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주님 부활 대축일 2018년 4월1일(나해)

모든 2 2018. 4. 1. 22:30

 

 

  + 요한 복음.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사람이 함께 달렸는데,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의 향기>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김윤석 루카 예산 주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아!

  부활 대축일이 되면 신자들과 나누는 인사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왜 우리는 이런 인사를 하는 것일까요? 부활 대축일을 맞이한 것이 정말로 기뻐서 이렇게 축하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희생과 보속의 시기가 끝났다는 것에 안도하는 인사일까요? 누구나 이렇게 인사를 하니까 이런 인사를 하는 것일까요?

  사실 주님의 부활을 축하해야 하는 이유는 부활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들은 복음(기쁜 소식)이며 우리 믿음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 여러분,전에 내가 전해 준 복음을 여러분의 마음 속에 되새겨 주려고 합니다. 이 복음은 여러분이 이미 받아들였고 또 여러분의 믿음의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1코린 15,1,3-5) 바오로 사도께서 전해 주시는 우리가 믿어야 할 신앙은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려고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수난 받으시고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우리도 이렇게 부활하리라는 믿음입니다. 이는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우리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코린 15,13-14) 이것은 우리가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부활을 기뻐해야 하고 서로가 부활하여 주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구원에 대하여 축하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원래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주시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까지 이르는 우리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오늘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사람들에게 전하는 부활 인사"부활을 축하드립니다."는 서로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희망을 심어 주는 인사이며 기쁨의 인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via시선(발딛는 부활)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의식하지 않고 걷고 의지대로 걷습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그곳에서 원하는 몸짓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큰 숨을 들이 마시며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신선한 공기로 채워진 방과 거실..깨어보니 꿈입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그리고 쉬지 않고 일했는데 그래서 제법 돈도 모았는데, 이른 아침,눈을 뜨면 날씨 예보를 확인합니다. 미세먼지가 위험수준이라는 예보를 봅니다. 마스크와 긴팔옷을 준비하고 긴 숨을 내쉽니다. 먹거리를 준비합니다. 식료품 매대를 살피고 확인합니다. 작은 글씨로 쓰여 있어서 출처의 확인을 포기하도록 만든 이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고 낮은 지식을 동원해 먹을 것을 선택합니다. 내 돈 내고 왜 이렇게 수고를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숨쉬고 먹고 자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피트니스센터나 헬스장을 갑니다. 그리고 방 한쪽에는 건강식품과 영양제를 채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건강진단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건강진단을 담당하는 병원의 전문가들의 진단은 오히려 긴장을 유발시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병원을 찾아가는 횟수만큼 병의 수가 늘어나고 먹어야 하는 약도 많아집니다. 건강해지려고 헬스장 혹은 피트니스에 가고,영양제를 먹고,어떤 사람들은 멋지게 가꿔진 골프장에서 채를 휘두르는데,시간이 지날수록 전문가들이 규정한 몸 안의 병은 늘어나고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되어 갑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돈도 벌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건강해지기 위해서(?) 돈을 더 벌어야 합니다. 아직은 쉬면 안 됩니다. 그렇게 계속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살수록 누군가는 부자가 됩니다. 전세계인구의 부유한 1/5이 전 세계 총소득의 81%을 차지(UNDP 2001 보고서)하게 됩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보다 더 많이 저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평등은 경제성장을 위해서 좋다(아서 루이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쉬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 그래야 "위에서 부스러기라도 떨어지지."

 

  열심히 삽니다. 그런데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이유를 찾습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부활은 기분학상의 감정의 고조가 아니라 현실 안에서 극복되는 자유체험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도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자주 묻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왜?"

 

 

 

요리 보고 조리 봐야

 

 

  스승이 제자들 앞에 사과 하나를 들고 나타나 묻습니다.

  "너희는 여기 사과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묻는 스승을 향해 제자들은 일제히 그렇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스승은 또 다시 질문합니다.

 

  "그럼, 그 사과를 설명해 보라"

 

  사과를 정면에서 보고 있던 제자가 먼저 말합니다.

  "둥글고 빨갛습니다."

  그러자 사과의 덜 익은 쪽을 보던 제자가 답합니다.

  "갸름하고 허옇습니다."

  사과를 위에서 내려다보던 제자도 답합니다. "가운데 움푹 파인 곳이 있고 갈색입니다."

 

  스승이 되묻습니다. ?그럼,그 중에 과연 어떤 것이 진짜 사과란 말인가?"

 

  제자들이 묘사한 사과는 사과의 일부이기에 그 누구의 것도 사과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천천히 설명합니다.

 

  "사과가 여기 있다고 했지만,어쩌면 진짜 사과는 여기 없는지도 모른다."

 

  엉뚱한 궤변처럼 들리지만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 부분을 보고 그 사람 전체라고 생각한다면,그 사람은 내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른 바 없습니다. 끊임없이 요리 보고 조리 보는 노력만이 한 사람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첫걸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오늘은

서로 마음을 풀고

한 발

내딛어

다가서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