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설날/권영우

모든 2 2018. 4. 13. 20:28




설날/권영우

  

뜰 청솔 더미에서 목욕한 해묵은 석양이

동쪽 하늘 붉은 때때옷으로 치장하고

대청마루에 새해 복(福), 한 광주리 걸어 놓는다

 

날마다 맞이하는 무덤덤한 햇살이

오늘 아침은

가난한 가슴에 부푼 꿈을 가득가득 안겨온다

 

섣달그믐 묵은 때를 열심히도 벗기시던

어머니는

밤새도록 지극 정성 차례상을 준비하셨다

설빔하는 어머니 무릎에 누워

자지 않으려 용쓰다 깜박 잠든

새해 새 아침 설날 어둑새벽

개구쟁이 동생이 찬물에 세수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넙죽 세배를 드린다

 

큰 누나가 지어준 색동 주머니에

깜박깜박하시는 할머니의

손때 묻은 무지개 알사탕이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는 오늘은 설날이다

 

소식 없는 대처의 둘째형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애끓는 정성이 담긴

떡국 한 그릇

삼신할미에게 공양 되는 오늘은 설날이다

 

동네 어귀를 들어오지 못해 망설이던

떠돌이새가

하얀 눈밭에 걸린 청솔가지에서 밤새 울다가,

일 년 365일 눈물로 지새운

어머니 치마폭에 용서를 비는 오늘은 설날이다

 

그렇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모든 걸 용서해주고 용서받고

그리운 가족 사랑을 주고받으며

정겨운 희망의 닻을 올리는 오늘은 설날이다

 

-시집『하루걸이』(그림과책, 2006)-



  어린 시절 1년 365일 가운데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설날이었다. 그 기다림은 설렘을 동반한다. 추석과 비교해서 그 유익을 계량해보면 아무래도 설 쪽이 더 실속이 있었다. 운이 좋으면 헐렁한 운동화도 하나 얻어걸리는 횡재급 설빔에 가래떡이랑 강정 따위 평소 먹지 못했던 맛난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 후훗 세뱃돈, 연탄재 구멍에 꽂아 쏘아 올리는 화약놀이, 그 하루만큼은 하늘이 두 쪼가리 나도 기쁘고 행복해마지 않아야할 가족들의 표정 그리고 우리들의 얼굴들.이보다 더 즐거운 날이 어디 있으랴. “엄마, 몇 밤만 자면 설이고?” “딱, 한 밤 남았지!” 하루하루 손을 꼽고 툇마루의 기둥을 껴안고 빙글빙글 돌면서 기다렸던 설은 오고야 말았다.

 

  ‘날마다 맞이하는 무덤덤한 햇살이’ 이날을 기해 일제히 빛을 발하면서 ‘부푼 꿈을 가득가득 안겨온다’ 넉넉하지 않아도 넉넉했고 추워도 춥지 않았다. 미리 놋그릇을 말갛게 닦고, 수증기 가득한 방앗간 앞에서 떡살 담은 양은대야를 놓고 긴 줄을 설 때쯤이면 설렘은 최대치로 고조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하루 지나 적당히 굳어지면 예쁜 타원형으로 썰리고, 마침내 볶은 쇠고기, 계란지단, 김 등속의 꾸미가 수북 얹힌 떡국이 상 위로 올라와 한그릇 뚝딱 해치우면 삶의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거로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꺽 트림을 했다.

 

  그러나 어느 동네 어귀에선 ‘들어오지 못해 망설이던 떠돌이새가 하얀 눈밭에 걸린 청솔가지에서 밤새 울’었고, 뉘 집 가마솥에선 맹물만 오래도록 끊고 있었다. 같은 시간 '사평역'을 닮은 한 대합실 앞에선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누군가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걸 용서해주고 용서받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면 그저 '정겨운 희망의 닻’ '설날'은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제 어머니 혼백이 모셔진 군위 가톨릭 묘원에 다녀왔다. ‘어머니의 애끓는 정성’을 떠올리며 오늘은 내가 ‘떡국 한 그릇’ 지어 올리는 설날이다.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깡통/곽재구  (0) 2018.04.13
너를 기다리는 동안/황지우  (0) 2018.04.13
여백/도종환  (0) 2018.04.13
나의 소망/황금찬  (0) 2018.04.13
불나비 사랑/임영조  (0) 2018.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