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시노드"우리 함께 걸어요!"
천주교대전교구 시노드사무국
교구 시노드(synod)란? "함께 길을 걷는다"(Syn+hodos)라는 뜻을 지니며,교구전체의 선익을 위하여 교구장 주교가 교구 구성원들(성직자,수도자,평신도)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개최하는 '대의원 회의'를 말합니다. 시노드를 통해서 교구의 현재를 진단하고,해결이 필요한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며,이에 따른 교구의 사목 계획이 수립되게 됩니다.
시노드 본회의 세가지 의제
'순교','사제,'평신도'
대전 교구 시노드 본회의의 의제는 우리 대전교구의 지역의 속하는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신앙활동을 하시다가 순교하신 순교자들의 영성을 바탕으로 하여 그 시절 그들의 영성을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삶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는 시노드가 되기를 바라면서 정해졌습니다. 이 이해를 돕고자 의제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다루고자 합니다.
시노드 배움터 3-1
순교
2014년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의 복자품"을 위한 방한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셨습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은 과거의 은총을 기억하고 고이 간직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그 기억으로부터 영적인 자산을 꺼내어,앞을 내다보는 지혜와 결단으로 미래의 희망과 약속과 도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복음이 가져다 주는 희망,순교자들을 감격시킨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합니다."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은 '피로 쓰여진 진리의 문서고"에서 그리스도교의 영적 자산을 꺼내어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의 희망을 찾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며,순교자들은 우리를 흔들어 깨워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확실히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관상하게 하는"그리스도의 이콘"입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공경하는 것은 그들을 영웅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파스카의 신비를 노래하는 것이며,죽음을 넘어서는 희망과 힘을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2018.3.25
시노드 배움터 3-1
순교
"순교"와 "순교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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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에 의해 선포된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과
수난과 죽음의 신비를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고 선포했던 주님의 제자들,
특히 사도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순교자"그들의 증언과 증거가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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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해로 고통 받던 초기 교회는 점차 "순교자"라는 단어를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입증하고 증거하는 사람들에게 적용.
그리하여 박해 시대 안에서는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한 사람들에게 한정하여
"순교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신앙을 증거한
"고백자"(증거자,CONFESSOR/HOMOLOGO)와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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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순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그리스도교 신앙뿐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소명인 사랑의 실천에 헌신하는 모든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이제 순교는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하는 것을 넘어서,
'형제를 사랑'하는 동기와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신념의 순교'까지 확장됩니다.
2018.4.1시노드 배움터 3-1순교순교영성:그리스도를 "따름"과 "닮음"
결국,오늘날 교회가 순교 영성을 살아간다는 것은지난날의 순교자들을 본받는다는 것이겠지만,이는 또한 우리 시대에 나자렛 예수님과 순교자들의 모습을 새롭게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순교자들이 예수님께서 '그의 시대'에 말하고 행했던 것들을'자신들의 시간 속에서' 재창조한 것처럼 말입니다.예수님의 삶과 여저을 새로운 역사적 상황 안에서 예언자적으로 재창조하지 못한다면그것 역시 잘못된 순교 영성으로 머물 것입니다.
2018년 4월 8일시노드 배움터 3-1순교'버림'과 현세의 초월에 대한 동경,사랑의 최대 증거인 '순교'
올바른 따름의 전제"버림"그리스도교적 영성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따름과 닮음은 막연하게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희생적 헌신을 요구합니다."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순교자들은 올바른 따름의 전제인 '버림'을 온전히 구현한 사람들로서,자신을 최고로 부정하면서 주님을 따른 이들입니다. "버림"은 따름의 본질에 속하는 한 부분이지만"닮음"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위한 첫걸음입니다.복음적 포기는 오직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그 의미를 지닙니다. 즉 순교자들의 포기와 버림은 하느님 나를 추구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오히려 예수님을 만나고 하느님 나라를 발겨한 데서 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포기는 이 세상이 악해서도 아니며, 하느님 나라에 걸림돌이 되기에 등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그 무엇보다 가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따라서 따름의 철저함은 포기의 철저함이라기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의 철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세의 초월에 대한 동경순교자들은 공통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인해 이 세상에 대해'거룩한 무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시선은 오직 '하느님 나라'에 맞추어져 있었기에 현세를 '나그네길','사라져 버리는 이슬','조약돌에서 튀기는 불꽃'으로 여기면서 현세에서의 초월을 간절히 원했습니다.바로 이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 때문에 그들은 '죽음'이라는 가장 절박한 인간의 고통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으로만 영접할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순교자의 모델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면서 철저하게 이 세상을 사랑하셨고,이 세상과 함께하셨음을 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초월에 대한 동경은 단순히 나 개인의 축복과 마음의 평화,심리적인 안정을 넘어서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최대 증거 "순교""순교자는 완덕에 이른 사람"이며, 그 이유가 가장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라는 클레멘스의 말은 초대 교회부터 순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교회는 전통적으로 순교를 그리스도교 완덕의 최고봉으로 가장 훌륭한 사랑의 증거로 여겼습니다.즉 순교는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며,사랑은 증거자로 하여금 자신을 죽음에까지 이끄는 내적인 힘인 것입니다. "하느님과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의 행위야말로 순교의 핵심적인 모습입니다.
2018년 5월 27일
"함께"
"한꺼번에 같이" 또는 "서로 더불어"라는 뜻을 가진 부사.이번 대전교구 시노드 본회의 포스터의 주제는 "함께"입니다.변화와 쇄신은 절대 혼자서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함께"해야 이루어집니다.
시노드 포스터와 "함께"하는 묵상
"나는 지금 누구와 함께하고 있나요?"
우리의 변화가 몇몇의 열 걸음이 아닌많은 이의 한 걸음이면 어떤지요?
각자의 색을 가진 우리가 손을 맞잡으면,우린 어떤 색이 될까요?
언제나 "우리는 함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형제 여러분, 서로 격려하십시오.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2코린 13,11)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향후 시노드 본회의 포스트는 간단한 일정 안내와 함께 묵상할 수 있도록 시리즈로 제작,배포될 예정입니다.
2018년 6월 3일시노드 배움터 3-2평신도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공의회는 평신도들에게 '우리가 교회다'라는 자아 의식을 가지게 하고,'교회-교회인 나'를 다시금 성찰하게 합니다. 더불어, 교회의 활동인 '사목'에 대한 기존의 개념을 확장합니다. 사목은 목자(성직자가 양떼(평신도)를 돌보는 교회 내적인 활동이라는 종전의 이해를 뛰어넘어 하느님 백성 전체의 과업이라는 것입니다. 즉,사목은 일방적인 다스림이나 관리가 아닌 사랑과 봉사의 실천으로,그 주체는 하느님 백성을 구성하는 평신도와 성직자 모두이며,사목의 대상도 평신도와 성직자를 포함한 교회 밖 사람들까지 모두 아우르는 전체 인류로 규정합니다.
이제 교회는...신비체인 하느님 백성 안에 소위 '위'와 '아래'의 층이 무너지고,교회의 '안'과 '밖'을 나누던 벽이 허물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평신도들의
신원과 사명이 연결됩니다."
평신도들도 "당신의 포도원에서 일하라"는 부르심의 대상으로,전체 교회의 사명에 능동적이고 책임있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축성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평신도는 여전히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자신의 위상과 소명을 정립하고 표명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고,자신을 그저 수동적 교회 구성원의 일부로만 여기고 있을 뿐,스스로가 교회라는 자긍심을 갖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성직자의 명령에 따라 교회의 일부 기능을 수행하고,그것을 이행하는 것으로 본인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여기며,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아래로부터'의 교회가 강조되면서 평신도들이 교회 일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사실 모든 일들이 성직자들의 구상에서 나오며 성직자의 최종 허락을 받아야하는 수동적인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평신도를 역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를 구성하는 대체 불가한 하나의 지체로서 품위와 사명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2018년 6월 10일
시노드 배움터 3-2
평신도
"혼인 그리고 가정"
우리는 모두 가정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자라나고 살아갑니다. 가정은 모든 이의 고향이며,삶의 기본적인 터전임과 동시에 모든 사회의 기초 공동체로서 가정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 역시 언제나 혼인과 가정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신비에 대해,그리고 그 신비를 올바로 살아갈 방법에 대해 세상에 선포합니다.
부부
혼인은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놀라운 신비이며,성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그들이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한 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세상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존재를 나누는 선물이 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변함없이 함께하며 삶을 나누는 혼인의 신비는 무엇보다 신랑인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영원한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는 가장 큰 표징이 됩니다.
