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김광규

모든 2 2018. 4. 13. 20:53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집『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1979)-



  이 시는 4.19세대인 시인이 18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그때 친구들과의 세밑 모임에서 느낀 소회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1978년 쯤 되겠는데,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의 유신체제 아래 있었다. 돌이켜보면 박정희 군사정부의 장기집권 기간 동안 이 나라는 경제부문에서 얼마간 성장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사실상 헌법이 없는 공화국이나 진배없었다. 당시 1978년 유신은 정권 말기적인 증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회는 출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갑갑했고 경제는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경제성장은 한계에 봉착했고, 잇달아 밀어닥친 오일쇼크는 한국 경제를 뿌리째 휘청거리게 했다.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런 상황을 극복할 만한 정치능력이 부재했다. 연일 광화문에서는 대학생들이 유신 반대 데모가 계속되었으며 함석헌, 문익환, 박형규 등이 '민주구국국민선언'을 발표한 것도 1978년의 일이었다. 이 무렵 시인은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고 지금의 소시민적인 삶과 비교하면서 자조하고 회한에 젖는다. 젊은 한때 내 삶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방향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내 꿈과 신념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던 패기는 오간데 없다. 이젠 다들 현실에 순응하고 타협하면서 안주하는 모습들을 스스로 보인다.

 

  혁명을 품었던 열기는 '옛사랑'이 되어 싸늘하게 식어 있으며, 오히려 지금은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그‘그림자’만 부끄럽게 추억할 뿐이다. 세월의 유수에 젊음과 열정, 순수와 이성은 다 깎여버리고 맹목과 복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까지 비열하게 망가진 삶이 아니라 해도 반항과 저항의 거친 목소리는 '양철북'에서 오스칼이 두드리는 북소리처럼 소시민적인 절망으로 흩어지고 마는 건 아닌가. 그런 가운데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 가을 몇 발의 총성으로 일순간에 붕괴되었다. 충격적인 이 사건은 그동안 민주화를 갈망해 온 모든 국민들에게 큰 위안과 희망이 되었다.

 

  물론 유신체제의 붕괴는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유신체제가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뚜렷한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났다. 1978년 12월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집권 공화당 보다1.1% 많은 득표를 한 것도 선거 결과로 보여준 국민의 엄중한 경고였다. 마치 지금 박근혜 정권의 붕괴조짐이 지난 총선 민의에 이미 나타났던 것처럼. 그리고 'YH 사건', 김영삼 야당총재의 국회의원 제명은 유신체제의 철옹성이 무너져 내리는 전주곡이었고, '부마항쟁'에 의해 절정에 달한 민심이 폭발했다.

 

  한편 유신체제의 종말과 함께 민주화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던 국민들은 여전히 불안했다. 최규하 과도정부는 조속한 민주화 일정의 실천을 지연시켰으며, 이원집정부제 등과 같은 불투명한 헌법 개정 논의가 계속되는 사이 신군부의 정치개입이 노골화되었다. 결국 불안과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렇듯 지금의 개헌 논의와 반기문 씨의 등장이 자칫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바라는 촛불 민심을 희석시키고 찬물을 끼얹는 빌미가 되진 않을지 우려된다. 헌재 결정을 질질 끈다면 다시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반기문을 선택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경우 개혁은 물 건너가고 그 둘레엔 기득권과 개혁의 대상들이 빌붙을 게 뻔하다. 

  

  에리히 프롬은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능력이 곧 세상을 개혁하고 진보케 함을 잘 알지만. 만에 하나 긴장을 느슨하게 한다면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며 핏대를 올리다가도 ‘모두가 살기위해 살고’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않는 쪽으로 휩쓸릴지 모른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습관처럼 ‘해피 뉴이어!’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기려 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다된 밥에 코를 빠트려서 될 일인가.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을 고개 떨군 채 수상히 지나치며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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