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4년 주보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2014.12월 7일(나해)

모든 2 2014. 12. 7. 21:00

정의와 평화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지만 이 선물은 그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매년 2차례 사회교리 학교를 운영하고,

매월 2차례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와 강연을 진행합니다.

또한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는 삶을 꿈꾸며 복음이 실현되는 사회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마르코 복음. 1,1-8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말씀의 향기>

 

사회 교리 주간을 보내며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 베드 3,14)

-박상병 루도비꼬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장-

 

  2011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추계회의는 대림 제2주간을 '사회교리 주간'으로 보낼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삶의 다양한 현장에서 발생되는 '새로운 사태'들을 복음적 시각으로 성찰하고, 이에 적합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실천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신자들에게 '사회교리'교육을 통해 신앙의 균형을 맞추도록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사회교리 주간이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사회교리에 대한 인식과 교육 그리고 반응은 아직 미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권고인 '복음의 기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182항) 그리고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 기준'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무엇보다도 긍정적으로 적극적인 제안을 하며 개혁적인 활동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183항)

 

  이러한 교회의 활동을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청 정의평화 평의회가 발간한 '간추린 사회교리'를 공부하고 활용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십니다. 지난여름 방한하셔서  한국 주교님들과의 대화에서도 한국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놓치지 말 것을 부탁하시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는 교회의 풍요한 유산인 사회 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회교리는 우리가 믿고 기념하고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그리스도교 윤리를 토대로 제시하는 교회의 교리입니다.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매년 '사회교리 학교''를 개최하여 사회교리를 배우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의 일정을 포스터로 보내 드립니다. 일정을 참고하시어 많은 분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희망합니다.

 

 

<사회 교리 주간을 보내며>

 

사회교리와 나

 

  신자가 아니셨던 아버지의 엄한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입학한 터라, 최선의 노력을 다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스스로의 성화와 완덕을 위해 계명과 규칙을 철저히 지켰고 기도 시간 빼앗기는 것을 가장 아까워했습니다. 어차피 멸망하고 말 세상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 동료 신학생들을 마음으로 판단하는 것이 가장 빈번한 고해성사 거리였습니다. 성경에 저와 비슷한 인물들을 나중에야 발견했습니다. 바리사이였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여러 신학 수업들을 통하여 제가 '종말적 영성'만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의 장소로 보고, 구원을 천상적이고 종말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세상사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죄로 얼룩진 세상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라는 말씀에서 아집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세상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미워해 왔는가?'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태어나신 세상, 그분의 부활로 새로워진 세상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협력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라는 '육화적 영성'의 차원에 눈뜨게 되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두 영성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유 축성 미사 때의 복음 말씀이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 이것이 예수님의 첫 선포이자 평생의 선포였음을, 제가 뒤따라 걸어야 할 길임을, 세상에는 여전히 가난한 이들, 잡혀 간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이 있음을 주님께서 일깨워 주셨습니다.

 

  '사회교리'는 예수님께서 목숨 바쳐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주님께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인간의 소명은,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에 투신하기 위해 창조주께 받은 힘과 수단을 유용하게 활용해야 하는 의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가톨릭 교회 교리서 2820항)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참된 정의'와 '정의의 결과인 평화'를 선포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정치권과 대형 언론들은 종교의 영역이 개인들의 영혼 구원에만 국한되어 있다고 반복하여 주장합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178항) 

 

 방한하신 교황님께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환호했지만, 정작 교황님께서 전하신 메시지는 급속도로 잊혀가는 듯합니다. '물질주의의 유혹'과 '끝없는 경쟁의 영'과 맞서 싸우려고 하시며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과 '죽음의 문화'를 거부하라고 하신 교황님의 말씀을 "사회교리를 공부하고 활용할 것을 강력히 권고"(복음의 기쁨 184항)하신 바에 힘입어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김유정 유스티노. 대전가톨릭대학교 영성 관장-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41)>

 

  마르셀리노의 기적

 

기도는 즐거운 대화입니다.

  

  오랜만에 책들을 정리할까 하는 생각에 책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정말 반가운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읽고 또 읽곤 했던 손때 묻은 아주 오래된 동화책 "마르셀리노의 기적"...

 

  마르쎌: 예수님, 배 많이 고프시죠?

  예수님: 그러게..

  마르셀: 잠깐만요. 제가 먹을 걸 갖다 드릴게요.

  예수님: 고맙구나.

  마르쎌: 손발에서 피가 나는데 아프시진 않으세요?

  예수님: 넌 내가 무섭지 않니?

  마르쎌: 아뇨, 전혀요. 상처에 좋은 약이 있어요.

  예수님: 착한 아이로구나.

  마르쎌: 십자가 못도 뽑아 드릴까요?