자녀
혼인 안에 넘쳐나는 사랑의 친교는 무엇보다 사랑의 결실인 자녀를 통해 더욱 풍성히 드러나고 완성됩니다. 자녀는 '한 몸'이 되어 다시는 갈릴 수 없는 부부 사랑과 일치의 표지입니다.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납니다. 이 안에서 자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기본적인 양식을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합니다. 가정은 자녀가 세상에 대해,그리고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처음으로 접하고 배우게 되는 가장 중요한 교육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인과 가정의 신비
모든 그리스도인 자신의 혼인과 가정이 가지고 있는 신비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부부는 몸과 마음으로,즉 전인격적 존재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줄 수 있도록 그 소명을 깨닫고,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과 교회의 도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온전한 인식과 사랑 안에서 자녀를 올바로 양육하고,자녀와 건강한 사랑의 관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가르침의 중대함과 필요성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정 안에서 참된 소명을 깨닫고,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에서부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랑의 기쁨」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각 시대의 가정에 필요한 교회의 가르침과 사목적 도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혼인과 가정 안에 담겨 있는 참된 하느님의 신비와 계획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신비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교회가 우리를 인도하는 그 길이 가지고 있는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받아들이려 노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과 가정 ,그 성화의 길
혼인과 가정 성화의 길은 결코 쉽지 않고,좁고 고된 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그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함께 하시며 은총으로 우리들을 일깨워 주시고,힘을 불어넣어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그분과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는 참된 사랑과 행복의 기쁨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2018년 6월 17일
시노드 배움터 3-2
평신도
현대의 가정,그 어려움
각 지역의 문화와 상황에 따라 겪게 되는 다양한 어려움,작은 이혼과
재혼,동거,피임,낙태,동성애,혼전 성관계,그리고 경제적,사회적 문제들 앞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가정의 파괴.
교회의 권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2015년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가정의 신비와 소명"이라는 주제 아래,가정에 과한 세계 주교 대의원호의 총회를 열고 현시대 가정 공동체들의 문제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사랑에 관한"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후속 권고 「사랑의 기쁨」을 발표하며,현대의 가정이 하느님의 소명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프린치스코 교황은 이 권고 안에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의 혼인과 가정이라는 선물을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역시 그들이 혼인과 가정 안에서 겪는 많은 문제들과 고통을 공감하고,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걸어가길 촉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이 필요한가? 01 |
먼저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혼인과 가정생활을 위하여 젊은이들을 준비시키는 교육입니다. 오늘날 가정생활에서 문제시 되고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 속에서 젊은이들은 참된 가치의 올바른 서열을 식별하지 못하며,행동의 확고한 기준이 없기에,새로운 문제를 대면하고 처리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젊은이들의 어려움에 동반하고,성공적 혼인의 시작과 성숙을 도와주도록,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한가? 02 |
새롭게 가정을 꾸려 나가는 신혼부부들에 대한 사목적 동반 역시 중요합니다.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가려면,모든 가족이 새롭게 발생하는 문제를 책임 있게 처리하고,서로 섬기며 봉사하고 가정생활을 적극적으로 나누는 데에서 훈련과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가정이 겪는 문제들의 원인을 식별하고,가정의 어려움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교회는 가정이 겪는 문제들의 원인을 식별하며,가정의 어려움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교회는 가정 사목을 단순히 하나의 사목 영역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사목영역을 관통하는 통합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정 사목은 가정에 대한 복음이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곧 인간 존엄에 대한 응답이며,상호성과 친교와 출산을 통한 온전한 성취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모든 사목자들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이 필요한가? 03 |
또한 교회는 가정 안에 주어지는 가장 큰 선물인 자녀의 권리와 교육의 방법과 의미에 대해서도 알려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양육과 보호와 더불어 사랑에 대한 영적 능력의 보장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물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권리에서 표현됩니다.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은 부모의 가장 중대한 의무이며 1차적 권리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권리 안에서 부모가 잘못된 집착이나 방법으로 자녀를 양육하지 않도록 올바로 방향을 제시해 주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많은 사랑을 쏟고,자녀들의 자유를 키워 주고,소양을 지니며,온전한 성장을 하고,참다운 자립을 촉진하는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에게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유산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건네주어야 할 의무를 지니며,자녀가 하느님 안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윤리적 양성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크고 작은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는 혼인과 가정 그리고 성과 생명의 의미에 대한 신비를 교회 구성원이 올바로 바라보고 그 신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교회의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표현하고 해설함으로써 함께 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가정 공동체의 여정에 자비롭고 현명한 동반자가 되어 갈 가정이 하느님 안에서 받은 소명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018년 6월 24일
시노드 배움터3-2
평신도
청소년&청년 -●교회의 미래&희망
●또 다른 복음화의 주역
●사회 개혁의 참여자
●특별한 가능성
스스로 교회를 대신하여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또한 주위에서 그리하도록 격려받아야 합니다.
제15차 세계 주교 시노드 정기회의 (2018년 10월부터) 주제 "젊은이, 신앙과 성소식별" |
젊은이들에 대한 사목적 관심이 집중될 이 주교 시노드의 주제는 2014년과 2015년'가정'을 주제로 잇따라 열린 시노드는 물론 교황이 후속 권고로 발표한 「사랑과 기쁨」과 긴밀히 연결돼 있습니다.
교황청은 '교회가 성숙을 향해 가는 젊은이들을 동바하면서 그들이 식별과정을 거쳐 인생을 발견하고,하느님을 만나는 가운데 기쁘게 살아가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그렉버크 교황청 대변인은 주제에 포함된 '성소식별'과 관련해 "이는 단지 사제 성소 문제에 국한된 게 아니라 그 범위가 훨씬 넓다"며 시노드가 젊은이들의 삶과 신앙생활 전반을 다룰 것임을 시사했습니다.
청소년,청년들이 복음화의 주역으로, 그리스도의 사도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 교회의 중요한 임무!! |
● 교회는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분과 친교를 갖도록 인도해야..
●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정확히 판별하고,그에 따른 삶의 변화에 도움을..
● 교리교육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교회의 과업!
● 교리교육을 통해 그리스도와 인격적 친교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그럴 때!! 청소년,청년들은 인간의 존엄,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낼 것이고, 이들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빛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청소년,청년들이 그리스도와의 만남 안에서
기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매우 중요한 두 공동체"
본당
신앙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있어 본당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본당이 단체적 사도활동의 훌륭한 표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본당은 청소년 교육을 주도하는데 전적으로 헌신할 사람들을 양성해야 할 임무가 있으며,교리교육에 필요한 설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또한 본당은 형제애가 감돌고 따뜻이 사람을 맞아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젊은이들이 본당에 오면 자기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가정
가정은 모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회적 덕행을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입니다. 자녀는 여기에서 건전한 인간사회와 교회에 대한 첫 경험을 합니다.
그들은 가정을 통하여 차츰 인간의 시민 사회와 하느님의 백성 안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그리스도인 가정이 하느님 백성의 삶과 진보를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가정의 긍정적이고 수용적인 환경,어른들의 모범,최초의 명백한 신앙체험과 실천을 통해 신앙인의 삶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 교리교육은 다른 모든 교리교육에 우선하고,모든 교리교육을 동반하며,모든 교리교육을 풍부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청소년,청년들은 무엇보다 본당과 가정 안에서 신앙을 접하고 배우게 되며,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엮어가게 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본당과 가정의 중요성을 깨닫고,올바른 방향으로 젊은이들을 이끄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빛 안에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쇄신되어야 합니다.
