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5년 주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2015년 6월 21일

모든 2 2015. 6. 21. 10:00

기지시 성당 

 

+ 마태오 복음. 18,19-22

 

<두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말씀의 향기>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윤진우 세례자요한 노은동 보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하나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철조망이 한반도의 중앙을 가르고 있는, 그리고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고 있는 분단국이기 때문입니다. 분열된 지 오랜 시간이 흘러서인지, 이제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먼지가 쌓이고 오히려 건강한 통일, 참된 일치보다는 자신들의 것을 견고히 지키기 위해 더욱 힘주어 주장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을 임진각이나 통일전망대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 동료 간에 분열되는 우리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되기보다는 대화의 단절과 무관심 등으로 일치보다는 분열이 조장되고, 마음을 모으지 못하게 하는 유혹거리들이 난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도 우리와 같은 유혹으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저 끝까지 용서하고 용기와 마음을 모으라는 조언만을 남기실 뿐입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일치를 향한 어려운 여정을 재촉하십니다. 교회는 흩어진 많은 이들을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기 우해서 노력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세상을 용서하고 많은 이들을 보듬어 안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고 상대방의 삶이 그릇되었어도,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이 맘춰져서는 안 됩니다. 복음에 선포된 대로 "마음을 모아 함께'하려는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는 노래합니다. '교회는 하나의 빛, 온 세상에 퍼져 있어도 갈라지지 않으리라.'함께 있는 이들과 일치하려는 노력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사랑에 가장 합당한 실천자세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은 사랑이라는 뿌리에서부터 실천되어야 합니다. 물론 상대방의 모습을 무작정 이해하는 것이 일치는 아닙니다. 정의롭지 않은 모습에 타협하라는 것도 화합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치는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대화의 장으로 끊임없이 나설 때 가능해짐을 기억하였으면 합니다. 교회의 지향대로 우리 함께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그리고 이 사회의 건강한 일치를 위해서, 나아가 나와 함께 지내는 이들과의 화합을 위해서 복음에서 선포해주신 방법대로 마음을 모아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교회는 하나의 빛,

온 세상에 퍼져 있어도

갈라지지 않으리라.(복음환호송)

 

 

 

말씀과의 친교(1)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

 

  교구장 주교님께서 2015년 사목지표를 발표하시면서, 교구의 모든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이 마태오복음을 시작으로 매해 복음서 하나씩 필사하여 2018년 교구 설정 70주년이 될 때, 모든 교구민이 자신의 손으로 쓴 4 복음서를 갖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으며 우리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마음을 그렇게 봉헌하자는 말씀입니다.

 

  저도 개인적인 경험으로 성경 말씀을 빈 마음으로 규칙적으로 봉독하고 손으로 직접 써 가는 것이 말씀의 은총을 받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주교님의 제안에 열심히 동참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여 올바른 신학의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 초대교회 때부터 계속되어 왔고, 이러한 작업이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받아들이는 큰 틀을 제공해 왔기에 교회 건설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될 때, 그 몫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연재하는 글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구원의 역사에서 활동하셨고, 우리가 어떻게 말씀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첫 나눔을 다음 두 성경 구절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고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3,14)

 

  앞에 인용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온 것도 말씀을 통해서였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많은 시도들을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아우르시면서 결국 당신의 말씀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인용한 요한복음 서문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시어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주신다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창조와 구원역사, 그리고 말씀과 친교를 함께 묵상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66)>

 

타인이라는 최고의 거울

 

내 눈으로 내 얼굴을 볼 수 없기에..

 

1. 마음의 거울

 

   아무리 과묵한 사람도 수다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랑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아무리 수다스러운 사람도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불편한 사람과 마주해 있을 때입니다.

 

   결국 과묵과 수다는 성격의 차이라기보다는 마음가짐의 차이입니다. 누군가 우리 앞에서 수다스럽거나 침묵을 지킨다면, 그 모습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줍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게 한 사람인지 아니면 닫게 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그런 거울 말입니다.

 

2. 믿음의 거울

 

   아무리 소극적인 사람도 매우 열정적일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믿어 줄 때입니다. 아무리 적극적인 사람도 한순간 위축될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을 때입니다.

 

결국 소극과 적극은 성향의 차이라기보다는 믿음의 차이입니다. 누군가 우리 앞에서 매우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반재로 소심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믿음을 쏟고 있는지 보여주는 거울 말입니다.

 

3. 사랑의 거울

 

   아무리 냉혹한 사람도 연약하게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차가움을 끝까지 용서해 줄 때입니다. 아무리 따뜻한 사람도 냉정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그 따사로움을 이용하고 있을 때입니다.

 

   결국 냉혹함과 따뜻함도 기질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의 차이입니다. 누군가 우리 앞에서 더욱 냉정해지거나 한결 따뜻해진다면, 그것 또한 우리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됩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 말입니다.

 

  내 얼굴은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습니다. 내 얼굴 표정을 보려면 무엇엔가 비춰봐야 합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자기도취에 빠져 스스로를 망각하고 살까 봐, 하느님은 타인이라는 훌륭한 거울을 주셨습니다. 이제 타인을 통해 현재의 내 모습을 발견하는 행복한 멋 내기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메마른 갈증

척박한 마음

풀어주는 생명의 비

세세히 내려
이 땅에 큰 사랑

넘치게 하소서.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분단 70주년을 맞는 한국 천주교회의 담화문

 

분단 70년을 맞는 한국 천주교회의 반성과 다짐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올해는 우리나라가 광복의 기쁨과 남과 북으로 분단된 아픔을 겪은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이 겪었던 분단의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 귀양살이 70년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70년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은총의 새 시대를 맞이하였듯이(2 역대 36,21 참조), 올해 2015년이 분단과 갈등의 70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평화를 여는 해가 되기를 염원합니다.

