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홍정수 신부(2014년)
"이 초를 손에 들고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백성의 정성을 굽어보시어,
현세에서 덕을 닦음으로써 마침내 꺼질 줄 모르는 영원한 빛에 이르게 하소서."
+ 루카 복음 : 2,22-40<또는 2,22-32>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재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여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다른 민족들에게는 개시의 빛이며,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를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말씀의 향기>
참다운 봉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갈라5,16)-권순택 안드레아 당진수청 주임
오늘 복음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우선 성모님과 성 요셉이 나오고 시메온과 안나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성전에 봉헌되신 어린 아기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이 분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이 분들은 '성령에 따라 사신 분들'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시어 성령의 궁전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또 요셉 성인 역시 성령의 목소리를 듣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여 아기 예수님을 돌보셨습니다. 성령과 함께 일체이셨고 같은 하느님이셨던 예수님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강생에서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늘 성령과 함께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의 모범으로 시메온 노인이 등장합니다. 복음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위로 받을 때를 기다리던 시메온 위에는 성령께서 머물러 계셨는데 그는 죽기 전에 그리스도 뵙기를 희망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성령께서 미리 일러주신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간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평생의 목표였던 예수님을 만나 일생 최대의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이 행복은 그가 안으로 항구하게 구원을 기다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한 성령과 함께한 시메온였기 때문에 그는 아기 예수님 안에서 인류의 구세주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항구한 기다림과 성령 안에 깨어있는 것이 주님을 뵙는 확실한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주님께서는 만민의 빛으로 들어나셨습니다. 시메온의 찬미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비추시는 빛'이시오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는 오늘 일 년에 단 한번 초를 축성합니다. 이 축성된 초는 강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취하신 인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가르침과 은총을 통하여 세상의 참빛이 되셨음도 뜻합니다. 나아가 타오르는 촛불처럼 주님을 향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뜨거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봉헌 축일을 보내며 우리 모두 스스로를 불사르는 촛불을 바라며 다짐해야 합니다. 본기도에서 함께 기도했던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성전에 봉헌되신 주님처럼 우리 자신도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하는 것입니다. 나의 좋고 아름다운 부분,감사한 부분만을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한 부분,죄스러운 부분까지도 봉헌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이 세상을 밝게 비추신 주님처럼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전해주는 또 다른 촛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청소년 바로보기(60)>
'청소년이해'를 위한 꼭지③
-'학교와 청소년'
이번 주는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속해 있는 두번째 사회로서의 '학교'안/밖의 청소년들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학교는 청소년들의 일상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오늘날이 비록 탈현대사회에 접어들긴 했지만 학교는 여전히 구시대적 주입식 교육과 시험위주 교육이 계속되고 있으며,개인의 차이보다는 학생이라는 보편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개인의 적응속도와 개인차가 무시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는 청소년 하위문화를 형성하게 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그럼 이제 여기서 청소년들의 학교생활과 청소년문화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정리해 보기로 하자. 먼저 ①'순응형'의 청소년은 학업 지향적이다. 가족 안에서는 부모에 순응하며 부모의 가치관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고 부모의 가치관의 차이를 크게 보이지 않는다. 부모와의 갈등 시 의견 개진 후 부모의 의견을 수용하는 유연성도 보인다. 이런 청소년은 학교생활에서도 학교규율에 비교적 높게 나타난다. 반면 ②'저항형'의 청소년은 대개 학교 성적을 고려하지 않는다. 가족 안에서는 부모의 관심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부모의 가치관과 차이가 크다. 갈등 시 부모의 의견수용 정도가 낮다. 학교생활 안에서는 학교규율에 대해 저항을 하는 편이고,공부에 대한 무관심으로 비교적 낮은 학업 성취도를 나타내며,학교생활에 대한 가장 낮은 만족도를 보인다.
③'중간형'의 청소년은 '순응형'과 '저항형'의 중간적 성향과 특성을 공유한다.
