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4년 주보

연중 제30주일 2014년 10월 26일 (가해)

모든 2 2014. 10. 26. 21:30

「이제 볼 수도 없는 내 아이」홍정수 신부(2014)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 22,34-40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말씀의 향기>

 

하느님의 초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은 모든 일의 근본입니다."-김기범 시몬 장애인사목-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랑의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너무나 간단하고도 명료한 말씀입니다.

 

  저는 장애인사목부에서 3년 동안 보좌신부로 살고 있습니다. 분명히 저의 삶의 자리는 오늘 복음말씀과 너무나 가까이에 있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어려워던 것이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열정 하나만 가지고 시작한 새로운 삶은 끊임없이 부딪치는 한계의 연속이었고, 삶은 계속해서 지쳐 갔습니다. 그렇게 지칠 대로 지치고 나서야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어렵지 않았던 사랑의 부르심에 내가 왜 쉽게 응답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사랑의 요구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요구는 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상황과 일들 앞에 우리 자신을 놓이게 합니다. 늘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관계 안에서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전의 내가 했던, 내가 느낀 사랑의 방식에 저 자신을 가두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늘 새로운 사랑의 요구에 다가가야 했지만,지난날의 사랑에 대한 '추억'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이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체성사"삶 안에 우리 자신을 놓아야 합니다. 사랑의 요구가 나에게 오는 순간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 역시 이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놓고 다가서야 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긴밀히 일치할수록 어떠한 사랑의 부르심에도 항상,즉시, 기쁘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어떤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는 우리를 이웃에게 다가가게하고, 이웃과의 만남은 이웃의 고통과 삶을 함께하면서 우리를 다시 성체 앞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에게 가장 어려웠던 일은 장애인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분들에게도 그 가족들에게도 예수님과 같이 모든 것을 내어 놓는 사랑,'그리스도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이 필요한 이웃 앞에 다양한 방식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이 초대는 늘 새로운 하느님 이웃 사랑의 기회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삶 안에서 보여주는 신비의 내용입니다.

 

 

<청소년,꿈을 꾸다(4)>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이다??

 

  얼마 전 주일학교 교리교사 연수 중 교리교사들과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청소년들은 교회의 미래입니다."

 

  그러자,한 교리교사가 대꾸했습니다. "아니요,청소년은 교회의 현실입니다."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이다."라고 ,하지만 '미래'라는 표현은 그저 멀기만 합니다. '미래'라는 말 속에는 왠지 청소년에 관한 문제는 아직도 관심 밖의 일처럼,저 멀리 잘힐 듯 잡히지 않는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습니다. 또 청소년이 교회의 미래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교회의 미래가 될 청소년들에게 현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청소년을 교회의 미래로 단정지을수는 없습니다. 청소년들은 교회의 현재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교회의 현재가 된 청소년들을 위해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일가요?

 

  먼저 "공동체 전체가 젊은이들을 복음화하고 교육하여야 한다는 인식과 젊은이들이 더 많은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필요성"(「복음의 기쁨」106항)을 느껴야 합니다. 이에 교구에서는 2013년을 '청소년의 해'로 선포하면서부터,특별히 본당공동체 모두가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갖고,그들의 자리를 만들어주어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갖고,그들의 자리를 만들어주어 청소년들이 주도적이고 역동적인 신앙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요청해왔습니다. 청소년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개인적 차원의 노력으로는 부족합니다. 청소년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을 찾고,꿈을 찾고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교리교사들이 알아서 관리하는 청소년들'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나 '본당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할 청소년들'의 시선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본당 구성원 전체가 청소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그들이 교회 안에서 주변인이 되지 않도록 그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청소년들을 그저 어른이 돌봐야 할 대상으로 바라봤다면 이제는 그들 또한 교회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그들이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은 이미 의사결정도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이성적이며,본인들이 교회에 원하는것이 무엇인지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어디에서도 자신이 내는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거나,듣는다 하더라도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청소년들은 이제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교회의 현재 모습임을 인정하고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지 살펴봅시다. 그들은 어떻습니까? 희망차고 밝은 모습입니까? 어딘지 모르게 풀이 죽어 있고, 어둡게 보입니까?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 교회의 현재 모습입니다.

