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개사돈/김형수

모든 2 2018. 4. 13. 20:51



개사돈/김형수

  

펑펑 오는 날

겨울눈 많이 오면 여름 가뭄 든다고

동네 주막에서 술 마시고 떠들다가

늙은이들 간에 쌈질이 났습니다

작년 홍수 때 방천 막다 다툰

아랫말 나주양반하고 윗말 광주양반하고

둘이 술 먹고 술상 엎어가며

애들처럼 새삼 웃통 벗고 싸우는데

고샅 앞길에서 온 동네 보란 듯이

나주양반네 수캐 거멍이하고

광주양반네 암캐 누렁이하고

그 통에 그만 홀레를 붙고 말았습니다

막걸리 잔 세 개에 도가지까지 깨뜨려

뒤꼭지 내물이에 성질 채운 주모 왈

오사럴 인종들이 사돈간에 먼 쌈질이여 쌈질이

 

-시집『애국의 계절』(녹두, 1989)-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보리 풍년 든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여름가뭄이 든다는 얘기는 여기서 처음 들었다. 과문한 탓이렸다. 아무튼 눈 오는 남도의 겨울 농한기 한 주막에서 내년 농사 염려하며 말을 섞다가 쌈질이 난 모양이다. 노인네들끼리 지난 구원을 들춘 게 화근이 되어 막걸리 한 잔 걸친 김에 주기와 함께 울컥 분기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눈 펑펑 내리는 날 웃통까지 벗고 싸우는 모습은 둘레의 구경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가관이다.

 

  그런 싸움이야 애당초 험한 꼴로 번질 가능성은 희박하고 종래는 지리멸렬해져서 제 풀에 흐지부지 수습되는 양상으로 전개될 터이지만, 그 틈을 타 양쪽 노인네 암캐 누렁이와 수캐 거멍이가 동네 고샅에서 홀레를 붙고 말았다. 상황이 이쯤 되면 서로 멱살잡이 하다가도 힐끔 힐끔 곁눈질해가며 자연히 주먹의 힘도 슬그머니 빠져야 마땅하다. 그러다가 한쪽 콧구멍을 막고 묽은 코 한번 팽 푼 다음 소매를 툭툭 털며 서로 화해의 잔이 오고가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 노인네들 한 성질 하는데다가 소시적 길바닥에 침깨나 찍찍 내뱉고 다녔던 모양이다. 아니면 혼자 사는 주모에게 낯짝 세우기가 필요했던 은근한 연적인지도 모르겠는데, 쌈질은 그칠 줄 모르고 막걸리 잔 세 개와 술독까지 깨뜨려가며 한 판 오지게 붙었다. 바깥의 개들은 사랑놀음으로 질펀하게 붙어먹었는데, 사람 꼬락서니가 되어가지고 허접한 시비에 헐렁한 닭싸움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니, 두 양반 모두 말도 안 되는 찌질이가 되어가는 찰나.

 

  보자보자 하니 도분이 나서 더는 못 봐주겠다며 주모가 나섰다. 주모 왈 “오사럴 인종들이 사돈 간에 먼 쌈질이여 쌈질이” 이렇게 눈도 펑펑 내리는 날 졸지에 누렁이와 거멍이 덕에 사돈관계가 된 두 노인네의 쌈질은 보나마나 그것으로 땡땡 종 쳤을 것이다. 엊저녁 서울에서 맞은 졸지의 눈과 오늘 새벽 대구에 밤새 싸락싸락 쌓인 눈도 그런 눈이었다. 연애질하기에도, 쌈질 하다가 화해하기에도 딱 좋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