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2018년 4월 8일(나해)

모든 2 2018. 4. 8. 22:30

 

 

 

지석리 성지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에서 참수 치명한 성 손선지 베드로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가 태어난 곳입니다.

1988년 두성인의 출생기념비와 50여 명 정도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야외 제대와 기념비가 있습니다.

문의: (041)836-0067 홍산성당

 

 

 

  + 요한 복음.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왕따  -강창원 마르티노 교정사목부 전담-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아갑니까?

  처음에는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만,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고집을 내세울 때면,더 이상 그와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우리네 일상적인 모습이 아닐까요?

  대화나 행동을 잘못하면,서로가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나중에 본인이 깨닫기를 바라면서 중지해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일대일의 상황이라면 몰라도 일대 다수인 경우에는 다수의 의견이 맞다고,혼자인 사람을 왕따시키는 모습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말에 토마스 사도는 자신의 눈과 손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는 아직도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사실은 많은 부분에서 "나는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그러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토마스가 온전한 믿음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어떻게 온전한 믿음에 다다를 수 있었던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토마스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공동체가 그를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가 의심을 버리지 못했을 때,나아가서는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고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했을 때에도 공동체는 그를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제와 의심을 가진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함께 그 문제를 껴안고 해결하기 위하여 애씁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신앙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모습은 오늘 제1독서의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한마음이 되어 가진 바를 서로 나눔으로써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런 이해나 편견 없이 서로를 받아들일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공동체에 함께 계시며 당신의 성령을 보내셔서 삶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며 자신만이 의인인체 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성을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른 외부적인 어려움이나 장애가 아닌 바로 나자신 안에 있는 마음의 장막인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삶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더불어 다른 이의 부족함까지도 함께 껴안고 살아갈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릇된 편견과 선입관이 진리를 가로막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실을 보지 않고도 믿는,즉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 늘 "나의 주님,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아멘.

 

 

  via의 시선(밖으로 나가기)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성당마당에 서 있는 소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원룸촌으로 둘러싸인 성당의 작은 마당에 서 있는 소나무,왠지 초라해 보입니다. 왜,하필이면 소나무를 심었을까? 마땅치 않은 사람들을 내물려버리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하루 종일 자글거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일까?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빗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공간,창 밖으로 보이는 실제가 몸으로 경험되지 않습니다. 지구라는 집에 살고 있으면서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무관하게 살고 지내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문을 닫고 밖과의 연결통로를 막습니다. 이제 문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나와는 관계 없는 일들이 됩니다. 지금 창문을 열거나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내리는 비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됩니다.

 

  창문을 열었습니다. 빗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바람의 촉감을 느낍니다.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우산을 들고 있습니다.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비는 무언가 몸의 움직임을 요구하는 실제입니다. 방 안에 머물면서 창문을 닫아 걸고 있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비는 그들이 직면해야 하는 실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사람들은 지구라는 집의 상태를 온전히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비가 오면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눈이 오면 산과 들을 향했고, 벌러덩 땅에 누워 따뜻한 별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하늘을 보았었습니다. 지구가 나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구가 발산하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비오는 날,빗소리를 들으며 먹었던 한잔의 소주와 서로의 마음을 나눴던 벗의 웃음소리를 기억합니다.

 

  이제 춥지 않고 덥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은 닫아야 하고,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구두를 적시지 말아야 하고,눈이 쌓여서는 안됩니다. 밖과 단절하면 할 수록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지구라는 집은 보이지 않게 되고,집은 해태의 공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몸의 움직임을 잃어버린 공간.

 

  밖으로 나가야겠습니다. 문을 열고.. 집의 반응을 느끼며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행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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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을 관람하고 난 후 공연에 만족한 관객은 평균 3명에게 만족감을 이야기하지만,만족하지 못한 관객은 평균 10명 내지 11명에게 불만을 이야기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긍정적 감정보다 부정적 감정이 더 강하고 길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입증한 결과인데, 이 결과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긍정적 감정을 가질 때보다 부정적 감정을 가지게 될 때,그 불만의 에너지는 만족의에너지보다 훨씬 더 강하고 길게 가기 마련입니다.

 

  타인에 대한 칭찬은 짧아도,타인에 대한 불만은 이상하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듯 보입니다. 어제도 말한 불만을 오늘도 또 누구에겐가 뒷담화 하고 있는 그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그렇게 계속 샘솟는 것일까요?

 

  또 다른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공연에 만족하지 못한 관객 26명 중 한 사람만 직접 공연단체에 불만을 말하고,나머지 25명은 아무 말 없이 다음부터 그 단체의 공연을 안 보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한다는 결과입니다.

 

  이 결과 또한 눈여겨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내게 어떤 불만을 말할 때,동일한 불만을 가진 말없는 사람이 25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귀에 거슬리는 1그램의 말에 25그램의 무게가 더 실려 있음을 알게 될 때,우리는 비로소 겸손을 깨닫게 됩니다. 긍정보다 부정의 에너지를 줄이려 노력할 때,우리는 비로소 평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부활절을 계기로 인생이란 무대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묵상해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한 손을 내밀고

한 손을 내밀어

그 손을 맞잡고

참 선한 마음이

하나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