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기 힘든 순리/정소진
어머니께서 먼 길을 가버리셨지
입관예절의 기도 소리 귓가에 쟁쟁한데
이 세상 마지막 대면에 통곡했던
남은 자의 모습으로 내가 거기 있었는데
얼마나 되었다고 다 잊은 듯
맛난 음식 욕심내고 즐거운 일 찾고
웃고 자고 노래하고 장난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여전하다니
혈압만 조절하지 말고
희희낙락 절제하는 것도 깨우쳐라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불효막심한지조차 모르면서
순리라고 합리화시키는 용서 못할 몰염치
-시집 『달관한 시지프스』 (문학공원, 2016)-
1년 전 오늘 큰 탈 없이 지내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평소 약간의 치매 증상 말고는 드시는 약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특별한 기저질환은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중환자실로 실려 간 뒤 의사의 권유대로 기관절개를 포함한 네 차례의 수술에도 깨어나지 못하고 결국 백일 만에 아주 눈을 감으셨다. 처음 얼마간 어머니의 부재가 실감나지 않아 그저 공허감으로 멍하게 지냈다. 차츰 죽음을 실감하면서 자책과 무력감에 길게 빠져들었다. 애도는 짧고 강력할수록 좋다지만 나는 그와 정반대였다.
생활하면서 어머니의 상실로 인한 구멍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잘 되진 않았지만 꼭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다른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하지만 자연의 순리인 노모의 죽음이 나라고 해서 유별날 것도 없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도 떠올랐다. ‘다 잊은 듯 맛난 음식 욕심내고 즐거운 일 찾고’ 자연스럽게 삶을 복원해갔다. 삼시세끼 가리지 않고 챙겨먹었다. 그런 가운데 이런 ‘불효막심’에 ‘몰염치’? 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는 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천천히 잊어간다는 것도 순리라면 ‘용서하기 힘든 순리’일지 모른다. 적어도 내겐 그러했다.
왜 인간은 이토록 죽은 자와의 정신적 이별에 공을 들일까. 사람이 죽으면 왜 서둘러 장례를 지내고 부랴부랴 떠나보내는 것일까. 몸이 부패하기 전에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작동하는 것일까. 죽은 자를 떼어내는 일은,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일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죽은 자를 생각하며 애통하게 우는 유족에게 우린 이렇게 매정해 보이는 위로를 해야만 할까. 또 그 위로를 받들어 떠난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는 슬픔을 억누르면서도 눈물을 뚝 그쳐야만 할까.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은, 죽은 이에 대한 슬픔 때문에 산 사람이 죽게 생겼다는 과장에서 나온 것이다. 죽음과 삶의 편을 갈라 네가 더 이상 저 죽은 자의 편이 되어선 안 된다는 설득을 하는 것이다.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만, 그렇다고 그 죽음의 위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만큼 슬프지는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슬픔은 초상집 문턱까지만 넘어갔다 올 뿐, 진짜 죽은 이에게로 다가가려는 건 아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는 말에는 한 존재가 죽었다고 세상이 종결되거나 삶의 양상들이 끝장나는 게 아니라는 엄숙한 진실이 숨어 있다.
누군가 죽더라도 삶은 계속된다. 초상집에 앉아있으면 세상의 일들이 자잘해 보이고 들끓던 욕심들이 부질없어 보이는 까닭은 삶의 뒷면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삶의 뒤뜰에서 삶의 정면을 바라보고 때문이리라. 그것과 겹쳐져 자신의 주검도 흐릿하게 보이지만 우린 그걸 빤히 보지 못하고 이내 외면하고 만다. 죽은 사람은 죽었더라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린 드디어 죽은 자를 물리치고 산 사람들끼리 어깨를 부축하고 살아있는 세상으로 무사히 복귀한다. 그러나 ‘세월호 7시간’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용서하기 힘든 순리’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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