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성모성지」이재훈 신부(2013)
"온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끝없이 살게 하소서."
+ 마태오 복음. 25,31-46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때에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말씀의 향기>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루카 11,23)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오창호 사도요한 천안신방동 보좌-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복음 말씀은 마태 25,31~46절이다. 이 복음 말씀은 임금이요,심판관으로 오실 그분 앞에 우리가 섰을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실 질문과 답을 일러주고 있다. 임금이요,심판관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는가?또 내가..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는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써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어떤 답을 써 내려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나자렛 회당에서의 희년 선포 내용과 많이 닮아 있다.(참조,루카 4,18~19)교회의 존재 이유와 최종 열매는 바로 복음 선포,즉 '선교'다. 근래에 들어 '선교'라는 말과 함께 '복음화'라는 말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선교'는 결국 모든 것을 복음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활동이다. 복음화의 대상과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어야 하고,그렇게 하도록 불림을 받았다. 우리가 하는 복음화 활동을 통해 죄로 인해 분열된 모든 것들이 임금이요, 머리이신 그분과 하나가 될 것이다.(에페1,10)
복음화는 획일적으로 어떤 가치관이나 사상,그리고 체계를 주입시키는 활동이 아니다. 복음은 시대와 상황,그리고 대상에 맞게 전해져야 한다. 그렇기에 복음선포 활동은 늘 새로움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것을 네 개의 복음서가 각자의 '삶의 자리'(Sitze im Leben)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 안에 어떤 상태를 유지하려는 힘이 변화하려는 힘보다 강하다면,그리고 자신을 발전시키려는 힘이 가난한 이들을 향한 힘보다 강하다면,우리는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나'를 어떤 가치관이나 사상으로 포장해 '나'를 접하고 '나'를 건설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 임금으로 군림하시도록 기도를 해야겠다. 그분께서 임금이 되실 때 우리는 어떤 가치관이나 사상으로 포장된 '나'가 아닌 복음을 전하며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가. 나아가 우리 사회가 대립이나 반목이 아닌 일치와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 편에 서지 않은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아파하는 청소년(4)>
사랑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
한 때는 효우리들에게 인가가 많은 줄 알았다. 생활관이나 교육관에 오갈 때, 효우리들이 나에게 다가와 언제 면담해줄 수 있느냐고,한 번 불러달라고 로비(?)를 한다. 뿌듯한 마음으로 상담실에 앉아 나를 찾았던 아이들을 부른다. 그렇게 들어온 아이들은 진지하게 상담에 임하며 고민거리를 늘어놓는다. 꼭 필요했던 면담처럼 말이다. 나도 효우리들 이야기에 공감하려 노력했었는데,어는 때부터인가 다은 이유들로도 나에게 온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따뜻한 날 오후에,한 효우리가 나를 찾아왔길래,히든 일이라도 있나하고 관심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효우리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아뇨,그냥 수업 듣기 싫어서요.'라고 말하더니,내 앞에서 잠잘 태세를 하는것이었다. 이내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것을 로만카라에서 눌렀다. 이 뿐만 아니라,가지각색으로 면담을 이용하려는 고객들이 생겼다. 나는 오죽하면 그럴까하는 심정으로 받아주었고, 아이들 상대를 봐가며 내가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골 손님들이 늘어났다. 몇몇 효우리들은 트만 나면 상담실 문을 두드렸고,상담과는 거리가 멀게 그 시간을 활용하였고 아이들의 욕구충족을 위해 가끔 규칙을 어기기도 하였는데,어떤 때는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 것에 지쳐가고 있었나보다 어느 날 그럴듯한 이유로 면담시간을 획득한 효우리가 나의 상담실 문을 열었다. 단골이었다. 나는 요놈이 무엇을 하려고 왔나하는 얄미운 마음부터 들었다. 효우리의 얼국도 쳐다보지 않고, 무심한 척 자리에 앉으라 하고 내 볼 일을 보았다. 잠시 후 사단이 났다.효우리는 "신부님한테도 실망했어요.쳐다보시지도 않고, 무슨 일이냐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신부님도 똑같아요. 휴..."아차 싶었다. 바로 몸을 돌려 효우리를 보며,부끄러운 변명을 늘어 놓았다. 심지어 하지 말았어야 할 양치기 소년에 대한 언급도 했던 것 같다. 나는 겨우 아이를 달래어 보내고 나서 반성에,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효우리들을 위해 상담한다고 했던 것들이 정작 내 위주의 만남이지는 않았을까.여지 없는 내 잘목이었다.눈빛 한 번,말 한마디만 있었어도 하는 후회만 남았다.
