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골 성지(보령지구)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생가터가 있으며, 병인박해 시절 홍주와 공주에서 치명하신 무명 순교자들의 줄 무덤 37기가 놓여져 있는 무명 순교자 줄무덤 성지.
+ 마르코 복음.1,29-39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과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말씀의 향기>
질문을 합시다 -김광호 요셉 연무 주임-
성서를 묵상하는 많은 방식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선호하는 방식 중에 하나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성서의 등장인물이 되어 그가 그 상황에 느꼈을 감정과 마음의 생각을 읽어보려고 하고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추정과 상상 그리고 질문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은 좋은 대화로 이끌어가는 도구이며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그분과 함께 지금 여기에 현존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예수님,제자들,시몬의 장모,군중들이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왔으며 그들을 고쳐 주시고,마귀를 쫓아내셨다. 제자들과 군중은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은 다음 고을로 자신의 일을 하려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 보면 '왜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을까?'하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이 질문은 병자는 죄를 지은 사람이며 그 죄의 사함을 받지 않으면 병에서 해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단지 신학적 이유만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집과 가족으로부터 떨어졌고,외면당했다. 그들의 고통을 알 수 없다. 짐작할 따름이다.
모든 병이 사라졌다고 해서 과연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체험했을까?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병이 들지 않았을까? 그럼 의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하느님의 나라는 현존하지 못하는 것일까? 병과 죄를 연결시키지 않는 지금은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치유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왜 지금은 모든 사람이 그러한 치유의 상태를 경험하지 않는가?
쉽게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의 상황에 머물러 보자,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려고 하심이 병을 고치는 사건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건이 예수님에게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한 사건일 수도 있지만 진정 하느님 나라의 현존은 다른 것이지 않을까? 이 질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말로 대답해 보면 어떨까? 자애,불쌍히 여김은 동정과는 다르다. 또한 고쳐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러한 마음을 지니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심리학에서 인간은 공감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입장이 있다. 그 이유는 각자의 경험이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공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이 자신의 세계 안에서 공감하는 것은 오류를 내포한 공감이기에 상대방을 알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온전한 공감 이전에 서로에 대한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네트워크를 통해서 공감의 일부를 통하여 그의 세계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결합의 중요한 지점을 만들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명명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시는 예수님,하느님의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가 사랑한 것을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via의 시선(산다는 것)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1월 31일, 2월을 준비합니다. 참 바쁘게 지냈습니다. 칠판에 기록된 일정표를 살펴보니,계획된 일보다는 뜻밖에 일을 더 많이 하고 지냈습니다. 조금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는데, 제 뜻과는 다른 매일을 보냅니다.
2월의 일정을 기록하기 위해서 칠판에 기록된 일정을 지웁니다. 지난 한 달의 기록이 사라진 그 자리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메모들로 채워집니다. 지난 한 달의 시간, 무엇을 하면서 지냈는지 애써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필요한 그 무언가를 하고 지냈고,그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지난 시간 만남을 유지했던 사람들과의 좀더 깊은 만남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책상 위에 널려진 자료를 보고 있습니다. 사전과 책 그리고 성경을 보면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눔을 위해서는 말해야 하는 것이 명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성찰합니다.
단순한 하루를 보냅니다. 일정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미사 봉헌과 기도,강의준비(공부),운동(쉼)이 전부인 하루입니다. 세상 안에 새로운 것이 있을까? "떠나라"는 누군가의 소리에 응답하면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될까?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여행이라도 가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자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그 만큼 나의 삶이 풍요로워질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 단순한 2월입니다. 그리 바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뜻밖의 일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모릅니다. 내가 계획은 세우지만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다만 하루의 단순함 속에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오늘 행복하소서.
낮엔 꽃,밤엔 잎
'푸르기니에 현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819년에 체코의 생리학자 '푸르기니에'에 의해 밝혀진 빛과 시각의 상관관계에 대한 현상입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 눈은 빛의 밝기에 따라 색깔을 다르게 인식한다고 합니다. 가령,밝은 빛 아래에서는 노란색이나 빨간색이,어두운 빛 아래에서는 초록색이나 파란색이 더 먼저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탐험하며 그 경이로운 기록을 책으로 남긴 '트리스탄 굴리'는 제라늄 꽃을 푸르기니에 현상의 가장 좋은 예로 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라늄의 빨간 꽃과 초록색 잎은 어스름 속에서 꽃은 흐리게,잎은 밝게 보인다.
하지만 정오의 태양 아래서는 빨간 꽃이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가고, 빛이 저물면 꽃은 다시 어두워지고 안보이는 반면 잎은 환하게 보이게 된다."
얼마 전까지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라는 노랫말을 수시로 방송에서 들었던기억이 납니다. 자꾸 듣다 보면 묘하게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노랫말에 중독됩니다.
하지만 잠들기 전 묵상 속에서 기도하다 보면, 전혀 다른 주님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주인공은 때때로 나일 수도 혹은 너일 수도 있으니 마음의 평화 있기를.."
꽃과 꽃잎은 서로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순간순간 변하는 빛 속에서 저마다 그 순간의 주인공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 스포트라이트를 골고루 비추어 주시는데,때때로 사람들은 그 빛을 자신만이 독차지하려고 욕심을 냅니다. 낮엔 당신,밤엔 나, 결국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행복한 세상을 위해 기도해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겨우내
움츠리고 긴장한
마디마다의 몸에서
어느 날 갑자기
활짝 피면
나도 놀라
화들짝 필 겁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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