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4년 주보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2014년 4월 27일(가해)

모든 2 2014. 4. 27. 10:13

하느님의 자비」강진영 신부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1베드 1,5)

 

 

자비의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

 

예수님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성심안에

제 자신을 잠궈두겠습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가 제 위에

머무르게 하여 주소서.

 

-파우스티나 성녀-

 

 

   + 요한 복음.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니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꿀꿀이 '오잉크','헝크','그런즈','뇌프'를 만날 때-주님,저희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손은석 마르코 이주사목(천안)전담-

 

  오늘은 교회가 정한 이민의 날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이민자의 수가 157만여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수가 우리 사회의 부분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옴살스럽게 어우러져 살아 숨 쉬는 사회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더불어 살기 위한 사고의 전환입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돼지의 '꿀꿀'소리가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소리날까요? 확인해 보면 "정말 저런 소리가 날까? 저 사람들 이상한 것 아니야?"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오잉크,알바니아-헝크,독일-그런즈,스웨덴-뇌프,어떻게 '꿀꿀'이 '그런즈'가 될까요? 돼지가 나라별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 모를까 말 못하는 같은 돼지라면,분명 돼지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뭔가 다름이 있는 것입니다. 나라별 사람들의 주관적 형식이 달라 같은 것도 다르게 들리고,다르게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도 꿀꿀이야'라고 우겨도 독일사람들에게서 '죽어도 그런즈야'라는 대답만 듣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이주민 실무자 연수 때 한 신부님의 강연에서 이주민들이 가장 답답해 하는 것은 '빨리빨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꿀꿀'과 '그런즈'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답답하기 때문에 빨리빨리 하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사고인데 외국인들은 빨리빨리하라고 해서 답답하다고 합니다. 왜 한국인들에게는 노동량에 따른 생산의 효율적 가치에 따라 속도의 선상에서 시간을 이해하기 때문이고,다른 이주민들은 마음의 심리적 상태에 의해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화가 안 돼 벽에 부딪혀 답답하고,빨리빨리의 말 속에서 자유의 결단이 타율이 되어 답답한 것입니다. 답답하면 빨리빨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빨리해서 답답한 것입니다.

 

  이주민들과 더불어 살려면 먼저 서로 다름에 대한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살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많은 차이들이 우리 생활 속 깊숙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꿀꿀'이 '헝크'나 '그런즈'를 인전할 만한 관대함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차이를 인정하는 사고의 전환은 하지 않는다면 이주님들은 우리가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을지 모릅니다. '꿀꿀'이 먼저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면 '그런즈','헝크','오잉크','뇌프'도 주님을 뵙고 기뻐하듯 문을 열고 인사할 것입니다. 알고 보면 모두 다 같은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청소년 바로보기(72)>

 

'청소년이해'를 위한 꼭지(15)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 ② (종교)'

 

  돈 보스코 성인 예방교육의 두번째 요소는 '종교(Religione)'이다.

 

  어린 보스코는 엄마(가경자 맘마 말가리따)엑게서 늘 '하느님께서 너를 지켜보고 계신다'라는말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아들에게 하느님의 부성적 사랑과 하느님의 현존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교육은 신부가 되어 오라토리오에 거리의 청소년들을 모아 교육할 때도 교육의 한 축이 되었다.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자주하고 매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꾸중을 멀리하는 예방교육 활동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라고 생각했으며,자연주의적이고 세속적인 교육보다,돈 보스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종교교육은 영혼에 좌절에 없음을 알게 해 준다고 확신했다. 다시 말해 종교만이 완벽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돈 보스코의 제자 중 어린 나이에 성인이 된 도미니코 사비오에게도 '나에게 영혼을 주고,나머지는 다 가져가라(Da mihi animas,caeteratolle)'라는모토를 일러줌으로써 절대적인 청소년들의 영혼구원의 의지를 표명했다. 따라서 예방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종교교육을 통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인 것이다.

 

  함께 살던 청소년들에게 돈 보스코는 고해성사와 영성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절대로 강요성을 느끼게 하지 않았고, '종교,안에 '이성'(지난주에 설명)을 붙여 넣음으로써 감성주의나 지나친 경건주의로 신앙심을 빠지지 않도록  교육했던 것이다.

 

  이 종교 안에는 돈 보스코의 '사랑'이 녹아 있었고, 그것은 교육자에 대한 신뢰와 애정으로 연결되어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돈 보스코는 결코 마리아 신심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않았다. 왜냐하면 돈 보스코의 3대 신심은 바로 성체,교황,마리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의문을 제기해 본다. 우리나라처럼 종교 다원주의 국가에서 과연 가톨릭 종교교육을 강조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종교'를 대치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양심'이라 할 수 있겠다. 모든 종교에는 윤리적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에는 종교가 양심으로 대치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돈 보스코예방교육의 최종 목표는 바로 신앙과 성사를 통한 '청소년 영혼구원'이기 때문이다.