2018년 7월1일
시노드 배움터 3-2
평신도
노년을 보내는 이들에 대한 교회의 사명
세상이 거는 기대, 노년의 지혜 |
노년의 지혜란,인간의 성장을 따라 생애의 끝까지 오는 동안 서서히 익어서 완숙해 가는 마음의 지혜입니다. 노년은 인간관계를 다양하게 경험했고,좋은 점과 한계도 터득했고,자신의 생활 환경과 소유물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되고,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고통의 시기이기도 한 노년기 |
노년의 고통은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겪게 되는 체험입니다. 때로 노인들은 가정과 직장 사회와 교회에서 설자리가 없습니다. 또 이기는 오히려 자신의 삶을 신앙 안에서 성찰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자신과 가족 공동체를 상처와 혼돈 속으로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노년의 어려움을 이겨 내는 최선의 길"신앙" |
○ 교회는 노년의 시기를 보내는 이들이 지상의 삶을 잘 마치고 하느님의 빛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교회는 노인들이 배우자,자녀,친구들과의 사별,건강과 사회적 역할의 상실,자신의 몸의 병고,기동력의 상실,외로움,쇠약함,남에 대한 의존,고
통,죽음 등을 받아들이고 영원한 바다이신 하느님께 의탁할 준비를 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계발하고,노년기에 이 과정을 통합적으로 잘 지나갈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함께 이 여정을 걸어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 무엇보다 본당 공동체와 각 가정은 긴밀히 협력하여 노인들이 가정 안에서 그리고 본당 공동체 안에서 위로받고,또 자신의 소명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노년의 삶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소명과 같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본당과 가정 안에서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이 이 시기를 잘 보내고,또 그들의 도움으로 더욱 풍성한 공동체가 되도록 인도하며,지상의 삶을 잘 마치고 하느님께로 기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2018년 7월 8일
시노드 배움터 3-2
평신도
"교회 공동체의 평신도"-전례와 신앙교육
"전례"는...
교회 전례는 교회의 본질적 요소이자,하느님 백성의 중대한 자기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전례는 머리이신 주님과 모든 지체들이 거행하는 신비체의 공공행위로,"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입니다.
전례는 파스카 신비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원행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존재와 행위는 전례 안에 국한될 수 없고,전례 행위 그 자체 안에서 스스로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전례 안에서,또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욱 가까이 일치하는 신앙인은 주님의 모범에 따라 모든 인간의 구원을 책임지고 있음을 본인 스스로가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의 축제인 전례는 기쁨과 친교의 잔치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쉴 수 있고,그분의 축복을 받는 잔치라는 개념을 잘 받아들인다면,오늘날 지친 신앙인들에게 더없이 큰 위로를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례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입니다. 단절된 대화 속에서는 당연히 기쁨과 친교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전례 예식에만 머무른다면,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대한 신앙인의 응답은 형식적이고 무료해질 것입니다. 전례는 믿고!! 기도하고!! 살아가는 것!!이며,이러한 전례 정신을 잘 실천할 때 신앙인들의 삶은 하느님 아버지와 만나는 기쁨과 친교의 축제인 전례 안에서 더욱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전례를 잘 이해하고 보다 풍부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사제뿐 아니라,평신도들에게도 지속적인 신앙 교육이 필요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평신도의 신앙교육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성령의 인도 아래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개인 성숙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지속적 과정"이라고 정의를 내리면서,"평신도 교육이 교구의 우선순위 가운데 포함되어야 하고,전 공동체의 노력이 이 목표에 집중되도록 사목 활동 계획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신앙 교육의 목적은 모든 평신도들이 자신의 소명을 더욱 분명하게 발견하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더욱 굳은 의지를 갖게 하는 것이기에,단순한 교리나 지식과 정보의 제공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분과 친교와 친밀을 나누도록 인도'하는 평신도 양성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평신도"-신심과 신심단체
신심은 인간이 완덕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예속시키는 경신덕(敬神德)으로,하느님 신비 자체 혹은 하느님과 관련된 인물이나 실재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신앙 자세를 의미합니다. 신심은 그리스도교적 완덕실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개인적인 성격을 띠면서 때로는 '신심 단체'내지는 '신심 운동'들처럼 동아리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공적신심
신앙의 본질적인 신비와 직접 관련한 신심으로 전통적으로 교회가 장려해 온 보편적인 실천의 성격을 갖는다. 삼위일체,십자가,성체,예수 성심,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성월에 대한 신심들.
특별신심
신앙의 본질적 신비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부수적인 문제들에 중점에 두는 신심으로 교회의 인준 아래 개인적인 요구와 준비 정도에 따라 가치가 나타난다. 예수님의 오상,성인 유해나 성상 공경등에 관련한 신심들.
사적신심
각 개인의 신앙적인 취향과 요구에 따른 하느님을 보다 잘 흠숭하게 하는 신심으로 모든 신자들에게 일괄적으로 요구되지는 않는다. 메달을 착용하거나,상본을 지니는 행위 등.
이렇게 구분은 하지만,진정 참된 신심은 일상 속에 녹아있는 신심이자,이웃과 세상과 연관된 내적 자세로서 자신의 세속적 환경과도 연관되어야 합니다. "생명은 내어 줌으로써 더 자라나고,고립되고 안주하면 약해집니다. 참으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는 제쳐두고 다른이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려는 열정에 불타오릅니다."(아파레시다 문헌) 자기 증여,공동체의 소속감,봉사,그리고 다른 이들과 직접 만나 이루는 화해는 신심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 요소이며,신심행위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올바른 신심을 가지게 되면,다른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와 요청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2018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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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세상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복음화
교회의 새로운 전환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기쁨과 희망,슬픔과 고뇌,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라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 서문이 선포하는 것처럼,교회는 온 인류 가족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공의회는 교회의 신비를 더욱 깊이 고찰한 다음,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향해 말하며,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현존과 활동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든 잉게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공의회는 교회의 복음화 활동을 단지'교회 내(adintra)'만 한정짓지 않고,'교회 밖(ad extra)'에서도 찾고자 했습니다.
인류 발전과 연결되는 '복음화' |
복음화는 당연하게도 복음과 개인적 사회적 생활 사이에 상호 관계를 고려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완전한 복음 선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화는 인류 발전(개발 또는 해방)의 문제와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됩니다.
첫째 인간학적 측면에서,
복음화되어야 할 인간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고,사회적 경제적 문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존재입니다.
둘째 신학적인 측면에서,
부정과 싸우고 정의를 구체적으로 수립해야 하는 구원 계획과 창조 계획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셋째 복음적인 측면에서,
고통과 궁핍 중에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소홀히 하면서 복음화는 완성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화 사명 안에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인간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가정생활,사회 공동생활,국제 관계,평화,정의,개발 등에 대하여 명백한 견해를 표시합니다.
돈의 새로운 우상화 그리고 '복음화' |
오늘 날 인간의 비참한 현실의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와 돈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합니다.
돈의 새로운 우상화 현상은 인간이 최우선임을 부정하며,그 결과 오늘날의 경제는 참다운 인간적 목적이 없는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태도 뒤에는 윤리와 하느님에 대한 거부가 숨어 있습니다.
윤리와 하느님에 대한 거부는 돈의 우상화를 가속화시키면서,경쟁 속에서 밀려나는 이들이 배척되는 현상에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제4장에서 복음 선포의 사회적 차원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구원하시기"때문입니다.
'복음화' 그리고 '사회교리' |
교회의 복음화는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의 온갖 예속에서 종살이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시는 성령의 활동에 협력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화와 인간 증진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이 관계는 반드시 복음화의 모든 활동에서 드러나고 발전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다스리시는 그만큼 사회생활 보편적인 형제애,정의,평화,존엄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즉,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를 우리 세상에 선포하게 하는 복음화에 투신해야 합니다.이를 위해,사회교리를 공부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성 요한23세 교황은 회칙『어머니요 스승』에서 "사회교리 분야가 갈수록 더 많이 연구되기를 소망한다. 신학교에서 시작하여 현대의 모든 대중 매체들(신문,정기간행물,교리연구서적,라디오,TV등)을 통하여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먼저 성직자들의 사회교리 이해와 실천의 정도가 파악되고,양성과정에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교육이 제공되어야 하며,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교육과 강론 등을 통해 정치,사회,현실문제 등에 있어서 명확한 교육과 실천이 지속되도록 권고하여야 합니다.
2018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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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사회 복지
가난한 사람이 되시어 언제나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 곁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사회에서 방치된 이들의 온전한 발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바탕이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소수에게만 맡겨진 사명이 아니라,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연대성은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 행위 이상의 것입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라는 주님의 뜻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
(토빗 12,9)
"의로운 일을 하시며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다니 4,27)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1베드 4,8)
이러한 메시지는 매우 분명하고 직접적이며,아주 단순 명료합니다. 성경의 이러한 본문들에 대한 교회의 성찰은 그 힘을 줄이거나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그 권고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합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복음의 아름다움을 적절히 드러낼 수는 없다 하더라도,결코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표지가 있는데,곧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선택,사회가 저버린 이들을 위한 선택이 그것입니다.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사회,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받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받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으며'(필립2,6-7)우리를 위하여 '부요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셨다.'(2코린 8,9)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찢긴 마음을 싸매 주며'(루카 4,18참조),'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루카 19,10)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셨다.