 

   수도원 앞에 모포 자락에 싸여 버려진 아기에게 수사님들은 '마르셀리노'라는 세례명을 지어 주며 함께 생활해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꼬마 마르셀리노는 다락방에 있는 십자가를 발견하고, 그 위에 못 박혀 괴로워하고 계신 예수님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마르셀리노의 모습이 인상 깊었던 것은 예수님을 대하는 그의 순수한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마음에 느껴지는 그대로 예수님과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마르셀리노의 모습은 참으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 가면서 차츰 예수님과 대화한다기보다 예수님께 부탁을 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기도의 무게는 자꾸만 무거워지고, 예수님의 아픔보다 내 아픔이 더 커 보이게 됩니다.

 

 뜻깊은 대림 시기... 무엇보다 예수님과 끝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마르셀리노'가 되어야겠다는 다짐부터 해 봅니다. 기도는 무거운 독백이 아니라, 즐거운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보이지 않으나 움직이며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나

드러내시는

 

우리의 빛이 되시어

오시는 주여!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사회교리 주간을 보내며> 김정수 베네딕도.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사회교리와 나의 삶

 

  산골의 겨울은 유난히 눈도 많이 내리고 춥습니다. 제가 사는 시골 동네는 많이 좁아서 두 대의 차가 마주 지나기 어렵습니다. 마주 들어오는 차가 멀리서 보이면 차 피하는 장소에서 나가는 차는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그날도 바쁜 일과 때문에 눈 쌓인 길을 바쁘게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입구에서 들어오던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도랑에 한쪽 바퀴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동네 입구는 조금 넓은지라 한쪽으로 비켜서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도 아닌 낯 모르는 그 차량의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안절부절 못하며 전화기를 붙들고 어딘가에 도움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자동차보험사에 긴급구조요청을 하는 것이겠지요. 저도 그런 경우를 몇 번 접했던 터라 한나절을 걸려야 견인차가 올 수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앞을 보니 저보다 먼저 이 길을 비켜간 차량 바퀴 자국이 몇 개 눈길에 찍혀 있었습니다. 마침내 저의 화물차에 실려 있는 통나무 몇 개를 도랑에 빠진 바퀴의 앞뒤에 넣고 지렛대를 이용해서 차를 조금씩 들어 올리고 바퀴 밑으로 통나무를 밀어 넣는 방법으로 바퀴를 계속 높여서 결국은 자력으로 차가 나올 수 있도록 뒤에서 밀면서 차를 꺼냈습니다. 시간은 벌써 저의 예정된 일과 시간을 훌쩍 넘겼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저는 저의 차를 타고 길을 재촉하여 일과를 뒤늦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동료는 왜 이렇게 늦었냐고 면박을 주었습니다만, 그냥 눈길에서 착한 사마리안 사람이 되었다고 하니, 동료는 이해한다는 듯 웃고 말았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를 듣고 묵상하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는 길이 그리스도를 살아가는 것'이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리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를 통하여 사회교리 학교를 수료하면서 봉사와 희생의 삶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강정마을의 주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밀양 송전탑이 건설되는 마을의 주민들을 만나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이후 집으로 돌아가서 그의 아내 혹은 가족들에게 들었을 하소연이나 투정과 비판을 어떻게 감내하였을까?'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한 달 혹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장사 봇짐을 운반하여 벌은 돈을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위해 다 써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착한 사람이었지 가족들에게는 원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의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아니었을까요?

 

  이 지면을 빌어 길 잃은 한 마리의 양,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버려두거나 비켜가지 않도록 사회교리를 통하여 저를 일깨워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 세례자 요한께 - 이해인 수녀 -

 

진리와 정의

자유와 평화가 승리하지 못해

오늘도 많은 이들이 울고 있는

이 시대의 어둠이 깊어 갈수록

더 가까이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쉰 소리

 

'회개하라'

'주의 길을 닦으라'

거듭 외치는 그 목소리에

우리는 저마다 귀를 세우고

겨울바람이 신음하는

황량한 들판을 바라봅니다.

 

온 세상을 길이신 예수로 가득 채우고자

길을 고르게 하라고 외치는

당신의 음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두려움에 보채는 마음들을 보십시오

길을 닦고 고르지 못한 부끄러움에

자꾸만 움츠러드는 마음을

희망으로 일으켜 주십시오

시대의 어둠만 탓하고

자신의 어둠은 탓하지 않는 우리의 우매함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믿고 회심하지 않으면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지 않으면

결코 구세주 예수를 만날 수 없음을

모든 이에게 깨우쳐 주시려고

광야의 목소리가 되신 요한이여

갈길을 보여 주신 당신께 감사하며

우리를 깨워 흔드는 그 목소리를

항상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온 세상을 빛이신 예수로 가득 채우고자

죄의 어둠을 몰아내라 외치며

당신은 '빛의 그림자'로

물러서길 원했던 세례자 요한이여

 

주님과 이웃을 높이며

자신을 낮추는 가운데

하늘나라를 향한 우리네 삶의 길도

더욱 고르어지게 하십시오

 

교만과 불신

이기심과 허영심의 언덕이

겸허한 사랑의 불길로

무너져 내리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어느 날

우리도 당신처럼

주님 만난 기쁨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희망의 예언자이게 하십시오

이웃을 주님께 데려가는

사랑의 안내자이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