 

-신현문 발렌티노 신부 대전 정림동 살레시오 청소년수련원 원장-

 

 

<미사 속 숨은 보화>

 

성찬 제정과 축성문

Narratio instituionis et consecratio 4 

 

  사제는 성찬 제정문을 바치고 난 후,성체와 성혈을 들어 교우들에게 보입니다. 성체를 거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교우들에게 보여주며 경배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는 이런 예절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세 시대에는 제대가 벽에 붙어있었고 사제가 교우들을 등지고 미사를 했기에,교우들은 제대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13세기에 이르러 교우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축성된 성체와 성혈을 들어올리는 예절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예식은 비오 5세의 로마 미사경본에서 정식 예규로 쓰이게 되었으며,현행 미사 전례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20)>

 

추락 방지 비법

기억력은 행복 복원력..

 

  깊은 산속에서 수련을 하던 스승과 제자가 오랜만에 산 아래 마을 시장에 들렀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중 새장 속에 갇힌 새를 발견하고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제자 : 스승님,새장 안에 갇혀 있는 저 새 말인데요..

  스승 : 그 새가 어떻단 말이냐?

  제가 : 날지 못하니 참으로 불쌍해 보입니다.

  스승 : 그럼 새들은 어떠하냐?

  제자 : 어떤 새들 말씀이십니까?

 

  스승은 땅에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열심히 먹고 있는 한 무리의 비둘기들을 가리켰다.

 

  제자 : 저 새들은 당연히 불행하지 않습니다.

  스승 : 어째서 그러하느냐?

  제자 : 언제라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승 : 그런데도 저 새들은 언제나 저곳에만 있었다.

  제자 : 그야..

  스승 : 날개가 곧 자유는 아니다.

  제자: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승 : 새장의 유무가 자유의 유무를 증명하지 않는다.

  제자 : 그러하면 무엇이 자유입니까?

  스승 : 하늘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몸이 자유로운 것보다 소중한 건 없고,배를 채울 수 있는 절박한 것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늘 소망합니다. 아프지 말아야 하고,주머니가 가벼워지지 않아야 하고..그런 소망이 반복되어 쌓이면 이상하게 갇힌 듯 답답하고,제자리만 맴도는 듯 어지러워집니다.

 

  그럴 때 소망을 멈추고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내 심장이 하늘을 기억하면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내 발밑이 온통 바다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개를 펴지 않아도 창공을 나는 자유를 만끽할 비법,그건 오직 주님을 잊지 않는 소박한 기억력뿐입니다.

 

 

 

주님!

저희의 실낱같은 의심도

없애주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성 요한 23세 교황님의 "영적 일기"중

 

 부활  주일(復活 主日)

 

 "주께서 이루신 일이옵기에,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이나이다."(시편 117,23). 알렐루야.

오늘 예수님께서는 진정 올해에 큰 부활절의 평화를 내게 갖다 주셨다.

오늘 하룻 동안은 내 일생에 있어서 한 시기를 금 그어주도록 정해진 날이다.

피정으로 예비된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그의 가장 은밀한 사랑을 미리 맛보게 해 주셨다.

 

  그리고 <느끼는 방법으로 하느님을 섬길 때에 그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라는 뜻을 미리 깨닫게 해 주셨다.

새로운 차부제는 성인들과 성교회의 앞에서 예수의 사업을 위해 공식적으로 봉헌되었고,

그의 사제로서 나는 오늘 자유로움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내 자신이 자유롭다는 확신에 도취되었다.

그 자유는 예수께서 그의 죽음과 영광된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갖다 주신 것이다.

나는 지상의 모든 인연에서 자유로와졌고, 예수를 위해 예수와 함께 봉헌의 높은 곳으로 나를 들어 올리기에

재빠르고 성급하게 되었다.

 

 예수여!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꿈꾸어 온 이날이 다 지나가기 전에 당신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기 위하여

당신 앞에 엎드리어 존경과 사랑으로 몸을 떠나이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저의 마음을 기쁨으로 넘치게 하시었고,

당신의 선택 될 자들 사이에 저를 받아들이므로 신성한 영광을 주시었으니, 생명이 계속하는 한 당신께 감사하겠나이다.

당신과 함께 부활하고, 당신의 장엄한 승리의 날에 당신 성심의 사랑과 영광의 광채로 밝혀진 저로 하여금

어제의 서품식 때 제게 내려주신 그 은총을 항상 간직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오늘부터 <당신 영광이 나타날 때 내가 당신 영광에 보탬이 될 그날까지>

나로 하여금 <덕에서 덕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소서 (시편 83,8;16, 15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