이와 같은 교회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 주고,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그들의 궁핍을 덜어 주도록 노력하며,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
복음의 기쁨
1.
가난한 이가 겪는 최악의 차별로 영적 관심의 부족을 들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가난한 이들 역시 하느님,신앙을 필요로 하고,우리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우정과 강복과 말씀,성사 거행 그리고 신앙의 성장과 성숙의 여정을 끊임없이 제공하여야 합니다.
2.
일부 시급한 요구들에만 대응하는 복지 계획들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시장과 금융 투기의 절대적 자율성을 거부하고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들에 맞서 싸움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한,이 세상의 문제들,또는 이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평등은 사회 병폐의 뿌리로,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복음화와 사회복지는 연결되고,사회복지 안에서 사회교리가 바탕이 된 교육과 함께 실질적인 복지사업만이 아니라,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는 움직임을 함께 담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외적인 복지 사업의 밑바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을 만나도록 이끌어 주는 사목적 배려와 함께 오늘날 가난의 구조적인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들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18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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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문화"사목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선교'는 단순한 교회의 외형적 확장이 아닌 인간을 둘러싼 모든 영격을 복음으로 적시는 교회의 총체적인 행위,즉 복음이 일상의 구체적인 생활과 환경에 스며들어 그 힘을 발휘하게 하는 '복음화'인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복음화는 근본적으로 '인간 고유의 총체적 생활 양태'인 문화를 그 대상으로 하는 사목의 다양한 모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사목'이라는,문화를 복음의 빛으로 조명하고 복음적 가치가 형성되도록 하는 교회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기쁨
교황 프란치스코의『복음의 기쁨』은 우리 시대에 교회의 선교와 쇄신을 가로막거나 약화시키는 요소들을 진단하면서 "급격한 문화적 변화"와 함께 닥쳐오는 "문화적 도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61-62항 참조)
오늘날 인류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발달과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지만,그 진보의 이면에 감추어진 어두움이 있음을 교황은 직시했고,이런 문화적 도전에 맞서 "신앙이 새겨진 문화"를 제시합니다. 즉,"복음화된 문화는 오늘날 세속주의의 맹공 앞에서"교회의 큰 무기가 될 수 있으며,"복음화된 대중문화"는 사회발전에 있어서도 중요한 가치임을 밝히고 있으며(68항 참조),사실 "모든 문화와 사회 집단은 정화와 성숙이 필요"합니다.(69항)
현대의 문화 컨텐츠 |
SNS,인터넷,라디오,TV,신문,스마트폰,출판물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이제 교회도 SNS와 인터넷 등에 홍수처럼 밀려오고 있는 '죽음의 문화'들을 대처해 젊은이의 건전한 교양과 영성을 고취시킬 오락물 등을 공급해야 합니다.
교회는 문화산업에 참여하는 이들이 생산하는 문화와 소비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그리스도교적 가치가 투영되도록 자극하며,불의하고 부정한 문화가 생산 소비되지 않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생명의 신비를 알리는 내용,사랑의 힘과 가치를 알리는 내용,죽음의 문화가 지닌 문화를 드러내는 내용,현 시대의 문제를 그 근원에서부터 비추어 역사적 맥락에서 악의 근원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끄는 내용 등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증거하고 확산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야 합니다.
또한, 상업화된 미디어 환경에서 미디어 수용자들에게 올바르게 미디어를 소비하고 수용하는 자세와 방법을 교육하고,교회 내 교육기관이 '복음적인 스마트폰 사용법'등에 대한 프로그램 등을 개발보급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교회는 문화사목을 통해,
현대 문화가 드러내는 시대의 징표를 읽고,동시에 그 안에 숨겨진 위험을 파악하는 데서 출발하여,무엇보다 먼저 문화에 담긴 선과 악의 요소를 복음으로 식별하여 걸러내고,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요소들에 맞는 자양분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2018년 8월 5일(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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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창조질서 보전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려라"(창세 1,28)고 말씀하심으로써 인간을 창조사업의 '협력자'로 삼으셨습니다. 인간은 자신과 모든 피조물이 머무는 '공동의 집'인 세상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는 동시에,살피고 돌보는 청지기로서 책임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생태문제는 어느 특정 교구,나라,시대의 문제로 국한될 수 없으며,삶의 다양한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하기에,이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단순히 사회,정치,경제 제도 등의 개선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창조질서 보전의 과제는 환경문제에 국한하여 이해될수 없는데,이는 정의롭지 않은 제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불평등의 모습들도 본래 창조하시면서 세우신 하느님의 계획과 질서를 파괴하고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창조질서 보전 노력은 단순한 환경보전이나 복원이 아닌 창조질서의 회복이라는 면에서 인간을 위한 환경의 차원을 넘어 인간과 인간,미래세대와 다른 피조물,나아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까지 살피는 차원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생존 장애를 극복하는데 기여한 인간 창의력의 놀라운 산물 |
하지만,과학과 기술이 인간 삶의 질을 증진하는데 소중한 수단만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윤리와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는 과학기술이 권력과 결탁하여 그 발달이 오히려 공동체 전체를 재앙으로 치닫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이익만을 추구하는 발전과 성장 일변도의 가치관에서,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적정 수준의 생산과 적절한 부의 분배 및 책임 있는 생태계 보호,그리스도교적 가치를 투영한 세계관으로 변화하고,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창조질서의 보전과 진정한 성장과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01
교회의 생태 보전 노력은 기술의 발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낙관적 기술관료 패러다임의 한계를 밝히고,새로운 시각과 사고방식,정책과 교육,생활양식 등의 확산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
02
창조질서의 보전은 그 질서를 파괴하는 그릇된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포함하는 문화를 개선하는 직업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므로,교회는 문화사목을 통해 생명을 존중하고 윤리적 가치를 일깨우고 고양하는 문화창달에 힘써야 합니다. 의식의 전환과 삶의 양식의 변화없이 환경문제를 비롯한 창조질서 파괴의 현실이 개선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03
또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기준인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가치판단을 하여야 합니다. 잘못된 교육과 문화가 주입한 기술관료적인 패러다임과 과학기술 만능주의로부터 돌아서서,하느님의 말씀과 자연의 신비에 담긴 창조질서가 진리의 기준이 되도록 '지성적 회심'을 이끌어야 하며, 이기적이고 경쟁지향적인 사회에서 잊혀지거나 주변으로 밀려난 이웃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되살려 연대적인 책임감과 형제애를 되살리는 '감성적 회심'을 이끌도록 사목의 방향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
진리이며 길이신 하느님의 손길에서 시작되는 교회의 모든 사목은 사회 정치 곳곳에 뿌리박은 착취와 지배,죽음과 향락의 문화를 그 뿌리에서부터 거두어 그 자리에 생명과 인간을 존중하는 문화,공동선과 공동 번영을 이루는 문화를 심어야 합니다. 또한,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더욱 깊이 느끼며,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창조질서를 복원하고 보전하려는 움직임에 기꺼이 응답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018년 8월 19일 (나해)
바라봄
"어떤 대상을 바로 향하여 보다","어떤 현상이나 사태를 자신의 시각으로 관찰하다"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일에 기대나 희망을 가지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이번 대전교구 시노드 본회의 포스터의 주제는 "바라봄"입니다.
하느님을 바로 보고,시노드를 우리 모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대와 희망을 가져봅니다.
시노드 포스터와 "함께"하는 묵상
삶과 함께
오늘 하루,
누군가와 함께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나요?
함께 봅니다,함께 바랍니다,함께 바라봅니다.
사랑을 채우는 첫 단추는 함께 바라봄.
그리고 함께 바라본다는 것은 잠시 멈추고
시선을 맞추는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를 바라봄,우리를 바라봄,교회를 바라봄,주님을 바라봄.
나의 시선이 닿는 모든 것에 주님의 따뜻한 사랑이 입혀지길,
또한 그것을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축복을 청합니다.
말씀과 함께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에페 1,18)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마태 6,10)
"무엇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에페 5,10)
"그들의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이미 있는 것들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2마카 7,28)
"주님을 바라보아라,기쁨에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 34,6)
2018년 9월 16일(나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왕직,예언직과 함께 사제직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렇게 세례를 통해 받는 사제직을 보편 사제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제직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직무 사제직을 수행하는 사람,사제 서품이라는 성사를 통해 보편 사제직을 넘어 특별한 직무로서의 사제직을 부여받고,이를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이제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히브 5,1) "하느님의 사람"(1티모 6,11),대전교구 시노드의제 중의 하나이기도 한 "사제"에 대하여 공부합니다.
