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그 집을 생각하면/김남주

모든 2 2018. 4. 13. 20:35




그 집을 생각하면/김남주

 

고개는

솔밭 사이사이를 꼬불꼬불 기어오르는 이 고개는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욱신욱신 삭신이 아리도록 얻어맞고

친정집이 그리워 오르고는 했던 고개다

바람꽃에 눈물 찍으며 넘고는 했던 고개다

어린 시절에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어머니를 데리러 이 고개를 넘고는 했다

고개 넘으면 이 고개

가로질러 들판 저 밑으로 개여울이 흐르고

이끼와 물살로 찰랑찰랑한 징검다리를 뛰어

물방앗간 뒷길을 돌아 바람 센 언덕 하나를 넘으면

팽나무와 대숲으로 울울한 외갓집이 있다

까닭 없이 나는 어린 시절에

이 집 대문턱을 넘기가 무서웠다

터무니없이 넓은 이 집 마당이 못마땅했고

농사꾼 같지 않은 허여멀쑥한 이 집 사람들이 꺼려졌다

심지어 나는 우리 집에는 없는 디딜방아가 싫었고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

외할머니가 들려주는 이런저런 당부 말씀이 역겨웠다

나는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총각 머슴으로 거처했다는 이 집의 행랑방을

 

-시집『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비, 1995)-




  김남주 시인은 그의 여러 작품에서 집안 내력을 정직하고 소상하게 까발렸다. 그의 아버지를 노래한 시에서 “그래 그는 머슴이었다/ 십 년 이십 년 남의 집 부잣집 머슴살이었다/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니/ 그것은 보리 서 말에 얹혀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 김남주 시인은 어릴 적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독시리 자주 싸웠다면서 부잣집 딸과 그 집 머슴출신 남편의 혼인생활이 평탄할 리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사회적 모순에 눈 뜨고 저항의식을 갖게 한 것은 성장 후 책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통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어린 시절 ‘외갓집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어린 나이에도 자신이 사는 초가집과는 외양부터 크게 다르고 머슴을 서넛 부리는 외갓집에 대해 거부감이 컸던 것이다.

 

  2년 전 잠시 총리후보자였던 문창극 씨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한 강연에서 인류의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못을 박는 ‘숙명론’을 주장한 바 있다. 달리 해석하면 ‘네 부모를 원망하라’는 정유라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기독교정신으로 봤을 때 인류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계급투쟁으로 보는 유물론적 역사관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인간은 본디 불평등을 참지 못하는 성정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자유’만 억압당하지 않는다면 늘 ‘평등’을 위해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또한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권력투쟁의 역사이다. 부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한 가진 자들 간의 다툼으로 국민은 편할 날이 없다.

 

  그들은 국가와 국민을 명분으로 앞세우기도 하지만 실상 싸움의 진짜 이유는 자신들의 지배욕구와 영달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박근혜가 ‘개헌론’을 들고 나왔을 때, 그러니까 ‘테블릿 pc'가 발견되기 하루 전 까딱 잘 못하면 지금과 같은 사태로 번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음습해 그 돌파용으로 모든 의혹을 빨아들이기 위한 수단과 책략으로 들고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럴 경우 물론 최순실 문고리 김기춘 우병우 등이 깊숙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농단도 그런 국정 농단이 없다. 자본주의는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며 부를 허용하지만 가진 자들의 겸손과 자기반성, 권력욕구의 통제 없이는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회귀될 우려마저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박애’정신일 것이다. 승자독식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로 ‘박애자본주의’가 최근 세계경제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이유다. 개인적 선행의 차원을 넘어 배품과 나눔의 기부가 양극화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일찍이 자선사업의 지평을 열었던 카네기는 “사회의 경제번영으로 가장 커다란 수혜를 입은 사람들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데 자신의 돈과 재능을 써야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이토록 어지러운 세상에서 불안하게 사는 까닭은 카네기 정신의 결여와 확산이 안 된 탓도 있다.

 

  한계를 드러내고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재벌들의 각성 부족에다가 경제민주화의 실천 약속이 전혀 이행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자유, 평등, 박애’는 프랑스 혁명 당시 민주주의 대원칙으로 내세운 정신이다. 장발장의 도둑질에 뺨을 후려치지 않고 선으로 갚은 신부님의 행동은 장발장을 감동적인 박애주의자로 거듭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시인의 외갓집이었지만 ‘이 집 대문턱을 넘기가 무서웠’고 ‘터무니없이 넓은 이 집 마당이 못마땅했고’ ‘농사꾼 같지 않은 허여멀쑥한 이 집 사람들이 꺼려졌’던 까닭이 없지 않았으리라. 외가에서 신부님 마음의 반의반이라도 보여주었더라면 그런 꽁한 생각을 가졌을까. 하지만 한편으론 시인의 외가에서 비록 '애꾸눈'의 어머니지만 아버지에게 넘겨준 처사는 차라리 ‘박애’의 발로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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