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5년 주보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2015년 7월 5일(나해)

모든 2 2015. 7. 6. 22:00

가양동 성당(대전 동부지구)

본당 설립 : 1989,8.19/주보성인 :시몬

 

 

+마태오복음. 10,17-22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순교로 빚어낸 신앙의 열매 - 유영근 야고보 대흥동 보좌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나라의 첫 번째 사제로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나서 공부를 하고 다시 들어와 방인사제로서 활동을 하다 순교를 하셨습니다.

 

   조선시대, 그 박해받고 많은 이들이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시대에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 때문에 박해를 받고 상처를 받고 채찍질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가 형제를 팔아넘기고 부모가 자식을 팔아넘기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스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우리나라 박해시기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끝까지 견디고 하느님을 증거 하다 간 이들은 모두 성인품에 올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구원을 얻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약속을 믿었기에 환난도 자랑으로 여기고 고통과 괄시와 박해와 억압을 하느님 은총의 소치로 생각하고 순교의 화관을 얻었습니다.

 

   순교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의 기로에 설 때, 무엇을 선택하느냐입니다. 이 세상의 것보다 부귀영화와 장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하느님의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내 목숨보다 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순교입니다. 그렇게 열렬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서 죽어간 우리 선조들의 삶이 부럽고 아름답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는 전래동화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역사적인 기록이고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벌써 오래전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신앙의 유산입니다. 지금과 같은 땅, 지금과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을 증거 하다 간 김대건 신부님의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신앙의 모습이 우리의 핏속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이 자리에서 이렇게 큰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노래하는 미사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감사드립니다.

 

   세상 온갖 일이 막 비주명(莫非主命:하느님의 뜻 아닌 것이 없다)이요, 막 비주 상주 벌(莫非主賞誅罰:하느님께서 상 주시고 벌하시지 않는 것이 없다)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爲主)하고 오직 주께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야 너희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설러말고 큰 사랑을 일궈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 삶의 자리를 돌아보며 하느님 안에 행복한 하루를 감사히 여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과의 친교(3)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구원의 말씀

   태초에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생명들이 당신 안에서 완성되는 곧 구원에 이르는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역사를 미리 말씀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집트 탈출과 광야 여정 그리고 가나안 정복으로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우상을 섬기며 불의한 삶을 살자 예언자들을 통해 유배를 예고하셨고, 유배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그들에게 고국으로의 귀환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긴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깨달은 것은 인간의 구원이 결코 인간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자신들이 가진 것 없이 유랑하며 힘겹게 산다고 느끼던 때가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 안에 살던 시기였고, 가진 힘을 자랑하며 의기양양 국가를 운영하던 때가 사실은 가장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살다가 결국 유배의 벌로 이어진 시기였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키워갔습니다. 많은 예언서들의 후반부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아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처지에 사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를 이루시며 우리도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잘 섬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가까이하시며 모든 이들이 부족함이 없이 살기를 원하셨고, 세리와 창녀를 맞아들이시며 어느 누구도 차별 없는 한 형제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 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첫마디에서부터 우리 모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이고,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은 고통과 궁핍 중에 있는 형제들을 우리가 어떻게 돌보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떤 이들의 어려움을 돌보아 주었다고 해서 그 공로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의 고통을 진심으로 나의 것으로 여기고 돌보는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는 희생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말을 건네시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성령을 받으라고 건네시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요한 20,21-22), '숨을 불어넣었다.'는 동사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코에 숨을 불어넣었다는 것(창세 2,7)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고 성령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부활의 새 생명으로 재창조 곧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68)>

 

사랑의 노래

 

자리 바꾸기, 사랑의 출발

 

  위의 그림은 '사랑의 노래'라는 그림입니다. 워낙 파격적인 그림으로 유명했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인데 이 그림 또한 황당합니다. 달콤함을 연상시키는 그림 제목과 달리 달랑 사과 세 개만 커다랗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죠.

 

   사랑의 노래는 선남선녀가 함께 불러야 할 듀엣 곡이지 사과 셋이서 불러야 할 트리오는 아닌 거 같습니다. 그것도 빨간 사과, 파란 사과, 노란 사과 셋이서 부르는 노래라뇨? 더 당혹스러운 건 사과 세 개가 바다를 배경으로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림에 대해 무지한 편이라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작가의 그림을 좋아하는 건, 매일 먹는 사과를 이토록 새롭게 느끼게 해 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가만히 들야보고 있으면 먹는 사과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파도 소리가 혹시 사랑의 노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먹을 때 엉뚱하게도 사랑을 생각해 보게 된 것도 이 그림 덕분입니다.

