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4년 주보

위령의 날 2014년 11월 2일(나해)

모든 2 2014. 11. 2. 21:30

「부활의 희망」박양신 신부(2014)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 마태오 복음 11,25-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하늘과 땅의 주님,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두러내 보이시니,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너에게 오너라,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짐은 가볍다."

 

 

<말씀의 향기>

 

죽음을 뛰어넘는 이웃 사랑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8)-정동수 야고보 대천 보좌-

 

  아직 2014년 두 달이나 남았지만,전례력을는 올해도 끝자락을 맞이했다. 전례력으로 마지막 달인 11월은 세상을 떠난 가족,친지들뿐만 아니라,세상을 떠난 모든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이다. 11월 1일부터 8일까지는 정성껏 묘지를 방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함께 기뻐하고,함께 슬퍼했던 가족 그리고 친지들을 기억하려는 뜻에서 우리는 묘지를 방문한다. 묘지를 방문하면서 '오늘은 나,내일은 너"라는 격언처럼,우리 역시 언젠가는 이 세상과 이별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의 삶이 덧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글프다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내 삶에 끝이 있음을,내 삶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 신앙인들은 끝이 있음을,내 삶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 신앙인들은 묘지를 방문하며 하나의 희망을 다시금 간직하게 된다. 그 희망이란 우리가 엮어놓은 우리 삶이 우리 자신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소중히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와 기도 그리고 자선에 힘입어 우리가 기억하는 이들도 또한 하느님으 자비 안에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삶은 서로 관련이 있고, 수많은 관계를 통해 함께 연결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말,행위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은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행동하고 이루는 것들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의 삶 역시 다른 사람들의 삶에 흘러들어가 자비를 간청하는 나쁜 쪽으로든 영향을 주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건,심지어 그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결코 헛된 게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죽음의 경계 너머까지 계속되며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해 왔다. 우리는 이런 전통과 믿음 아래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애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다. 이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을 간직한 우리뿐만이 아니라,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영혼이 구원되시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연옥에서 단련을 받는 영혼들은 스스로 보속을 경감시킬 수 없다.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 사랑을 실천할 기회가 스스로 사라지지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우리는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의 몫을 대신해 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해 주고 ,삶으로 대신 채워 주어야 한단.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단식과 기도,선행 그리고 무엇보다 미사성제를 통해 은총을 청하는 건 아주 특별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아파하는 청소년(1)>

 

효우리

 

효광원에 들어온 아이(효우리)들과 처음 면담하는 날 물어보는 것이 있다. "너는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됐니?" 이 물음에 효우리들은 다양한 대답을 하는데,그중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대답이 있다."친구 잘못 사귀어서 오게 된 것 같다."는 대답이다. 그러면 나는 곧바로 효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그럼 그 친구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니?" 그제서야 자신이 한 대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만 거기서 멈춰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혹 다른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도 있다. "너무 후회가 됩니다. 그때는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라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효우리들..

 

  보호치료시설 효광원은 말 그래도 보호가 필요하고 치료를 위해 아이들이 들어오는 곳이다. 전국 11개의 법원에서 아이들이 들어오는 곳이다. 전국 11개의 법원에서 위탁을 받아 운영되고,법원에서 보내진 아이들은 6개월 정도 머물게 된다. 효광원에 오는 아이들은 비행과 가출로 시작하여 경찰서와 보호관찰소,쉼터 등을 경험해 본 경우가 많다.대개 가정불화로 인해 가출을 하게 된다. 집을 나온 뒤,며칠이 지나면 용돈이 부족하게 되고, 배가 고파서 남의 물건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안전하지 않은 곳에 물건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안전하지 않은 곳에 몸을 뉘이면서 비슷한 친지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동병상련으로 만난 아이들은 서로 의지하며 비행을 저지르게 되고,점점 이것에 익숙해진다. 보통의 경우가 이렇다.

 

  나는 효광원에 들어오기 전,교회에서 중고둥학생들이 신앙생활에 소홀해지는 이유를 생각해 보고, 시험과 과제에 짓눌린 어깨를 보면서 측은한 마음도 들었었다. 효우리들을 만나면서는 그것은 어쩌면 행복한 고민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다수의 효우리들에게는 의지할 사람도,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자신을 찾아주는 사람이라고는 비행에 함께한 또래들뿐이었다.