시노드 배움터3-3
사제
[현대의 사제 양성] 중에서... |
"직무 사제는 신비이며 친교이자 선교인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도유'와'사명'에 참여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기도와 말씀,그리고 희생과 구원 행위를 연장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사제는 또한 '신비인 교회의 종'이다. 왜냐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성사적으로 나타내는 교회의 표지들을 사제가 직접 거행하기 때문이다. 사제는 또한 '친교인 교회의 종'이다. 그것은 사제가 주교와 일치를 이루고,사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여러 종류의 다양한 성소자들과 다양한 은사를 받은 이들 및 여러 봉사자들과 화합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다져나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제는 '선교인 교회의 종'이다. 그것은 사제가 공동체로 하여금 복음을 알리고 증거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인 동시에 교회의 종으로서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맡기신 모든 영혼들 특히 교회를 통해 자신의 신원을 찾게 됩니다. 사제는 교회 안에서,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머리이시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사적으로 대신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
사제직과 영성생활
사제는 주님의 도구로서 자신의 직무수행을 통해 '구원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제 역시 유일한 목자 아래 한 마리 양이기에 '구원 받아야 할 존재'이기도 합니다. 즉 '신비'를 관리하는 사람'인 사제는 또한 '신비'에 의해 지탱되어져야만 합니다. 사실 사제의 성덕은 다른 신자들의 성덕보다 더 위대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형태는 달라도 성덕은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제가 성덕을 위하여 노력하게 되는 이유는 다릅니다. 사제의 성덕은 직무를 수행하는 데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 |
사제의 영성생활에서 가장 뛰어난 수단으로, 사제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와 함께 바치는 기도와는 별도로 규칙적인 개인 기도로써 자신의 영성생활을 부양하여야 합니다.
교황청 성직자성은 『사제의 직무와 생활 지침』을 통해 사제들이 성모 신심 및 다른 신심 행위에 참여하기를 적극 권장하고 있습니다. 성모 신심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제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신심이며,교회는 묵주기도를 통해 날마다 성찬례를 거행하는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그 신비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또한,순교 신심도 대전교구 사제들에게 특별히 요구되고 있는데,김대건 신부,최양업 신부의 삶, 곧 순교로 보여준 이들의 삶은 지금 이 시대에 대전교구 사제들이 어떻게 하면 '복음의 기쁨'을 살고 또한 사목활동 안에서 적용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제 자신의 영성생활과 직무 수행이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지,성무일도는 사제 자신의 기도생활을 '쇄신'시키며,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고,신뢰하는 마음으로 성부와 대화하고,성령을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교회의 입'이 되는 특권인 성무일도는 중대한 의무(sub grave)로서 사제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교회와 일치를 이루게 하는 끈입니다.
사제는 성체를 축성하는 순간부터 스스로가 성체를 관상하는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열렬한 조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성체조배는 그 자체로 교회의 최고 공경 행위인 성찬례 거행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미사 밖에서 드리는 성체조배는 미사 전례 거행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연장하고 강화합니다. 특별히 성체 성사를 삶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제들에게,성체조배는 사제 개개인과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어 주며,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2018년 9월 23일(나해)시노드 배움터 3-3사제
"사제직과 성사생활"
사제는 영성생활과 성사생활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사제서품 예식서』에는 사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행하는 바를 알고,다루는 바를 본받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특별한 방법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제는 전례와 성사집전 안에서 자신의 사제적 직능을 드러냅니다. "성사의 효력이 성사 거행자의 거룩함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성사 거행자의 믿음이 깊을수록,그의 사랑이 뜨거울수록,그의 기도의 영이 더욱 맹렬할수록,그만큼 성사의 효력은 자신에게도 다른 이에게도 더욱 커질 것이다."(교황 베네딕토 16세, 삼종기도,2005년 9월 18일)이렇듯 성사의 은총을 나누어 주는 사제들은 여러 성사들을 효과적으로 받음으로써 구세주이시며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깊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미사 성제는 모든 사제 생활의 중심이며 근원입니다. 사제는 성찬례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성찬례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사제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직무를 거행하는 제관이지만 동시에 희생제물도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사제의 목자다운 사랑이 희생의 제사에서 흘러나오고,"사제의 정신은 희생 제단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천명합니다.(사제 생활교령) 주님께서는 오늘날의 사제에게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말씀하시며 세상에 생명을 주는 쪼개진 빵이 되도록 부르십니다.
"모든 신자와 마찬가지로 사제 역시 자기 자신의 죄와 약함을 고백할 필요가 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이 성사의 실천이 자기의 신앙 그리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로 향한 애덕을 강화한다는 것을 안다. 고해성사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려면 성사 집전자가 용서의 체험을 생활화하는데 데에 있어서 다른 이들보다 앞서 스스로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는 화해성사의 사목적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첫째 조건이 된다. 이런 뜻에서,사제들의 규칙적인 죄의 고백을 신자들이 보고 아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지침)특히 사제의 영성생활과 사목생활은 사제 스스로가 얼마나 자주 정성을 다하여 개인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현대의 사제양성)
"사제직과 지성적생활"
사제는 맡겨진 영혼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이지만,동시에 그리스도께는 항상 학생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겉으로만 전하고 속으로 경청하지 않는 빈 설교자"가 되지 않도록 꾸준한 영적독서와 성실한 지적 연마에 몰두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계시헌장)
성경읽기와 묵상
영적독서와 신학공부
2018년 9월 30일 (나해)시노드 배움터 3-3사제
"복음적 근본주의" 사제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에 좀더 용이하게 봉사하기 위해 인간의 기본 욕구인 소유와 쾌락과 권력이라는 본능을 포기하고 가난과 독신과 순명을 택한 이들입니다. 이런 자발적인 포기가 바로 사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화하는 자유를 향한 '복음적 근본주의"입니다. 공의회의 『사제 생활 교령』은 이러한 사제들의 복음적 근본주의를 '사도적 행동 양식'으로 규정하며 수도자들의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삶과는 다른 차원의 영성적 의미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과 그분께서 위임한 공동체를 향한 목자적 사랑에서부터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적 근본주의사제&가난
복음적 근본주의사제&독신
독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체험되어야 합니다. 독신은 아무나 할 수 없는 탁월한 모험이요,하느님의 진정한 선물이지만 인간의 연약함과 때로는 비참함까지도 경험하는 인간적 여정이기도 합니다. 독신생활에 필요한 정결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처럼 언제나 사제 앞에 있지만 겸손이 덕을 갖추고,'갈림없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함으로써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8년 10월 7일(나해)시노드 배움터 3-3사제
복음적 근본주의 순명
순명의 원천은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제들의 목자다운 사랑은 사제들을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교계적 친교 안에서 행동하게 하고 "순종으로써 자신의 뜻을 하느님과 형제들의 봉사에 바치며,또한 교황이나 자기 주교나 다른 장상들이 명령하거나 권고하는 것을 신앙의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며,또한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가 비록 비천하고 빈약한 것이라 하더라도,기꺼이 노력하고 진력하게'합니다. (사제생활교령) 순명은 무엇보다 서로의 짐을 져주고,서로 견디어 내고,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 무상의 형제적 봉사입니다. 교황청은 『교구 사제 사목지침』과 『사제의 직무와 생활지침』에서 사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순명의 영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01교도권에 대한 충성
사제들은 교도권에 반하는 공인되지 않은 학설이나 개인적인 신념을 따라서는 안 된다. 사제는 교도권이 인정하는 건실한 가르침으로 자기 양떼를 인도하여야 한다.02임명의 수락
사제의 순명은 장상의 권위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연결시키는 평소의 정신 성향이다. 따라서 주교가 맡기는 사명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여 성취시키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사 문제를 논의할 때,사제들은 주교에게 마음을 열어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표현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결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이를 기쁘게 수락하여야 한다.