 

  청소년들에게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이 내는 목소리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의 가벼운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희망을 찾고자 교회를 찾은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로 '지금 여기에서'받아들여지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상수 사도요한 .청소년사목국 차장-

 

 

<미사 속 숨은 보화>

 

마침 영광송 Doxologia fanalis 1-기원

 

  감사기도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노래인 "마침 영광송"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아멘."

  영광송이란 공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거나 찬양하는 기도나 노래 양식을 말합니다. 주요 기도를 영광송으로 마감하는 관습은 이미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의 기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예로 시편을 보면,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 부분의 마지막 장은 영광송으로 끝나며 시편의 마지막 장은 전체가 영광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4세기에 이르러 대부분의 기도를 영광송으로 마무리할 정도로 대중화되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들의 기도도 영광송으로 마치는 주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36)> -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갈대가되지 않는 법

알고자 보다 느끼고자

 

  아이들을 모두 등교시키고 집안 정리를 한 후 젊은 엄마 둘이 동네에 새로 생긴 커피 전문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두 사람에게 이 시간은 모처럼만에 휴식과 평온함을 맛보는 달달한 시간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가족들의 건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특히,최근 한창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해독 주스'가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엄마 1 : 어제 TV에서 해독 쥬스 효과 없다던데?

  엄마 2 : 그래? 낵 본 방송에서는 꼭 먹으라던데...

  엄마 1 : 전문가가 나와서 먹지 말라고 했다니까!

  엄마 2 : 내가 본 방송에도 전문가가 나와서 먹으라고 그랬어!

  엄마 1 : 도대체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엄마 2 : 그러게,누구 말을 믿으라는 건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에서 일어난 엄마들,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1 : 집에 가는 길에 해독 주스 재료나 사야겠다!

 엄마 2 : 찜찜하다면서 왜?

 엄마 1 :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 좋겠지 뭐..

 엄마 2 : 하긴.. 나도 같이 가!

 

  예전엔 정보가 너무 답답했는데,요즘은 정보가 너무 많아서 답답합니다.정보가 부족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보가 많아지니 우리는 자꾸만 흔드립니다. 우리 스스로를 믿기보다 남들이 믿는 것을 믿어야 마음이 편해지니까요.

 

  우리가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가 필요할까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오롯이 따라가는 단순함만으로는 부족할까요?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갈대가 되지 않는 비결은 어쩌면 알고자 보다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는 어린 아이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여름

얼기설기 엮어 놓은 마음인데

그 사이

어느 덧 환한

가을 꽃 피웠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기도할 때 내 마음은  - 이해인 -

 

기도할 때 내 마음은 바다로 갑니다.

파도에 씻긴 흰 모래밭의 조개껍질처럼 닳고 닳았어도

늘 새롭기만 한 감사와 찬미의 말을 한꺼번에 쏟아 놓으면

저 수평선 끝에서 빙그레 웃으시는 나의 하느님

 

기도할 때 내 마음은 하늘이 됩니다.

슬픔과 뉘우침의 말들은 비가 되고

기쁨과 사랑의 말들은 흰 눈으로 쌓입니다.

때로는 번개와 우박으로 잠깐 지나가는 두려움

때로는 구름이나 노을로 잠깐 스쳐가는 환희로

조용히 빛나는 내 기도의 하늘

이 하늘 위에 뜨는 해,달,별,믿음,소망,사랑

 

기도할 때 내마음은 숲으로 갑니다.

소나무처럼 푸르게

대나무처럼 곧게 한 그루 정직한 나무로 내가 서는 숲

때로는 붉은 철쭉꽃의 뜨거운 언어를

때로는 하얀 도라지 꽃의 청순한 언어를 피워 내며

한 송이 꽃으로 내가 서는 숲

사계절 내내 절망을 모르는 내 기도의 숲에 서면

초록의 웃음 속에 항상 살아계신 나의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