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깡통/곽재구

모든 2 2018. 4. 13. 20:32



깡통/곽재구

  

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시집『서울 세노야』(문학과지성사, 1990)-





  실제 아이슬란드는 27년 전까지만 해도 국영방송사 하나뿐이었고, 목요일은 방송이 없는 나라였다. 하지만 지금은 방송사도 3개로 늘어나 목요일 개점휴업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 시의 발표 무렵인 1990년에 이미 그 사정이 바뀐 셈인데, 시인은 그 나라의 ‘세심한 문화정책’을 부럽게 생각하면서 우리의 TV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물론 드라마의 내용도 26년 전의 것이지만 지금과 크게 다르진 않다. TV는 그동안 많이 진화하였으나 아직도 고약한 물건이다. 다채로운 IT기술의 발달로 그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바보상자니 깡통이니 일축하기엔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고 막강하다.

 

  TV는 언제나 가장 많은 여가시간을 우리와 함께한 쾌락의 정원이었다. 날마다 진보하길 원하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종편채널까지 가세한 TV는 세상의 부조리를 읽는 유력한 참고서인 동시에 수단이며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 양가적 속성을 지닌 채 문화는 박근혜 최순실의 농단에 의해 다시 위기에 처했다. 문화가 삶의 기본권 가운데 하나란 것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수시로 망각되고, 주변화 되고 도외시되었다. 어떤 문화적 형식과 내용도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문화의 종합선물세트격인 TV와 스마트폰이 저렴하고도 손쉽게 그 갈증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형식은 다양성을 띠지 못하고 하나로 수렴되는 현상을 보인다. 박근혜 정권의 문화융성이란 오로지 그들 지적 수준에 걸맞는 이른바 ‘한류’에 기반을 둔 대중문화에 한정되었다. 그 명분을 내세워 재벌들에 돈을 뜯고 온갖 횡포와 횡령이 저질러졌다. 공연전시문화의 경우 ‘문화가 있는 날’을 지정해 매월 하루 주요 영화․스포츠․공연․미술관․박물관․고궁 등의 관람에 무료 또는 할인의 혜택을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야말로 손 안대고 코푸는 수월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굳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한 달에 하루 ‘깡통’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정도인데, 그 시행과정에서 예기지 않았던 많은 부정적인 요소도 노출되었다.

 

  정부의 문화콘텐츠에서 문학과 인문학은 찬밥신세였다. 그들의 관심과 깜냥에 미치지 않아서일지 모르겠다. 사물과 현상을 폭 넓고 깊게 사유하도록 돕는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들이 박근혜가 즐겨보는 드라마에 밀려 TV에서 사라져갔다. 여전히 대중들을 단순하게 길들이고 깡통 앞에 묶어두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이즈음엔 그도 모자라 본인이 직접 개입해 세월호 침몰 당일 무슨 주사를 맞았느니 어디 미용사를 불러들여 머리손질을 했느니 막장 드라마 이상의 스캔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이것은 대중적인 ‘재미’를 위해 인간에 대한 예의를 포기하는 망동으로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 이를 어쩌나,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방의 등불/타고르  (0) 2018.04.13
그 집을 생각하면/김남주  (0) 2018.04.13
너를 기다리는 동안/황지우  (0) 2018.04.13
설날/권영우  (0) 2018.04.13
여백/도종환  (0) 2018.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