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너를 기다리는 동안/황지우

모든 2 2018. 4. 13. 20:30



너를 기다리는 동안/황지우

  

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아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해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곳에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을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시집 『게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사, 1990)- 



  이 시는 아주 오래 전 황지우 시인이 한 신문사 건물에서 우연히 만난 잡지사의 선배시인으로부터 “이봐, 황시인! 시 하나 줘. 하이틴이야. 쉽고 간단하게 하나 얼른 긁어줘!”하며 청탁을 받은 후, 그 자리에서 5분 만에 ‘쓰윽 긁어서’준 시라고 한다. 그리고서 본인도 잊어버리고 있다가 성우 김세원 씨가 방송에서 낭송한 뒤로 제대로 뜬 시가 되었단다.나도 낭송시가 갖는 매력을 김세원의 이 시를 통해서 새삼 느낀 바 있다. 


  까닭 모르게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 울렁거리는 사람, 이미 사랑에 빠져든 사람, 사랑의 칼날에 베여 상처가 남은 사람. 사랑과 관련되었거나 될 예정이거나 무관한 사람까지도 한번쯤은 시나 낭송으로 접해보았을 황지우 시인의 이 시가 단 5분 만에 그것도 하이틴용으로 지어진 것이라면 누가 믿을까? 어떤 시가 단 몇 분 만에 만들어졌든, 몇 년이 걸렸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시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느냐 일 것이다.

 

  이 시에서처럼 기다림이 절실해지면 그 기다림은 일방적이거나 수동적이 아니라 너에게로 가는 능동적 행위인 '숨결 더운 사랑'이란 것을 안다. 너의 목소리, 너의 발자국 소리, 너의 체온, 너의 모든 기척을 온몸으로 더듬고 보듬는다. 눈과 귀와 코의 감각이 오매불망 너만을 향해 열리고 작동한다. 전신만신 '너를 기다리는 동안' 코가 빠지고 눈과 귀가 이탈된다.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로 쿵쿵거리는 내 가슴을 꽉 채운다.

 

지금도 어느 간이역 플래트홈에는 창문에 기대어 작정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이 있고, 글로서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꿈을 해마다 꾸는 문학도도 있다. 실제로 어느 해 신문사 신춘문예 시상식에선 당선자를 호명하자 다른 사람이 성큼성큼 시상대로 걸어가 단상 위에 선 해프닝도 있었다.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랬을까. 가톨릭에선 세말의 심판을 위한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로 성탄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한다. 지금이 그 대림기간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 시절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퇴임사 뒤에 이 시를 직접 낭송한 바 있다. 당연히 이때의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을 너’는 '통일'이다. 문재인 전 대표가 도올과의 인터뷰에서 이번엔 반드시 정권교체가 이뤄질 것이라며 개성공단은 즉각 재개되어야 하고,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 될 경우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가겠다며 주저 없이 말했다. 자칫 낡은 보수로부터 이념 시비에 휘말려들 수도 있겠으나 모처럼 기다리던 ‘사이다’같은 소신발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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