 

   어떤 것도 일상이 되면 잊혀집니다. 늘 당연히 거기에 있는 거라는 익숙함은 그 존재를 잊게 합니다. 새로 들여온 책상도 일단 자리를 잡으면 그때부터 더 이상 새롭지 않습니다. 새로 만난 사람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면 사람은 안 보이고 일만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아빠 엄마를 부모의 자리에서만 바라봅니다. 아들딸을 자녀의 위치에서만 이해하려 합니다. 누구의 아빠 엄마, 누구의 아들딸, 누구의 스승이나 제자... 이렇게 일상적 위치에서 누군가를 바라보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됩니다.

 

  사랑은 어쩌면 '일상성'에 갇힌 존재를 '의외성'으로 해방시켜 주는 에너지일지도 모릅니다. 항상 그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누군가를 엉뚱한 자리로 옮겨 보려는 노력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닫힌 이해는 편견일 뿐이며, 열려 있는 이해만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노래라는 그림은 그래서 제게 이런 노래를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사과를 파도치는 해변가에 놓아 보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다."익숙해진 누군가를 새로운 낯설음으로 마주하는 7월, 늘 마주하는 예수님도 다시 한번 수줍게 마주치는 7월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새들의 시(詩)

꽃의 노래

구름의 미소

비의 찬미

 

하늘에서

나려나려...

 

이 땅에 내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 마당>

 

내 안에 하느님은 어느 자리에 계실까?

 

   지하철 안에서도, 음식점에서도 카페에 모인 엄마들과 같이 있는 아기들 사이에서도 이제 휴대폰은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우리와 밀착되어 있다. 과거에 우리 아이들은 장면이 빠르게 변하는 TV광고를 좋아했는데 아이들은 아이들이 일부러 광고를 기다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것보다 더 자극적이고 빨리빨리 변하는 것들이 스마트폰 안에 모두 다 있으니까 말이다.

 

   엄마들은 스마트폰에 아이들을 잠시 맡긴다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수다 삼매경이다. 아빠와 아들은 눈을 마주 보고 얘기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통해 이야기한다. 우리 뇌는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그 자극을 뇌에 전달하여 전두엽에서 생각하고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며칠 전 TV에서 게임에 오래 노출된 5살짜리 꼬마 아이의 전두엽은 양쪽이 균형 있게 발달한 정상인과 달리 한쪽이 아예 없다는 것을 보았다.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적인 자극을 아이에게 주다 보니 전두엽의 한쪽이 기능을 잃은 것이다. 사이코 패스니, 반사회성이 ADHD니 하는 것들은 과거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름들이다. 생각 없이 자신이 느끼는 대로 충동 억제에 둔감하고, 양심을 느끼지도 못한다면, 게임에 나오는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하느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내시고 참 좋았다. 하지만 만물을 다스리고 당신을 찬미하며 에덴동산에 살라고 하시던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토록 잠시도 쉬지 않고 어지러운 시(視) 자극을 받는 우리는 어디에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두엽 한쪽이 없는 그 아이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은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순리대로 살아가는데, 우리 인간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원죄를 저질렀듯 그 원죄는 늘 되풀이되고 있는 것인가? 틈을 주지 않는 시(視) 자극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하느님과 자리를 매일 조금이라도 늘려 가야 옳지 않은가! 그분의 자리가 우리 안에서 넓어지고, 그분이 바로 우리 여야 우리 삶도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지 않을까! 스마트폰을 들고 있을 시간에 성모님께 장미꽃 다발을 바쳐본다-

 

-이애영 다시아나/해미성당-

 

 

각 나라의 중산층 기준

 

* 한국의 중산층 기준(직장인 대상 설문 결과)

 

1. 부채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2. 월급여 500만 원 이상

3. 자동차는 2,000CC급 중형차 소유

4. 예금액 잔고 1억 원 이상 보유

5. 해외여행 1년에 한차례 이상 다닐 것.

 

*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퐁피두 대통령이 Qualite de vie'삶의 질'에서 정한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

 

1.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고

2.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4.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5. '공분'에 의연히 참여할 것

6.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영국의 중산층 기준(옥스퍼드 대에서 제시한 중산층 기준)

 

1. 페어플레이를 할 것

2.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3.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4.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5.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 미국의 중산층 기준(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

 

1.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2.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3.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것

4. 그 외,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 있을 것

 

평생을 아파트 평수 넓히는 데에 전력을 다한 50대 아주머니가 말기암으로 고생하며

이제야 살만해졌는데 죽음이 목전에 왔다고 억울해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 과연

무엇이 인생의 가치를 가늠하는 것인가?

인생이 사는 집 평수와 화장실 개수나 외제차를 소유하는데 주력하다가 죽음을 맞이함이,

얼마나 인생의 삶의 가치와 동떨어지게 만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