03전례와 규범에 대한 준수 사제들은 정기적으로 그리고 충실하게 일상의 의무를 이행하고 실천해야 한다. 특별히 미사지향과 관련하여 교회법(제945-958조)에 따라야 한다. 또한 전례 거행에 있어서 사제는 그 자신의 일방적 결정에 의해 어떤 것도 첨가하거나 제외시키거나 변경해서도 아니 된다.04각종 문서와 대장들의 관리 주교회의와 교구장이 규정한 대장들은 신자들의 타당한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을 위하여 중요하기에 사제들은 이러한 대장들이 합당하게 기록되고 유지되도록 감독하여야 한다.05사목계획에의 참여 사제들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주교가 결정하는 사목 계획이 수립에 책임있게 참여할 뿐 아니라 이 계획들과의 조화 속에서 그 자신의 공동체를 발전시켜야 할 필요도 있다.06사제의 복장
사제의 복장은 공적 봉사자로서 그의 헌신과 신원을 나타내는 명료한 표지이다. 사제는 주교회의에서 제정한 규범과 그 지방의 합법적 관습에 따라 적절한 교회 복장을 착용해야 한다. 이는 복장이 성의가 아닐 경우 평신도의 옷차림과 달라야 하고 또 사제 직무의 품위와 성스러움에 맞갖아야 함을 뜻한다.
2018년 10월 14일 (나해)시노드 배움터 3-3사제
01.사제직무『사제생활교령』12항은 사제가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성덕'에로 불림 받았음을 이야기하며,동시에 사제 성덕의 '특별함'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사제의 성덕이 다른 성덕들과 비교되는 특징은 바로 성품성사로 위임된 '그리스도의 권위'를 바탕으로 한 사제 자신의 고유한 직무수행입니다.(현대의 사제양성)02.사제직무사제의 성덕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주님께서 위탁하신 '어린양들'을 주님처럼 사랑으로 돌보는 '목자로의 사랑'에 바탕을 둔 '사랑의 직무'(amoris officium)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시며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나머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에페 5,25)것처럼,사제 역시 그리스도와 같은 목자로서의 사랑으로 자신에게 위임된 영혼들을 돌보아야 합니다.이러한 목자로서의 사랑이 결여된 사제 직무 수행은 자칫 사제직을 기능적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기능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 있으며,사제직을 단순한 관리직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라고 『사제직무와 생활지침』은 우려하고 있습니다.03.사제직무교회는 전통적으로 성품성사의 축성과 함께 사제에게 위임된 직무를 세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1.'말씀의 교역자'(Verbi ministri)2.'거룩함의 교역자'(Sacrorum ministri)3.'하느님 백성의 지도자요 목자'(Populum Dei regentes et pascentes)
프란치스코 교황권고기뻐하고즐거워하여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 대전교구 시노드의 주요 의제 중 하나로 '평신도'라는 주제가 채택되어 본회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그와 함께 2017년 11월 19일부터 2018년 11월11일까지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 희년'을 보내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덕을 향한 보편적인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며,현대 세계 안에서 성덕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평신도들이 성덕을 향해 부름을 받은 스스로의 소명을 깨달으며,성인이 된다는 것이 결코 자신과 멀리 있지 않음을 느끼고,기쁘게 성덕으로 나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이번 4번째 시노드 배움터를 통해 보다 많은 이들과 성덕으로 나아가는 기쁨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8년 10월21일(나해)시노드 배움터3-3사제
사제직무 1. 말씀의 교역자(Verbi ministri) "하느님 백성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계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모이며,이 말씀을 사제들의 입에서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천명한 공의회는 말씀 선포야말로 사제의 첫 번째 직무임을 강조합니다.(사제생활교령)이로써 사제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게 됩니다.이러한 사제의 고유한 사명을 『사제직무와 생활지침』은 사제의 말씀 선포가 '여러 상황과 환경'속에서 구체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이는 공의회가 말하는 '당대의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해결하려는 노력'과 맥을 같이 합니다
강론
하느님 백성을 가르치는 신앙의 교사로서,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하는 사제의 직무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는 바로 전례 안에서의 강론입니다.
『복음의 기쁨』에서 사제는 이 '대화'의 매개자로서 우선 '말씀'안에 숨은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지적인 연구와 준비의 노력도 있어야 하며,동시에 말씀을 듣는 공동체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 이중고를 통해 하느님과 백성의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이어 주는 매우 아름답지만 어려운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제들은 강론이 즉흥연설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연구와 기도로써 준비해야 하며,(교구사제사목지침)무엇보다 직무 수행을 통한 말들이 '사제 자신의 말'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현대의 사제양성)즉 말씀을 선포하는 자의 우선적 자세는 '말씀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는 강론이 추상적 주제에 관한 설교가 되지 않도록,신앙의 신비와 그리스도인 생활 규범을 밝혀 주어야 하고 성경본문에서 출발하여 전례력의 주기를 따라야 하며,또한 단순히 성경 주석과 교리교육,강론자의 개인적 증언으로 채워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아울러 강론을 통해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개별 공동체의 요구에 맞게,교회의 선포를 듣는 사람들의 문화와 상황 등을 고려하여 청중이 더욱 깊이 복음에 돌아설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어야 합니다.(강론지침)
교리교육 신앙의 "교육자"(educatores)이며 "스승"(magistri)인 사제들은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훈계하고 책망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참고 가르쳐야 한다."(2디모 4,2 참조)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특별히 사제는 신앙 교육을 통하여 신앙의 기초를 다져 주고,성숙한 신앙에 이르도록 인도하며,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일상적인 삶 안에서 그분과 친교를 나누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현대의 교리교육) 예비자 교리 사제는 예비 신자들을 위해 모든 노력과 관심을 기울어여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고,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 (현대의 교리교육)이 되고,예비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변화되어 가는 기간인 예비자 교리에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어른 입교 예식 지침』에서는 예비자 교리 기간이 단순히 교리와 계명을 설명하고 습덕하는 기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가르치고,배우는 기간으로 처음으로 복음을 들려주는 "예비 신자 이전 기간",교리 교육에 전념하는 '예비 신자 기간",더 집중적으로 영적 준비를 하는"정화와 조명의 기간",그리고 성사와 공동체 생활에 새로운 체험을 쌓는 '신비 교육 기간"이라는 입교 예식의 4단계를 충실히가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신자 재교육 사제들은 신자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하여 지속적인 교육에 힘써야 합니다. 사제의 말씀선포의 직무 중에 하나인 신자 재교육은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생활과 교리 지식의 진보에 관계되는 모든 사목적 활동을 의미합니다.(평신도교령)사제들은 맡겨진 양떼들을 향해 지속적인 교육을 행함으로써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개별 신자들의 지속적인 회개의 여정과 영적인 성숙을 돕는 동시에 자신에게 맡겨진 공동체 전체를 복음화 하여야 합니다.2018년 10월 28일(나해)교구 시노드 배움터 3-3사제 사제직무 2. '거룩함의 교역자'(Sacrorum ministri) 사제는 모든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인 동시에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인 전례와 성사 거행을 통해 자신의 신원이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1코린 4,1)이며,"새 계약의 일꾼"(2코린 3,6)임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사제에 의해 수행되는 모든 전례와 성사 집행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위격(in persona Christi)과 교회의 이름(in nomine ecclesiae)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사제에게 위임된 막중한 책음을 드러냅니다. 성찬례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며 정점이라면,그것은 또한 사제 직무의 중심이며 정점입니다. 현대 세계의 사회 문화적 상황들을 고려할 때,사제들은 수많은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여야 하지만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중심이 있으니 바로 "목자다운 사랑"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바로 이 사랑의 원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목자다운 사랑은 주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흘러나오며,따라서 성찬례는 모든 사제 생활의 중심이며 근원이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사제들에게 비록 신자들이 참석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행위이며 교회의 행위인 성찬례를 날마다 거행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살기 때문입니다."(Ecclesia de Eucharistia vivit)
성체성사가 "성품성사의 행심적인 존재 이유"인 까닭에 사제는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결코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개인의 의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우선으로 두어야 한다." 고『사랑의 성사』는 밝히고 있습니다.성체성사가 사제 생활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합당한 미사성제의 거행은 물론 성체께 대한 합당한 흠숭에도 있으니 감실 안에 현존하시는 성체 흠숭에 긴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미사성제 밖에서도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성체께 대한 신앙과 사랑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감실 안에 홀로 계시도록 방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지침)『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서 고해성사는 성체성사와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말합니다. 또한 그의 후임자는 「사랑의 성사」에서 성찬례의 의미를 가르치는 교리교육에 참회의 길을 추구하라고 언급합니다. 합당한 성찬의 전례에 참석을 위한 조건이 모든 죄를 사함 받는 세례라고 한다면,화해의 성사는 매번 나약함에 떨어지는 영혼들을 성찬례 참석을 위한 "수고스런 세례"(laboriosus quidam baptismus)로서 합당한 준비와 조건을 마련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을 것"(요한 20,21-23참조)이라고 사도들에게 건네신 위임을 계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사제들은 죄인들을 회개로 부르고,성부께서 하시는 자비로운 심판에 참여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스스로가 직무로 행하는 용서와 평화의 성사에 동일화되어 고해성사의 구원적 차원을 드러내는 막중한 임무를 지녔음을 늘 묵상하여야 합니다. 고해성사는 "사제의 직무 중에서도 확실히 가장 어렵고도 긴장을 요하며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만,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아름답고 보람 있는 직무이기도 합니다. 두려움과 신뢰가 엇갈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양심을 열어 보이는 신자들에게 고해 사제는 참회와 인간 화해를 위한 자기의 숭고한 책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사제는 이 충실한 백성들이 얼마나 나약하며 쉽게 죄악에 떨어지는지를 배워야 하고,생활을 일신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과 이를 위해 그들이 들이는 노력을 잘 간파하며,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잘 식별해야 합니다."(화해와 참회) 교회가 "구원의 보편 성사"(교회헌장)라는 사실은 일곱 가지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인 우리의 모든 삶에 어떻게 개입하신지를 성사적 경륜으로 나타냅니다. 사제는 무엇보다 이런 신앙의 신비를 분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며,동시에 사제가 "성사들을 집전하고 참여하는 동안,각 성사가 갖고 있는 다양한 성격과 각 성사가 요구하는 다양한 요구 사항들로 말미암아 사제양성이 굳건해지는 것"(현대의 사제양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성사와 전례를 집전하는 사제는 신자들에게 무엇보다 전례가 그리스도의 행위이고 교회의 활동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전례의 공동체성을 부각하여야 하며,단순한 방관자가 아닌 능동적 참여를 독려해야 하고,마침내 전례와 성사가 자신들의 구체적인 생활에 연결되도록 해야 합니다.
