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사순 제5주일 2018년 3월 18일 (나햬)

모든 2 2018. 3. 18. 22:00

 

 

원머리 성지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에 위치한 원머리성지는 3년여에 걸친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신앙의 못자리이다. 성지에는 박태진(마티아)과 박선진(마르코)의 유해와 현양비가 있고,원머리출신 14분 순교자들의 치명기록으로 보아 이곳에 큰 신앙공동체가 있었으며,순교자들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알 수 있다.

 

 

 

 

  + 요한 복음 12,20-3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선생님,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하고 청하였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말씀의 향기>

 

  희생과 봉헌의 삶을 살아갑시다  -박성민 요한금구 관전1동 주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보러 온 사람들을 앞에 두고 의미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이 영광스럽게 되실 때,바로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고 봉헌하셔야 하는 순간이 다가 왔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4-25) '밀알이 죽지 않으면'이란 비유 속에서 우리 인생은 죽지 않는 한 하느님의 뜻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죽음은 먼 훗날의 생물학적인 마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삶 가까운 곳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살면서 죽음을 체험하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우리는 몸으로 느끼지 않는가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게 곤궁한 삶이 있을 수 있고,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서 심장이 멎는 듯한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부부 사이에서 서로의 자존심 때문에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함께 한 공간에 있어도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죽음을 체험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생기는지요?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직장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서로 간의 갈등과 미움,반목과 싸움 때문에 서로를 죽이고 숨막히게 하는 순간들을 우리는 자주 겪게 됩니다. 굳이 생물학적인 죽음을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은 느끼면 살아갑니다.

  "밀알이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분명히 우리 삶을 이끌어줄 중요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죽어 주지 않으면 이 세상의 참된 평화와 생명의 결실들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의 자존심만 내세우지 않고,서로가 가진 고유한 관심과 생각을 존중해 주고 서로 섬겨주며,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권위와 복종이 아닌 대화와 사랑의 관계로 서로 섬길 수 있다면,동료들과의 관계에 서로 때로는 성질나고 자존심이 상해도 나를 버리고 상대방을 받아줄 수 있다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내가 스스로 죽고,나를 버리고,희생하고,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낮게 여기는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여전히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나의 작은 버림의 실천을 통해 내 주변의 사람들이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고통의 길을 자처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via의 시선(보는 사람)   -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자기불안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부정적 자아상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부정적 자아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놀랍게도 '정말 그렇게 믿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자기 인식을 갖는 사람들은 때때로 부딪히는 현실에서 평화에로의 도피를 선택하곤 하는데,황당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평화를 위해서 많은 모욕을 허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자기불안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저는 자기불안을 지니고 있습니다.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서 지낼 수 있을 만큼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순간은 아닙니다. 갑자기 예상하지 않은 때,일상의 경험과 다른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불안해집니다.

 

  불안하면 불안을 느끼는 나를 보려고 노력합니다. 자기부정성은 발생한 사건때문이 아니라 사건에 대응할 때 일으키는 반응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는 내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의식보다 감정에 의해서 조정되는 것이 자기부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불안이 떠오를 때,의도적으로 의식적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감정에 이름을 부여하고,감정을 떠나보냅니다.

 

 

 

 

걷기 명상

 

 

 

 

 

 

  저녁마다 나는 가파른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먼 길을 걸었다. 물론 올라올 때는 숨이 가빴다. 그래서 차츰 내 걸음에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나는 숨을 쉴 때마다 '아름다움'을 들이쉬고 '돌려드림'을 내쉬는 나를 보았다. '아름다움,돌려드림,아름다움,돌려드림'을 계속했다. 그것은 곧장 나의 걷기 명상이 되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걷기 명상에 대한 글입니다. 한결 따뜻해진 날씨라 야트막한 뒷동산이라도 돌아볼까하는 생각에 집을 나서다 문득 그 글이 떠올랐습니다.

 

  너무 마음에 와닿아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은 글이었지만,직접 걸어보면서 그 글의 느낌을 체험해 본적은 없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산책길을 나서는 마음이 설렜습니다.

 

  걷다 보니 처음엔 명상이고 뭐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데,다리에 힘이 조금씩 빠져 걷는 속도가 느려지자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느낌이 조금씩 얼굴을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숨을 들이마실 때 코로 단지 공기만 들어오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풀의 숨결,바람의 온기,구름의 그림자까지 폐 속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숨을 내쉴 때, 제 목숨을 돌아나가는 건 공기만이 아니었습니다. 풀의 숨결에 감사의 기도가 섞이고,바람의 온기에 평화가 실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 첫 숨을 들이마시고 지금까지 하느님과 제가 사이좋게 함께 호흡을 맞추며 살아왔음이 느껴지는 순간이 진짜 봄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빨릴 걸어야 운동효과가 있다고 하지만,저는 느리게 걸으면서 비만해진 제 영혼의 혼탁함을 줄이는 명상효과를 얻어보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땅을 밟거나

계단을 오르고

하늘을 보거나

들길을 걸으며

나무와 새와

꽃을 만날 때

무심코

건네는 마음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