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뫼성지
한국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지이다.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종한(1816년 순교),그리고 김대건 신부님(1846년 순교)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으로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이 싹튼 곳이며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마르코 복음 9,2-10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하나는 모세께,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말씀의 향기>
기도하시는데..
얼굴은 해처럼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이재훈 세례자요한 천안오룡동 주임
사람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다.(세 1,27) 즉,사람의 얼굴에는 '하느님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다만 살아오면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면 그것은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 자화상 일 뿐이다. 예수님의 삶 역시 수난과 고통의 순탄하지 않은 삶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마다 '외딴 곳으로 가시어',혹은 '이른 새벽녘에 홀로'산에 오르시어 늘 기도하셨다.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을 기록한 루카복음을 보면,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하얗게 빛났다고 전하고 있다.(9,29) 이런 것을 보면 하얗게 빛나는 영광스런 모습은 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혜로운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길 기다린다. 병아리는 수체례 부리로 알의 얇은 막을 쪼아대야 비로소 부화할 수 있다. 산모의 고통이 클수록 출산의 기쁨이 크다. 이처럼 영광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잘 이겨내도록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탈출기 34장 29절에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고 온 모세가 빛나는 얼굴로 시나이산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때 모세의 얼굴이 얼마나 빛났던지 두려워 사람들이 쳐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그러자 빛이 가려지고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과 옷에서 나오는 빛은 가려지지 않았다. 얼굴이 태양처럼 빛날 정도였으니, 그 빛이 옷을 뚫고 나온 것이다. 천이나 수건으로 가려도 그 빛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모세의 빛은 수건으로 가려질 수 있었고,예수님의 빛은 가려질 수 없었던 것일까? 기도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그 뜻대로 사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빛은 너무도 강해서 수건으로 가려도 빛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모세가 기도하는 대신 사람들을 의식했을 때 그 영광스러운 빛마저도 사람 손으로 가려졌듯이,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빛은 곧 가려지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화장하고,성형수술을 하는 등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게 치장한 사람도 화장을 지우고 나면,또 늙게 되면 빛을 잃고 만다. 얼굴빛을 잃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얼굴을 새기고 사는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바로 기도하는 동안에 만들어진 하느님의 얼굴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얼굴을 간직하려면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via의 시선(오늘,행복하세요)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겨울은 추워햐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추워야 겨울이지요.그런데 올 겨울은 너무 춥습니다. 지난 몇 년동안 춥게 살았습니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거실에 화목난로를 설치하고 나무를 태웠습니다. 산에 쓰러진 나무를 자르고 나르면서 몸의 근육은 단단해졌지만,난로 불을 피우기 위한 나무와의 공방은 입고 있던 옷에 숫한 구멍을 뚫었습니다. 좀 덜 추웠으면 좋겠습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한기에 몸이 반응하며 놀랍니다. 방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방에 텐트를 치자. 텐트를 치면 한기를 막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가끔 텐트를 걷고 환기를 시켜야 하는 불편함을 받아들이면 만족스럽습니다.
"춥다"생각하니 더 추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춥고 눈이 내린 다음 날 이른 아침 눈을 치웠습니다. 미사에 오시는 어르신들이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눈을 치우는 시간이 흐를 수록 춥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상쾌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마에 땀이 흐르고 얼었던 손이 풀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무언가 다릅니다. 방에서 느꼈던 나와 밖에서 몸을 움직이는 나,같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누군가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니 사실은 나에게 묻고 싶습니다. "나를 아십니까?" 조금 엉뚱합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직하지 못합니다. 저는 제게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습관적으로 의무수행과 인정 그리고 규칙과 체계에 벗어나지 않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이전과 다른 몸을 경험하면서..묻게 됩니다. "이짓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나의 행복과 연결되는 일인가?"
조금은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작은 일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제 일탈을 위한 장소를 찾습니다.
자리를 바꾸는 용기
학생들과 수업을 하면서 발견하게 된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1. 한 번 자리가 정해지면 웬만해서는 자리를 바꾸려하지 않는다.
앞에 앉은 사람은 매번 앞에 앉고 뒤에 앉은 사람은 매번 뒤에 앉는다.
2. 처음 옆자리에 앉게 된 사람과 앞으로 친구가 될 확률이 높다.
한두 번 눈에 익은 사람이 편하게 느껴지고 가까운 사이가 되기 싶다.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느냐에 따라 풍경이 달라 보이기 마련입니다. 한 학기 내내 한 자리에 앉게 되면,그 고정된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는 편견이 생기게 될까봐 걱정스럽습니다.
한번 익숙해진 인간관계는 새로운 만남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단지 익숙한 관계가 아닐 뿐인데,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 관계로 편협해질까봐 신경이 쓰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다양한 관점을 갖는데 소극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타인에 대해 모험적이지 않습니다. 멀어 보이는 사람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는 데에는 상당한 부지럼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행복은 한 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유롭게 모험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음 주면 개학입니다. 제자들을 만나기 전에 저자신부터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그들 앞에서 저는 얼마나 용감한 모험가이며,얼마나 부지런한 여행자인지 말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볕 한 움큼
이슬 한 종지
바람 한 됫박
이만하면
봄이 오겠지.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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