 

  그래도 나올 집이 있다면 다행이다. 집이 아닌 시설에서 지낸 기억이 전부인 효우리들을 가끔 보게 된다. 아빠,엄마라는 말을 한번도 해 보지 못한 아이에게 부모님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다른 아이들고 다르다. 그래서 상담 중에도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며,'부모님'이라는 표현보다 '집'에 대해 물어보는 편이다. 효우리들에게 '집'은 효광원에 들어오기 전에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엄마,아바가 언제 면회를 올 거라고 말하는 효우리들에게는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예전에 경험이 없었을 때, 나는 무심코 어느 효우리와 면담 도중에 부모님에게 연락을 드렸냐는 질문을 하였다. 효우리는 이내 시무룩해졌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 사람들 어디 있는지 몰라요"라며 말을 흐렸다. 답을 들은 후에도 나는 어리석게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냐"'라는 강요된 물음을 했던 것 같다. 아이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왜 보고 싶어해야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고 말하는 아이들 보고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알고 보니 그 효우리는 다섯살 무렵 부모님과 함께 병원에 갔는데,병원에서 부모님이 사라졌고 그 후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효우리는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책임한 부모는 '그 사람들'로 바뀌었다.

 

 나 역시 청소년의 문제를 청소년들에게만 국한 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기구한 사연의 시작은 어른들에게 있었고,우리 주변에 있었다. 우선적으로 아이들의 일탈해동에 대한 일방적인 판단보다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상처받고 소외된 아이들에게 '부모님'이 되어줄 수는 없지만,기댈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울타리,'집'을 만들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복지정책에서도 소외된 아동복지부터 말이다.

-변창수 시메온.사회사목국 효광원 담당-

 

 

<이충무의 행복나침반(37)> 

 

 

돌부리 감별법

 

마음의 표정이 관계의 표준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던 중 한 사람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다른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보자마자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얼마나 아플까? 내 마음도 아파진다!'

 

  이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마음이 절대로 전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넘어진 사람을 보고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면 어떨까요?

 

  '저런,저런.. 저럴 줄 알았어. 쌤통이다!'

 

  이런 관계의 사람이라면 "원수 같은 사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내겐 기쁨이라니,이런 적대적 관계가 또 있을까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관계의 사람들을 발견하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이런 경우는 또 어떨까요? 넘어진 사람을 코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전혀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경우 말입니다.

 

  ' 저 사람 지금 뭐하는 거야? 왜 저래?'

 

  이 관계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사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마틴 부머의 말대로 "나와 너"가 아닌 "나와 그것"이 되어 버린 관계만큼 슬픈 관계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함께 가는 사람들이 오늘도 수없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가슴은 어떤 표정일까요? 삭막한 도시 속을 걷는 무표정한 사람들.. 그 무표정이 그들의 마음이 아니라 오직 얼굴에만 머무는 그림자이기를 기도해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내 몸과 같이 아프고

내 영혼이 같이

고통스러운

그 날들의 죄를

 

하늘과 같이

용서하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중용의 도(中庸의 道)  - 에픽테투스 "삶의 기술"  中 -

 

행복과 불행이 우리들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잊고 있다.

그들은 겉모습에 이끌려 바깥에서 그것을 찾는다. 행복과 불행의 근원을 자기 안에서 찾는 자는 드물다.

 

 반면에 지혜를 가진 사람은 모든 좋고 나쁜 것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불행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비난의 말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그는 안다. 또한 자신이 특별하고 쓸모 있는 존재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남들이 자신에 대해 갖는 생각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그는 안다.

 

 힘들고 불행한 일이 찾아올 때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바깥의 일들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수 없음을 그는 안다.

남이 자기를 비난하면 그는 조용히 미소지을 뿐 동요하지 않는다.

이유 없이 욕을 먹어도 굳이 자신을 방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는 늘 깨어 있다. 마음속에 욕망을 자연스런 생활과 조화시키고,

의지를 단련시키는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일에서 중용의 도를 추구한다.

사람들이 그를 무지한 사람이나 세련되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도 그는 그런 것에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을 지켜보고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