며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을 받아온 채현국 선생이다. 대구 부농의 독자로 태어난 그와 관련한 여러 일화들이 전해지는데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마다 뒤를 봐준 후원자였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준 파격적인 분이었다. 김지하, 황석영, 고은 등 유신시절 수배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 자금을 댄 익명의 운동가이기도 하다.
이 돌은 원래 교명을 쓰려고 가져왔는데 한 귀퉁이가 깨져있었다고 한다. 깨진 돌에 교명 쓰는 게 뭣해서 다른 말 한마디를 새겨볼까 하다가 그 말이 생각났다고 한다. 비관론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채 선생은 적극적인 긍정론이라고 했다. 쓴맛조차도 사는 맛이고, 오히려 인생이 쓸 때 거기서 삶이 깊어지니까 그게 다 사람 사는 맛 아니겠냐는 것이다. 누구나 세상을 살다보면 숱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쓰다고 뱉어버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말씀처럼 쓴맛도 사는 맛이라고 생각하며 끌어안으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리라.
채현국 선생의 삶 자체가 고난과 굴곡이었다. 하지만 선생처럼 굴종과 타협을 강요받았던 시대에도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분은 그리 많지 않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선생의 생활철학은 ‘시시하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다’이다. ‘쓴맛이 사는 맛’이란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선생은 부지런하지 않으면서 한가로운 것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몸이든 의식이든 행동이든 모두가 한가해야 행복해진다는 말이다. “적게 쓰고 가난하게 살고 발전이란 소리에 속지 말고, 훨씬 더 소박하게 살라.”며 파격적인 조언을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쓴맛보다는 단맛을 추구한다. 남들이 가볍게 내뱉는 달콤한 말도 귀를 즐겁게 한다. 지금의 어려움을 넘기면 언젠간 달콤한 삶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 생을 지탱한다. 하지만 그 믿음에 대한 집착마저도 끊을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속의 욕망에 영혼을 팔지 않는 정신뿐. 72년 유신이 선포되자 잘나가는 탄광 사업을 정리하여 직원들에게 모두 나눠준 뒤, 군사독재 무너뜨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금껏 일관되게 견지해온 그였다.
‘내 안에 달콤함을 삼키는 블랙홀이’있어 ‘돈 쓰는 재미’못지않게 ‘돈 버는 재미’의 달콤함에 빠져들면 자신이 썩는 길이라고 여겼다.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는 것이다. 돈 버는 게 장땡이고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된다고 했다. 모든 건 예외 없이 이기면 썩는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제일 고약한 것은 갈등이 있어야 자신의 설 자리가 생기는 정치인들이다. 채현국 선생은 ‘손쉬운 달콤함에 기대’고, 그것에 휘말려들면 ‘언젠가 생을 통째로 삼킬 것’이란 걸 진작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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