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에 즈음하면/유안진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년이 한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거룩하신 신의 이름이 절로 담겨집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집『월령가 쑥대머리』(문학사상사, 1990)-
이렇게 한 해가 숙연하고 장엄하게 저물어 갑니다. 2001년부터 해마다 연말이면 교수들의 설문조사로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 지난 잘못을 돌아보며 성찰하자는 뜻을 담았는데, 올 한해 병신년의 사자성어로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선정하였습니다. 지난 2015년에 이미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의 실정으로 나라가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다라'는 뜻의 ‘혼용무도(昏庸無道)’를 선정한 바 있고, 2014년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른다는 뜻의 '지록위마(指鹿爲馬)'였습니다.
2013년의 사자성어는 순리와 정도를 거슬러 행한다는 뜻의 '도행역시(倒行逆施)'였고, 2012년에는 지위의 고하를 떠나 모두 다 바르지 않다는 의미를 지닌 '거세개탁(擧世皆濁)'이었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려고 꿈틀될 무렵부터 일관되게 이를 경계하고 우려하는 경구들로 이어지다가 '군주민수(君舟民水)'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하기는 이명박 정부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2011년엔 ‘엄이도종(掩耳盜鐘)'이 선정되었는데 당시 나로서도 처음 듣는 사자성어였습니다.
엄이도종은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 즉 ‘자기가 한 일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않고 다른 사람의 비난이나 비판이 듣기 싫어서 귀를 막지만 소용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당시 설문에 참여한 대다수의 교수들은 정치 경제 부문에서의 난맥상, 대통령 측근 비리 등을 예로 들며 '소통부족과 독단적인 정책 강행'을 선택 이유로 꼽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돌아보면 그때는 차라리 '양반'이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렇다면 이는 나를 포함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경구라 하겠습니다. 자신의 귀만 틀어막아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거니와 나아가기도 힘들 것입니다.
송년에 즈음하여 패착이나 아쉬운 대목에 대해 반성하는 일은 나라나 개인에게나 꼭 필요한 절차일 것입니다. 한해의 끄트머리에 서면 자꾸 작아지는 자신만 느껴집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그럴 때 신이 느껴지고 ‘신의 이름이 절로 담겨집니다.’ 일시적인 현상일지는 몰라도 허황된 꿈을 접어 겸허하게 소소한 것에 행복할 줄 아는 가슴이 되게 합니다. 아마 나이를 한 살 씩 더 먹고 둘레의 지인들이 한 둘씩 고꾸라지는 것을 보며 느끼는 삶의 한계와 허무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올 한해 받은 우정과 사랑에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한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한 마음으로 길을 가게 해달라고 소망합니다. 보고 듣고 말할 것들이 너무도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마음을 계량하지 않고도 온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귀를 막고 종을 훔치는 일은 없기를 다짐합니다. 내 나라 내 겨레의 정치와 살림도 그러하기를, 문재인의 정유년 사자성어라는 ‘재조산하(再造山河)’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새해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보수, 진정으로 성찰하는 진보가 되길 기대합니다. 튼튼한 나이테를 하나 두르면서 절로 철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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