청소년들이 학교 밖에서는 과연 어떤 유형으로 나뉘어 질까. 아마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①'학교 밖 문화 생산자로서의 청소년'이다. 이들은 학교 안에는 학업과 규율에 있어 모범을 보이며,동시에 학교 밖에서도 나름대로의 건전하고 창조적인 문화공간을 확보해 가며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생산해 가는 유형이라 할 수 있다. ②'탈학교형 청소년'은 학교와는 무관하려 하며 학교 밖 영역을 통한 자신만의 삶의 기획을 세워 나간다. 흔히 기성세대가 말하는 ③'노는 청소년'은 자신의 독창적 영역을 영위하거나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대중적 성인문화를 비판 없이 즐기며 참여하는 청소년 유형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④ '수동적 탐색가로서의 청소년'은 자신들의 뚜렷한 목표나 계획 없이 기존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살아가는 대다수의 청소년이라 할 수 있겠다.
-신현문 발렌티노 신부 대전 정림동 살레시오 청소년수련원 원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연결기도 3 - 산 이를 위한 기도(Memento)
예물 수령 청원을 드리며 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뒤,전구는 산 이들을 위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이 때 미사 예물을 봉헌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기도 하였는데,이 기도가 생긴 동기는 사제에게 개인 지향을 가지고 미사 예물을 봉헌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예물 봉헌자의 이름을 호명하던 관습에 대해 예로니모 성인은 호명을 반대하며 침묵 중에 기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인의 걱정과 같이 중세기에는 미사가 예물 봉헌자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기도 하였기에,8세기 이후에는 미사 예물 봉헌자에 대한 호명은 사라지고 침묵 중에 지향자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9)>
응답 속도
단 한번이라고 눈물겹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고객이 텔레비전을 장만하러 전자상품 매장에 들렀다. 이 고객은 여기저기 꼼꼼하게 둘러 보더니 점원에게 다가가서 뭔가를 물어 보기 시작했다. 그가 궁금하게 생각한 것은 텔레비전 제품 설명서에 적혀있는 '응답속도' 표시였다.
고객 : 여기 모델은 응답속도가 4ms,저 모델에는 6ms로 적혀있는데..
점원 : 아,그거요? 모니터 반응속도를 나타내는 거예요.
고객 : 반응속도라뇨?
모니터 켜면 화면이 밝아지는 시간이요?
점원 : 아니요,화면이 움직임에 반응하는 시간이요.
빠를수록 잔상이 안 남아서 좋죠.
고객 : 'ms'라는 단위는 처음 보는데..
점원 : mili second의 약자니까 1000분의 1초를 나타내는 단위에요.
고객 : 1000분의 1초요?
점원 : 네,그러니까 4ms는 1000분의 4초,그만큼 움직임이 자연스럽다는 뜻이죠.
고객 : 1000분의 4초와 1000분의 6초가 사람 눈으로 구분이 되나요?
점원 : 뭐,솔직히 구분은 잘 안되지만,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빠른게 좋죠!
고객 : 가격차이가 좀 나는데..
고객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4ms의 모델을 선택했다. 물품 비용을 지불하고 돌아서는 고객의 등뒤에서 점원은 정말 잘 선택하신 거라고 강조하며 연신 상냥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인사를 뒤로 하고 매장을 떠나는 고개의 얼굴에는 어딘가 모를 찜찜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1000분의 1초까지도 경쟁력이 되는 숨막히는 세상입니다. 하지만,그래도 괜찮습니다. 속도 따위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 분이 우리 앞에 버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끝없이 우리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시지만,우리의 응답속도를 결코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단 한 번의 응답이라도 그 응답 안의 진정성만을 바라보십니다. 거짓과 위선이 없다면 속도나 횟수가 무슨상관일까요? 한 번의 기도라도,단 한번의 사랑이라도,평생 처음으로 한 용서라도 얼마나 빨리 했느냐보다,얼마나 눈물겹도록 진실되었느냐 그것만이 그분을 기쁘게 할 뿐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우리가
외면하면
말라가는
고사리손입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촛불의 기도 /이해인 수녀
하느님을 알게 된
이 놀라운 행복을
온 몸으로 태우며 살고 싶어요.
그분이 주시는 매일매일을
새해 첫날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언제나 셀레이며 살고 싶어요
하늘 향해 타오르는
이 뜨거운 불꽃의 기도가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도록
이웃을 위해서도 조국을 위해서도
닫힌 마음 열겼어요
좁은 마음 넓히겠어요
내 키가 작아 드는 아픔을
내 몸이 녹아 드는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하얗게 물이 되는
따스한 물이 되는
겸손한 맘으로 살고 싶어요
흔들리는 바람에도
똑바로 눈을 뜨며
떳떳하게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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