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역광/박수현

모든 2 2018. 4. 13. 20:43



역광/박수현

 

환선 지하철 안, 한 늙은이가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듯 빠른 걸음으로 저쪽 칸에서 건너온다

끝이 뭉그러진 작업화에 보풀이 인 목도리를 두르고

때 절은 푸대를 감아쥐고 있다

선반 위에는 사람들이 읽다 만

교차로, 노컷뉴스, 장터마당 등 무가지 신문이 던져져 있다

그것들을 모으려고 선반을 더듬는

그의 몸체가 빈 푸대 자루처럼 출렁인다

손등엔 검푸른 핏줄이 시들하다

 

방향을 튼 지하철이 당산역을 거쳐 양화대교를 지난다

강의 잔물결을 스치며 시속 80km로 달려온 아침햇살이

서치라이트 켜지듯 역광으로 들이친다

눈앞이 환해지며 그의 검은 실루엣이

먹물을 듬뿍 머금은 듯 또렷해진다

1,500볼트의 역광이 왁자지껄한 광고판들을 지나

다음 칸의 문을 미는

반세기 후 아니 수세기 전의 그를

번개처럼 수거해 달아난다

 

-시집 『복사뼈를 만지다』 (시안, 2013)-



  한때 서울 지하철을 타면 선반 위의 무료신문을 수거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이른바 ‘폐지 헌터’라 불리던 그들이 수년 전부터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 지금은 싹 사라져버렸다. 행색이 초라하고 행동거지가 좋아 보이지 않아 다른 이용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출입을 막았다. 선반위에 신문지를 올리지 말라는 안내방송도 꾸준히 해왔다. 게다가 지하철 안에는 폰을 쪼물딱거리는 사람뿐, 신문을 펼쳐보는 이는 거의 없다. 경기 탓인지 지하철 출입구에 놓였던 무가지도 뵈지 않는다.

 

  이들 폐지헌터의 대부분이 60~80대 노인들로 폐지를 팔아 소소한 용돈벌이를 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다. 그들이 하루 선반을 더듬고 푸대자루를 밀면서 담아가는 폐지 량은 1인당 평균 50∼60㎏정도다. 한때 1㎏당200원에 육박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70~80원 수준이라 그래봤자 그들의 수입은 몇 천원에 불과하다. 한겨울에는 폐지수거량이 줄어듦에 따른 골판지 가격의 상승으로 폐지 가격도 약간 오르는 경향이 있다. 아무튼 추운 겨울에도 길거리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그들의 ‘안정된’ 일터가 지금은 모두 사라진 상태다.

 

  ‘방향을 튼 지하철이 당산역을 거쳐 양화대교를 지난다’ 내게도 오래전 한때 익숙한 코스였다. ‘서치라이트 켜지듯 역광으로 들이친’ 실루엣이 내 그림자였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인지 택시드라이버는 아니었지만 자이언티가 부른 이상한 문법의 노래 ‘양화대교’가 가슴에서 일렁인다. 사실 이 노래를 감동적으로 들은 건 복면가왕 ‘거미’를 통해서였다.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아버지의 삶의 터전인 양화대교를 중심으로 생활비를 버는 반복된 삶의 현실과 무게를 지금의 청춘들이 얼마나 알고 느낄 수 있을까.

 

  ‘1,500볼트의 역광이 왁자지껄한 광고판들을 지나’ ‘다음 칸의 문을 미는’ ‘반세기 후 아니 수세기 전의 그를’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이 노래를 통해 ‘양화대교’에 밑줄 긋고 감성을 위로받는 것이다. 그 공감으로 슬픈 가사이지만 떼창도 하는 것이리라. 어쩌면 그것은 세상을 향한 토로이자 자기치료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 모두 올해는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언젠가 저 역광이 우리 모두를 번개처럼 수거해 달아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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