2018년 11월 4일(나해)시노드 배움터3-3사제 사제직무3.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요 목자'(Populum regentes et pascentes) 전통적으로 사제의 주요 직무 중에는 그리스도의 '왕직'에 비교되는 '다스림의 직무'(munus rependi)가 있는데,이를 흔히 공동체의 '머리','으뜸','첫째'라는 표현과 함께 '사목',즉 '영혼들을 돌봄'(cura animarum)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이러한 '머리,으뜸,첫째'들이 가지는 권한인 '다스림'이라는 어감은 본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는 말씀과는 큰 간격을 보입니다. 사실 주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상의 통치자들도 백성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의 제자인 사제들은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사도들에게 하신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백성 위에 으뜸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많은 이들에게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머리'가 된다는 것이 섬기는 '종'이라는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비전을 당신의 제자들에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기에,그분을 본받는 사제들은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필립 2,6-11참조)
섬김과 권위
사제가 닮아야 하는 주님의 마음은 다름 아닌 '목자로서의 사랑"이며,이 사랑은 완벽하고 철저한 자기헌신으로 극단에까지 자신을 몰고 감으로써 모든 것을 내어주는 섬김이며,주님께서 하신 그대로 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사제들로 하여금 자기 양떼와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됩니다. 한편 이 지점에서 사제의 목자적 사랑이 담긴 섬김과 함께 양떼를 이끄는 목자로서의 권위를 새삼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면 얼핏 목자의 섬김과 권위가 서로 대당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다스리는 사람인 "지도자가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26)는 말씀으로 섬김과 권위가 병행하는 요소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양들에 대한 목자의 섬김은 자기가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굽신거리며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과 권위는 형제들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맡겨진 양들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만 관철시키지 않으며, 그렇다고 '세상의 평화'를 위한 이기적 침묵이 되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직자성의 『사제의 직무와 생활지침』은 하느님 백성의 목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사제가'시대의 징표'에 민감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보편교회 그리고 인간의 역사 안에서 전진하는 표징들"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비록 신자들의 현재적 입맛에 쓰더라도 참 목자는 주님께서 양도하신 권위로서 양들의 입에 '쓴약'을 처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화의 도구인 '사제'
공동체는 항상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때문에 사제가 섬기고 봉사하는 공동체 안에서 사제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들의 한계와 약점과 무지가 숨김없이 드러나고,바로 이 지점에서 공동체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을 때 모두를 사랑한다고 믿지만,타인과 함께할 때 자신의 사랑의 한계를 절감하며,사제도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직무수행 중에 한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이러한 갈등을 부각하는 동시에 그 긍정적 요인에 주목합니다. 갈등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냥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제 길을 가지도 하며,갈등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불만과 갈등의 실제 요인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제는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새로운 전진의 고리를 만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이런 의미에서 조화를 이루어내는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곧 조화이시기에"(Ipse harmonia est)차이와 다양성과 다수성을 불러일으키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치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도구인 사제는 성령의 인도에 자신의 직무를 의탁하며,차이와 다름이 오히려 풍요와 다채로움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2013년 교황 프란치스코 성령 강림 대축일 강론)
2018년 11월 11일(나해)시노드 배움터3-3사제 성소 계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성직자 양성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며 과제입니다. "만일 사제들이 없다면 교회는 교회가 인간 역사 안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자 가장 핵심이 되는 사명을 실천할 수가 없을 것이다."(현대의 사제양성)지난 반세기 한국 교회는 교세의 성장과 많은 성직자를 배출하였지만,미국과 유럽의 교회들이 교세 성장과 더불어 사제 양성에 있어 성장기와 안정기를 거쳐 쇠퇴기를 맞이했듯 한국 교회와 대전교구 또한 현재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사제성소 감소 요인 ●사회적 요인-출산율 저하에 따른 인구 감소-종교의 사회적 역할 감소-경제 성장에 따른 의식의 변화-종교에 대한 관심 감소-무분별하게 개방된 성의식 ●내부적 요인-교구 성소 계발 시스템-본당 공동체의 관심-성직자 수도자의 관심-가정 교회의 분리 이런 현실에 비추어 신앙 공동체의 기본인 가정 교회 안에서 자녀의 신앙보다 학교 성적,대학입시,좋은 직장에 우선 가치를 두는 세속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올바른 신앙을 전해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하며,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예비신학생 월모임의 새로운 커리큘럼을 연구 및 개발하고,성소국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신학교의 양성 프로그램도 검토하여 보다 나은 운영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제 성소의 감소는 "공동체 안에 강렬한 사도적 열정이 없어서 의욕과 매력이 식어버리기 때문"이라는 원인 지적에 대해 "공동체의 형제적 삶과 열정은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하느님과 복음 전파에 봉헌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러한 살아있는 공동체가 성소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용기를 내어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봉헌의 길을 권유할 때" 젊은이들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복음의 기쁨)이라는 교황님의 권고에 따라 교구 전체가 하나된 마음으로 결실을 맺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2018년 12월 2일 시노드 배움터 4프란치스코 교황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제 1장 성덕의 소명권고의 목적 Gaudete et exsultate
교종 프란치스코는 선출 5주년을 맞이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Gaudete et exsultate」(이하 GE)라는 자신의 세 번째 사도적 권고를 출간하였습니다. 교종은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러저러한 평범한 존재로 안주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GE 1항)라고 말합니다.또한 "저는 소박한 바람은 많은 위험과 도전과 기회를 안고 있는 우리 시대에 맞갖게 실천적 방식으로 성덕의 소명이 다시 한 번 울려 퍼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GE 2항)라고 말하며 자신이 사도적 권고를 출간한 목적을 말합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특별한 사람의 특권? Gaudete et exsultate 흔히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의 특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복자와 성인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힘을 북돋우는 많은 증인들"(GE 3항)이지만 우리들 곁에 있는 많은 이웃들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교종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옆집의 성인들"이라고 지칭합니다.또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개인 혼자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구원 역사에서 주님께서는 한 백성을 구원하셨"(GE 6항)기 때문입니다. 교종은 "무한한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가정을 부양하고자 열심히 일하는 수많은 남녀,병자들,한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노수도자"(GE 7항)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옆집 이웃 안에서 발견되는 성덕"(GE 7항)이라고 말합니다.우리들이 생각하기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구성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성덕의 표징들로"(GE 8항)우리들이 감도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Gaudete et exsultate 성덕의 소명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강조한 바와 같이 우리들은 "완전한 성덕에 이르도록 저마다 자신의 길에서 주님의 부르심"(교회헌장 11장)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의회의 가르침과 함께 교종은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살아가고 각자 어느 곳에 있든 날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고유한 증언을 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부름"(GE 14항)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삶의 큰 도전에서 좌절하지 말고 "새로운 회개로 우리를 초대"(GE 17항)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우리들은 "수많은 작은 몸짓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그 성덕의 모습을 갖추어"(GE 18항)나가야 합니다. 각자의 인생에는 과실도 실패도 있지만 이런 세부적인 것들 하나하나에 사로잡히지 말고,"자신의 온 생애를 하나의 사명으로"이해해야 합니다. Gaudete et exsultate 성덕을 향한 "용기"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이러한 성덕의 소명에 우리들을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에게는 성덕의 정신이 필요합니다."(GE31항)이에 교종은 "성덕의 정신이란 혼자 있는 시간만큼 봉사에 헌신하고,사생활만큼 복음화 활동에 투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매 순간이 주님 보시기에 헌신적인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GE 31항)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들의 기쁨과 활력을 빼앗는 것이 아니니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시며 염두에 두신 그대로 되면서 여러분의 가장 내밀한 자아에 충실하게 될 것"(GE 32항)이라며 성덕을 향해 용기 낼 것을 권고합니다.2018년 12월 9일(나해)시노드 배움터 4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제 1장 성덕의 교묘한 두 가지 적
