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앙골성지(논산지구)
도앙골은 '도앙골'의 신자 집에서 은거하던 최양업 신부가 1850년에 귀국 후 최초로 장문의 보고서한을 작성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오래 전부터 신자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1866년 도앙골 신자들이 순교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천주교회의 순례지로 중요성을 지닌다.
현재 도앙골에서 순교한 순교자 다섯 분의 이름이 밝혀졌다.
+ 마르코 복음 1,40-45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말씀의 향기>
우리가 해야 할 몫 -김용태 마태오 도마동 주임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하는 나병환자를 보신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를 치유해 주신다. 접촉은 커녕 쳐다보기도 싫어하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그 몸에 친히 손을 갖다 대시며 그 문드러진 몸과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신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를 깨끗하게 하시고 다시 살려내신다. 그런데 그게 끝인가? 아니다.아직 하나 남은 게 있다. 바로 그 나병환자가 박탈당한 사회성의 회복이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진영 밖에서"(레위 13,46) 즉 하느님 장막의 보호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서 혼자 살아가야만 했다. 나병으로 인한 병고만으로도 힘든데 거기다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제외되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으니 그 아픔과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사람은 사회적,공동체적 존재다.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나병에 걸린 사람은 이러한 사회성을 박탈당한다. 병으로 죽어가고 사회적으로도 죽음에 이르는 이중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병환자의 치유란 것은 몸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병환자가 더 이상 부정하지 않고 깨끗해졌다는 사실이 사제를 통해서 선언되고 그런 그를 공동체가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나병환자의 삶이 온전히 치유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병환자의 몸뿐 아니라 사회성까지도 온전히 회복되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치유의 완성을 당신이 끝까지 이루어주시지 않고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두신다. 당신 친히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지만 그 다음에 그를 깨끗한 사람으로 선언하고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일은 사제들과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맡겨 두신다. 왜 그러실까? 하려면 다 하시지 왜 나머지는 우리의 몫으로 남겨 두시는가? 그것은 바로 그 모습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구원의 구경꾼으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구원의 협력자요 동반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나병환자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버림받고 부서지기 쉬운 작고 가난하고 여린 것들을 모두 당신이 하시는 것처럼 사랑으로 받아들여 돌보고 살려내서 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그렇게 당신 구원을 우리의 몫으로 남겨 놓으시는 것이다.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이다. 생로병사의 삶에 병이 없을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은 병자가 없는 세상이 아니라 그 어떤 병자도 다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당신 구원의 몫에 우리가 동참하는 모습이리라!
via의 시선(이상한 오늘)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엔진소리가 들립니다. 도로를 깨고 언 땅을 파기 위해서 포크레인이 서 있습니다. 추운 날,굳이 이렇게 추운 날에 작업을 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수도간 교체공사입니다. 단수 안내문을 받고 처음 느낀 감정은 '짜증'입니다. 수고하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의 자리에 짜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왜 하필 이렇게 추운 날에".. "수도관이 새는 것도 아닌데."
그러고 보면 자주 이상한 일들을 목격합니다. 블랙리스트를 단죄하는 판사가 판사 통합을 몰래 조사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고,범죄자를 잡는 검사가 범죄를 저지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학생들이 만든 논문을 자기 논문으로 발표하고,돈 많고 나이 먹은 사람이 젊은 여인의 기를 받겠다고 줄을 세웠습니다. 자신이 했던 일을 기억할 능력이 없었던 사람들이 나라를 운영하는 고위직에 앉아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절도에는 3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하고 몇백억의 돈을 횡령한 사람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사람이 민주주의와 사회의 성숙을 말합니다. 사람을 고문하고 사형을 선고했던 사람들이 사랑과 용서 그리고 애국을 말합니다. 거짓말과 저주의 언어로 정의로움을 말하는 이들의 밀알진 얼굴을 봅니다. 이상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없거나 잘못된 것에만 집중합니다. 왜일까? 자기불안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습니다. 무언가 불안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소리는 커지고 기억은 사라집니다. 친절과 통합의 언어가 아닌 저주와 분열 그리고 희롱의 언어를 뱉어냅니다. 분열되고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전쟁이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이상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살아지는 오늘이 이상합니다. 점점 적응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듭니다. 그래서 조금은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날 수 있도록...
치약 두 개의 평화
결혼식장에 갔다가 오랜만에 친구와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문득 자신의 신혼시절이 떠올랐는지 그때 부부 싸움했던 일화 하나를 화제에 올렸습니다.
"아내는 나보고 치약을 왜 위에서부터 짜서 쓰냐고 뭐라 하고,나는 치약을 아래에서부터 짜야 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한 시간 넘게 아웅다웅했었어."
그때는 무슨 힘이 남아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결혼 생활은 어쩌면 한 편의 코미디와 다를 봐 없다고 하는 친구에게 궁금해서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
"그래서 지금은 치약을 어떻게 짜서 쓰는데?"
친구의 답은 이랬습니다.
"지금? 그야.. 치약 두 개를 사서 각자 쓰고 싶은 방식으로 쓰지!"
당연히 지금쯤이면 한쪽이 한쪽에게 양보해서,결국 어느 한쪽의 방식대로 한 개의 치약을 쓰고 있을 거라는 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얼굴은 의외로 매우 평화롭게 보였습니다. 평화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인정하고 공존하는 법을 터득하면 얻게 된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세면대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개의 치약은 부부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표시가 아니라,서로가 서로의 방식을 존중한다는 진정한 애정표현이라는 친구의 말에 묘하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내게 강 같은 평화는 서로 다름을 쿨하게 인정하는 순간에 넘쳐나나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비록
어제와 같은
오늘의 반걸음이지만
내일은
한 걸음 내딛는
날이기를
기도합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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