나는 면담하는 시간을 마무리하며 아이들에게 묻는 것이 있다. 장래희망,꿈에 대한 것을 떠올리게끔 한다. 나의 어린 시절 당연했던 과정들이 여기서는 논외의 일이었다.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효우리들이 심심치 않게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말 한 마디에,행동 하나에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기도 한다. 몇 년 동안 집 밖에서 지내던 아이가 쉼터에서 우연히 바리스타 실습을 받게 되었는데,선생님의 칭찬 한 마디에 바리스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친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래희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면식도 없는 그 선생님이 고마웠다. 효강원에서 일정 기간을 지내고 퇴소하는 친구들이 미사 공지사항 시간에 인사를 하는데,''아무게 선생님,잘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무개 선생님,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내가 고맙고 감사했다. 그저 밖에 나가서도 주변에 어깨 한번 두드려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한마디 말로 사람을 쓰러지게 하거나 일으키기도,꿈을 꾸게도 한다.
물론 그것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립 할 수 있고,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어른'이 될 때까지 '어른'둘의 지속적인 관심과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이충무의 행복나침반(40)>
세상에 이런 미사가!!!
예수님을 미소짓게 하는 고수들
오늘은 바쁜 일이 있어 평소에 가던 미사시간이 아닌 어린이 미사시간에 참석했다. 그런데 나는 참 신기한 경험을 했다. 어른들의 미사 때에는 결코 볼 수 없는 놀라운 광경들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미사도 있나 싶어 몇가지 특이사항을 적어 본다.
첫째,아이들은 모두 서로 앞자리에 앉으려 부산하다. 시기하게도 뒤자리나 구석진 자리에 앉는 친구가 없다. 설령 그런 자리에 앉은 친구가 있으면 서로 자기 옆으로 오라고 손짓하느라 바쁘다.
둘째,서로 띄엄띄엄 앉지 않는다. 모두가 친구인 듯 밀착해서 앉아 있다. 누군가 자리를 찾고 있으면 그 좁은 틈에 그 친구를 기어코 앉히고 만다. 서로 싸운 사람들처럼 썰렁하게 듬성듬성 떨어져 앉지 않는다.
셋째,성가를 엄청나게 큰 소리로 부르다. 노래를 썩 잘하는 것 같지는 않으나,소리만큼은 자신만만 기쁨충만이다. 서로 크게 부르는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 성당 안이 흥겨움으로 가득하다.
넷째, 신부님이나 수녀님과 무척 친하다. 신부님을 덥석 안기도 하고, 심지어는 수녀님의 머리쓰개를 잡아 당겨 보기도 한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신부님이나 수녀님은 혼내기보다 환한 미소를 보내신다는 것이다.
나는 미사가 이렇게 즐거운 것인지 미처 몰랐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오려는데 오늘은 왠지 십자가 위의 예수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듯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나이가 들어 서러운 것은 주름진 피부가 아니라 주름진 마음이라는 걸 실감한다.
앞으로 미사에 가면 제일 앞자리에 앉아 큰소리로 성가를 한번 불러 보련다. 물론 예수님 빼고 다들 그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겠지만 무슨 상관이랴? 무거운 침묵 속에서 분심으로 가득찬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 다음 주일 미사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기다려진다.
주님!
늦게 깨어난
이 땅의 삶을
보듬어주시어
아프지 않게 하소서.
아프지 않게 하소서.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감사와 행복 - 이해인 수녀 -
내 하루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
한 해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
그리고 내 한 생애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되도록
감사를 하나의 숨결 같은 노래로 부르고 싶다.
감사하면 아름다우리라.
감사하면 행복하리라.
감사하면 따뜻하리라.
감사하면 웃게 되리라.
감사가 힘들 적에도
주문을 외우듯이 시를 읊듯이
항상 이렇게 노래해 봅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살아서 하늘과 바다와
산을 바라볼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하늘의 높음과 바다의 넓음과
산의 깊음을 통해
오래오래 사랑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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