교종 프란치스코는두 가지의 그릇된 성덕의 형태인영지주의와 펠라지우스주의를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근본적으로 영지주의는 "순전히 주관적인 믿음"을 전제하고 "이는 위안과 깨달음을 줄 것 같아 보이는 특정한 경험이나 일련의 추론과 지식에만 관심을 두어 결국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 버리게 합니다."(GE 36항) 하지만 교종은 한 사람의 완덕이 '사랑의 깊이"로 가늠됨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GE 37항) 현대의 영지주의들은 "자신들의 설명으로 신앙과 복음 전체를 완벽히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고,"자신들의 "이론을 절대화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사고방식을 무조건 따르라고 강요합니다."(GE38항) 하지만 우리들이 확실하게 알고 있거나 명확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은 위험한 착각입니다.(GE 45항) 이에 교종은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에 따라 "삶으로 실천하려고" 배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영지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어떤 이들은 인간 의지" 곧 "개인적 노력"에 큰 의미를 두기 시작하였습니다.(GE 48항) 펠라지우스주의자들과 준 펠라지우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신비와 은총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이제 지성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의지였습니다."(GE 48항) 이들은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의 힘만 믿고,정해진 규범을 지키거나 과거의 특정한 가톨릭 양식에 완고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이들보자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GE49항)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바탕에 인간의 협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반대로 개인의 의지와 노력 위에 은총이 더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겸손의 덕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에 교종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하느님 앞에서 공로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007항)또한 "하느님의 우정은 한없이 우리를 초월하고,우리의 활동으로 살 수 없으며, 오로지 그분 사랑의 주도권으로 베풀어진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히 우리 공로가 아닌 이 선물에 대하여 기쁨의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야 합니다."(GE 54항)라고 말합니다. "율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사회적 정치적 쟁취에 대한 환상,교회의 전례와 교리와 특권에 대한 허식,실질적인 일처리 능력에 대한자만, 또는 자립과 자아실천 프로그램에 대한 집착"(GE 57항)이 현대의 신 펠라지우스주의의 모습이라며 이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습니다. 2018년 12월 23일(나해) 시노드 배움터 4프란치스코 교황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제3장 스승님의 빛 안에서 앞서 1장에서는 우리 모두에 대한 성덕의 부르심을 이야기했고. 2장에서는 그 성덕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두 가지 적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교종은 3장에서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예수님의 산상 설교의 내용을 통해서 말합니다. 왜냐하면,"참행복 안에서 우리는 스승님의 얼굴을 발견하고,날마다 자신의 삶에서 스승님의 얼굴을 드러내도록 부름을"(GX63항)받기 때문입니디ㅏ. 그래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행복한'또는 '복된'이라는 말은 '거룩한'이라는 말과 동의어"(GE64항)라고 말합니다. 참행복을 실천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 권능으로 우리들을 채워 주실 때 가능합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산상 설교의 내용을 성덕과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그 마음에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성덕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응대하는 것이 성덕입니다."(GE 74항).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성덕입니다."(GE76항).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곧 성덕입니다"(GE79항).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고 행동하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GE82항). "사랑을 더럽히는 온갖 것들에게 마음을 지키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GE 89항)."우리 주변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GE89항).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겨 줄지라도 날마다 복음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GE 94항). 성덕은 우리들이 '일종의 무아경에 빠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GE96항).오히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굶주리고,목마르고,나그네이며,헐벗고 병든 사람과 감옥에 있는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복음의 뛰는 심장"(GE 97항)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대하고 그들을 대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GE 98항) 하지만 이러한 참 그리스도인으로 성덕에 이르는 길에 두 가지 유해한 이념들이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실천적 자비의 행위와 "주님과 맺는 개별적 관계,주님과의 내적 결합"(GE 100항)을 분리시키는 오류입니다. 2.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의 사회 참여를 피상적,현세적,세속적,유물론적,공산주의적,대중 영합적인 것으로 보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그들은 마치 더 중요한 다른 문제들이 있다는 듯이,자신들이 수호하는 특정 윤리문제나 명분만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라는 듯이,이러한 사회 참여를 상대화 시키기도 합니다.(GE101항)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정한 것인지 식별하는 '기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남에게 해 준"(GE 104항)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가 진정한 것인지 식별하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삶이 자비의 빛으로 얼마나 변모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GE 105항) 그리스도교가 연구와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GE109항).
2018년 12월 30일(다해)시노드 배움터 4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제 4장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징표01첫 번째 징표는 항구함과 인내와 온유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켜 주시는 하느님께 굳건히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굳건함으로 우리는 삶의 우여곡절을 인내하고 다른 이들의 증오와 배신과 결점을 참아 내게 됩니다."(GE112장)
02두 번째 징표는 기쁨과 유머 감각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소심하거나 침울하거나 언짢거나 우울하거나 암울한 얼굴과는 거리가 멉니다. 거룩한 이들은 기쁨과 즐거운 유머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철저히 현실적이지만 긍정적이고 희망에 가득찬 영으로 다른 이들을 비춥니다" (GE122장)."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복잡하지 않게 생각하기를 원하십니다."(GE127장).
03세 번째 징표는 담대함과 열정입니다. "성덕은 또한 '파레시아(Parrhesia)입니다. 이는 담대함,곧 이 세상에 표지를 남기는 복음화 열정입니다."(GE129장). "담대함,열정,당당히 말하는 자유,사도적 열의,이 모든 것은 이 낱말,곧 '파레시아'에 담겨 있습니다."(GE129장).사도들도 복음을 선포할 때 두려움에 휩싸인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파레시아'를 간청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사도 4,29), 그렇기에 교종 프란치스코는 "다른 이들과 복음을 나누고,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억의 박물관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도록 사도적 용기를 간청"(GE 139장)하자고 권고합니다.
04네 번째 징표는 공동체 안에서 발견됩니다. "성덕은 다른 이들과 나란히 함께하는 공동체 여정에서 성장합니다."(GE141장). 또한 "사랑의 섬세함을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곧 그 구성원들이 서로 돌보아 주고 복음이 스며들어 있는 열린 환경을 만드는 공동체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그곳을 성화하십니다."(GE 145장)
05마지막 징표는 지속적인 기도입니다. "성덕은 초월에 언제나 열린 자세로 이루어지는 것이고,기도와 흠숭으로 표현되는"(GE147장)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외부 활동을 하는 중에도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먹고 마시며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무슨 일을 할지라도 하느님 안에서 사랑의 마음을 지키며 언제나 하느님을 바라십시오. " 탄원 기도는 우리들의 겸손과 순명을,청원 기도는 우리들의 희망을,전구 기도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아주 좋은 기도들입니다.(GE 154장).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 것은,우리가 멈추어 서서 스승님의 음성을 경청하게"(GE 156장)해 주고,이는 우리들을 "성찬례로 이끕니다."(GE 157장)
교종 프란치스코는"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위대한 다섯 가지 표현들"(GE 111장)을 각별히 강조합니다.이 징표들이 모든 것은 아니지만 현대 문화의 위험과 한계안에서 성덕의 모범을 이루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GE11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