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울성지
성지는 한국천주교회의 못자리이며 충청도에서 최초로 복음의 빛이 전해진 곳이다. 이존창(루도비꼬 곤자가)사도의 생가터로 알려져 있으며,내포 천주교회의 심장이며 신앙의 고향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여러 박해를 겪으면서 두분의 성인,두 분의 하느님의 종,여러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킨 순교자의 못자리이다.
+ 요한 복음 3,14-2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권선민 요셉 선화동 주임-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생활을 하던 시절,자주 반복되던 죄가 있었습니다. 시나브로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던 그 죄는,하느님을 향한 불평불만과 뒷담화였습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하느님과 모세를 향한 불평불만과 뒷담화는 치명적인 독을 생산하는 불뱀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억압과 종살이 속에서 울부짖던 자신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은덕을 까맣게 잊은 채,반복해서 죄를 짓던 그들은 결국 불뱀들에게 물리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고,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이스라엘 백성들은,하느님께 또 다시 살려달라고 울부짖습니다. 용서하는 데 지치는 법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시켜,불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놓은 뒤,뱀에 물렸을 때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말씀대로 믿었던 사람들은 불뱀에 물려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민수기 21장 4절에서 9절에 나오는 구리뱀 이야기가 오늘 복음말씀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리뱀 이야기를 인용하시면서,당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심판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둥에 달린 구리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예형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둥 위에 달린 구리뱀을 보며 불뱀의 독을 해독하고 다시 살게 되었듯이,신약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구리뱀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살아 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순도 100퍼센트로 비싸게 만들어진 멋진 구리 건축물도, 거기에서 품어져 나올 것 같은 신비스런 힘이나,멀리서도 감상이 가능한 뛰어난 시력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뱀에 물린 뒤에 누구든지 구리뱀을 보면 살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굳은 믿음이었고,하느님과 그분 말씀의 전달자를 향한 굳은 신뢰였습니다. 그렇다면,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까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세상과 교회의 여러 고민스런 현안들 앞에서,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그리스도를 알고,사랑하고,따르는 것' 그것이 전부임을 생각하며,그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되도록 합시다.
VIA의 시선(느낌표)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노트북 앞에 앉아 있습니다. 무언가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떠오르지 않습니다. 매일 무언가를 읽습니다. 밑줄을 긋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비웠던 책장이 다시 채워집니다. 한 달에 두 권 혹은 세 권,네 권.
예전에는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대부분의 돈을 책을 사는데 썼습니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책을 읽기가 힘듭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무지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손으로 느끼는 모든 것,그래서 안다고 믿고 있는 것들,그런데 모르겠습니다. 공부하면 알게 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잘못된 믿음이었습니다.
책을 읽습니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기도 합니다. 그때 경험하는 불편함은 너무 큽니다. 다른 이들이 말했던 것들 중,이것저것,가져다가 말합니다. 그러다가 가끔 누군가의 말 속에서 "아!"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니,그렇게 요구받으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모릅니다. 나는 땅에 배추씨를 뿌리면서 배추 씨앗이 배추를 낳게 하는 힘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그가 그가 되게 하는 그 무엇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환원주의로 해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유기체의 현재는 당향한 발출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나는 그를 모릅니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하면서 만나고 그래서 그를 통해 신비를 발견합니다.
모르면서 봅니다. 그리고 감탄합니다. 보고 감탄할 수 있어서 역설적으로 감탄의 대상을 지어내신 분을 찾게 됩니다.
스몰 챌린지
작고 소소한 목표를 정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도전을 '스몰 챌린지'라고 합니다.
3일 동안 절대로 일회용 컵 쓰지 않기,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1주일 살아 보기,휴대폰을 꺼내지 않고 친구랑 최소한 30분씩 대화해 보기 등이 스몰 챌린지 사례들입니다.
거창하고 큰 목표들은 아니지만,이 작은 목표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합니다. 조금만 노력하는 짜릿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단 스몰 챌린지에 성공하고 나면 자신감뿐만 아니라. 이제껏 없던 좋은 습관 하나가 더 생기는 덤까지 얻게 됩니다.
도전이라고 하면 대체로 우리는 낮고 가까운 곳보다 높고 먼 곳에 목표지점을 정합니다. 가야할 곳은 아름답지만,문제는 그곳에 도달하기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작심삼일은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어쩌면 목표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3일만이라도 지켜볼 수 있는 일에 도전한다면 그 작은 성취감이 큰 도전의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동안 지켜야 할 약속이 많아 보입니다. 그 약속들은 지키지 못할 때마다 자꾸 자책만 늘어갑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에는 이런 스몰 챌린지를 해 보면 어떨까요?
일주일에 3일만이라도 옆집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한 달간 미사에 매일 먼저 가서 제일 늦게 나오기,하루 한 곡씩 좋아하는 성가 가사의 의미를 생각하며 불러 보기..
시작이 반이 아니라,시작 그 자체로서 하나가 완성되는 기쁨으로 부활절을 맞이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밝음을 조롱하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촛불을 밝히어
새벽을 맞이하니
아
이제 환한
빛이로구나.
맑고 고운 빛.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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