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연중 제30주일 2017년 10월 29일(가해)

모든 2 2017. 10. 31. 10:28

삽교성당(홍성지구)

본당 설립: 1966.9.19/주보성인:예수 성심

 

  + 마태복음22,34-40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의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말씀의 향기>

 

  팩트 체크(fact check)    -나봉균 요셉 사회사목국장-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심지어 가짜 뉴스(fake news)가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는 시대다. 정보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단순하게 들은 것이 전부이고 사실이라고 확신해 버리면 자칫 오류에 빠지거나 진실이 왜곡될 수 있다. 그로 인해 정보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엄청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사안일수록 사실인지 거짓인지,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는 거짓인지 진위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닐 때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정치인들의 막말이 우리의 눈과 귀를 오염시키곤 한다. 도대체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개인의 입지나 소속된 정당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말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모 방송사의 뉴스에서는 팩트 체크(사실 확인)라는 꼭지가 있어서 정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언론이 신뢰를 얻으려면 이러한 사실 확인 과정은 꼭 필요하다. 우리네 인생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옳고 그름을 따져 물을 일이 있으면 사실 여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둘째가는 계명이라는 말씀이다. '그냥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이고 앞선다는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하느님을 첫째로 사랑하는가?' 사실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하느님을 너무나도 잊고 산 나머지 죄송한 마음에 "하느님 맙소사!"가 튀어나오기 십상이다. 그나마 이웃은 사랑하는 것 같은데 하느님을 사랑해 드리는 일은 늘 게으름 천국이었을 수 있다. 늘 내 행복과 기쁨이 먼저고,가족 사랑이 우선인 그런 삶을 흔히들 살고 있다. 심지어 성직자라고 하는 나 자신조차도 하느님을 첫째로 사랑해 드리는 일에 깨어 있지 못하고 민감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뒷전으로 밀리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믿음을 가진 우리는 오늘 화답송 후렴 시편을 매일 고백하고,또 살아야 한다.

그래야 신앙인이다.

 

  "저의 힘이신 주님,당신을 사랑하나이다."

 

 

  via의 시선(우리에게 필요한 것)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오늘은 제가 살고 있는 삶의 터,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도솔산을 보고 있습니다. 잠시 쉬어 가는 햇님이 발산하는 빛은 산위에 터잡고 있는 생명이 하나이면서 함께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대전시에서 함께 있어서 좋은데 굳이 하나를 없애려고 합니다. 아니 하나가 아니라 하나가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존재들을 없애고 싶어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대가로 얻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통장이라는 종이에 새겨진 긴 숫자의 나열입니다.

 

  가끔 존재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기능성이 잘 갖춰진 옷을 입고 서둘러 길을 떠나는 사람들,그런데 이상합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삶의 대부분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곳,자신이 터잡고 살아야 하는 이곳이 존재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쉬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시청을 찾아갔습니다. 도솔산 개발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진영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명품공원".명품공원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헛웃음이 나옵니다. 그들이 말하는 명품의 상태가 궁금해집니다. 나무와 돌을 파내고 시멘트로 아파트를 짓겠지요. 그리고 작은 나무를 가져다 심고,다른 곳에서 돌을 가져다 축대를 쌓을 것입니다. 자연의 놀이터를 파내고 그 자리에 우레탄을 깔고서 미끄럼틀과 시소를 놓겠지요. 그리고 말할 것입니다. "허락된 사람들만 이용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보다 더한 명품이 있을까?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명품공원이라고 꾸며낸 "아파트정원"입니다.

 

  더 이상의 숨의 분여가 가능하지 않은 공원,이른 아침,마스크가 있어야 활동이 가능한 지역을 꿈꾸는 사람들,사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입니다. 나무 한 그루,돌 하나까지도 거래가 가능한 상황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의 숨의 대가가 돈인 사람들. 무기를 팔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한 그래서 평화를 주장하지만 평화를 원하지 않는 악한 인간들이 떠오릅니다.

 

  어용의 가장 유호한 수단은 말입니다. 그들은 말을 통해서 청중의 의식을 타락시킵니다. 그들은 주장합니다. '명품공원,어르신이 산책할 수 있는 공원 등등.." 조작된 말은 계급지배를 미화 혹은 은폐시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명민함에 빠져듭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아니오"할 수 있는 단호함.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84)>

 

다시 안 볼 일? 그럴 일은 없다

 

 

  하루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는 자주 보거나 잘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처음 보거나 매우 짧은 순간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시 집 밖에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집안에만 있다 해도,한두 명쯤은 전화로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간혹 잘 모르는 사람들과 통화를 나누게 되죠.

 

  그런데 희한한 것은 특별히 중요한 만남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나,그냥 한 번 스쳐 지나가는 인연인 줄로만 알고 가볍게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 뜻밖의 만남이 매우 신기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뜨끔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시 마주칠 줄 모르고 혹시 전에 상대방을 함부로 대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찔한 순간을 겪을 때마다 예전에 어른들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곤 합니다.

 

  "우물물에 침 뱉고 간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그 물을 다시 마시러 오게 될 것이다."

 

  상대방을 함부로 대했던 사람이 훗날 바로 그 상대방 앞에서 똑같은 모욕을 겪게 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누군가를 평가하러 간 사람이 얼마 후 그 누군가에 의해 평가받는 경우도 봤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영원한 갑과 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간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것은 오만함의 증거입니다. 짧은 순간이라도 누군가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긴 순간을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작은 만남에서도 그 사람이 누구든 겸손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누군가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람은 언젠가 그 사람 앞에서 거꾸로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내 스스로

길이를 잰다는 것

깊이를 잰다는 것

 

이 길이와 깊이로

얼마만큼

세상을 포용할 수 있을까

돌아보는 아침

 

글.그림 이순구 (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