 

   그동안 남북한은 "7.4 남북 공동성명(1972년)'을 비롯하여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을 약속한 "남북 기본합의서(1992년)', '6.15 남북 공동선언(2000년)', '10.4 남북 공동선언(2007)'등을 통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정치적 이해관계로 얽힌 남북 관계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과거의 유물이어야 할 냉전의 극한 상황이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으며, 내부적 이념 갈등도 이미 도를 넘어선 듯 보이고, 또한 비정상적인 상황들이 상황들이 사회 절반을 병들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 70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자리에서 민족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언자적 소명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2 코린 5,18)을 소명으로 남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거짓 평화와 자기 위안에 빠져 남북 분단의 갈등이 빚어내는 왜곡된 현실을 눈감아버린다면 신앙인의 소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해 우리나라를 방문하시어, 분단된 남북한이 '평화의 기초이며 평화로 향하는 길인 형제애'를 회복할 것을 바라셨고, 모든 신자에게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죄악인 "무관심의 세계화"를 경계하라고 강력히 권고하셨습니다. 점점 심해져 가는 경제적 양극화 현상과 탐욕적 이기주의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에 대하여 무관심하도록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이웃인 북녘 동포들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으로 도울 때, 우리 믿음이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야고 2,14 참조)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는 한반도 분단 70년을 맞아 올해를 평화의 원년으로 삼고자 합니다. 남북 간의 참다운 형제에 와 화해의 부족으로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남북 간의 형제적 사랑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평화적인 통일을 통해 세계평화의 초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정치적 타산과 야망으로 요원한 것처럼 보이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희망을 찾고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독일의 통일을 위해 서독 교회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마르 9,29)는 성경 말씀대로 끊임없는 기도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리고 동독에 '특별한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하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부터 먼저 마음을 열고 기도운동에 동참합시다. 특별히 매일 미사 전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지향하는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께 우리의 희망을 전구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우리는 정부와 북한 당국에 간절히 요청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로운 공존, 그리고 미래에 이루어질 통일로 가는 지름길인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은 정부 차원은 물론 민간 차원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인도적 차원에서의 협력은 정치적 이념이나 이익에 우선되어야 합니다. 종교단체와 민간단체들을 통한 상호 교류와 협력 사업이 활발해져 참된 평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정부가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또한 남북한 당국자들이 기존의 합의들을 서로 존중하여 분단과 냉전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용서와 화해를 앞세워야 합니다. 조건 없는 용서만이 민족 화해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힘과 무기로 써가 아니라 진정한 대화를 통하여 군비를 축소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정착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모색하고 실천할 것을 요청합니다. 동북아 분쟁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한반도가 평화의 중심이 되도록 관련 당사국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면,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긴장과 대립을 넘어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인 교우 여러분!

   죽음의 어둠을 넘어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위에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신 예수님의 전적인 신뢰에서 비롯되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어둡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기쁜 소식이 울려 퍼지도록 주님께 간청합시다.

 

   이 땅에 평화를 이루고자 애쓰는 모든 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참된 평화의 도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2015년 6월 1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

 

 

 

여러분의 삶에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자비의 특별 희년'(2015년 12월 8일~2016년 11월 20일) 선포 배경과 지침이 담긴 칙서 '자비의 얼굴'(Misertcordiae Vultus)을 발표, 가톨릭 교회와 모든 신자가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기를 강조했다.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입니다."로 시작하는 칙서에서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행동을 나타내는 핵심 단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교황은 "우리는 점점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내도록 요청받는다"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자비가 필요한 시대임을 명확히 했다.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거듭 강조한 교황은 "자비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서 행동과 태로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교황은 칙서에서

 

*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 주기

* 낯선 이들 환대하기

* 아픈 이들과 감옥에 있는 이들 돌보기

* 고통받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 주기

* 용서하기

* 참고 견디기

*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기 등 자비의 실천 방법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자비의 희년을 지내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고 화해는 시간을 보내기를 희망했다. 부정부패를 일삼고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에겐 자비의 희년이 회개와 속죄의 시간이 되기를 기원했다.

 

  교황은 죄인을 용서하는 데 절대로 지치지 않는 하느님 자비를 강조하며 교황의 권한으로 죄를 용서해주는 '자비의 선교사 제단'을꾸려 파견할 것을 발표했다. 이밖에도 자비의 희년 동안 각 교구에선 주교좌성당이나 성지에 로마 4대 대성전에 있는 '성년 문'(Holy Door, 희년에만 열리는 문)을 상징하는 '자비의 문"(Door of Mercy)을 지정하기를 권고했다.

 

   교황은 이날 전 세계 모든 주교와 신자, 온 가톨릭 교회가 자비의 희년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주교성 장관 마크 우엘레 추기경, 인류 복음화성 장관 페르나도 필로니 추기경, 동방교회성 장관 레오나르도 산드리 추기경에게 칙서를 전달했다. 이어 아시아 교회와 아프리카 교회, 동방 교회를 대표한 각 주교들에게도 칙서를 전달했다. 아시아 교회를 대표해선 홍콩 출신의 사비오 혼 타이파이(인류 복음화성 차관) 대주교가 칙서를 받았다.

 

평화신문 박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