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삼위일체 대축일 2017년 6월 11일 (가해)

모든 2 2017. 6. 11. 22:30

 

공주 중동성당(공주지구)

본당 설립: 1897.5.8/주보성인:성모 성탄

 

+ 요한 복음 3,11-13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의 향기>

 

그림 하나가 주는 메시지 -장인국 세례자요한 대전가톨릭 평화방송 사장-

 

 

 

   이 그림은 러시아 정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성화로 15세기에 러시아의 수도사인 안드레이 루블레프가 그린 <삼위일체>입니다.

이 성화는 예술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작품입니다.

 

  성화의 왼쪽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인데, 창세기 18장의 손님 셋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온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성화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면, 세 인물이 입은 옷이나 자세가 각자 특징이 있지만, 그 얼굴은 서로 닮아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본체로서는 한분'이시나, '위격으로는 세분'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를 표현하는 화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왼쪽 성부 하느님의 모습 뒤에는 건물이 있는데 이는 성부 하느님의 창조주 역할을 의미하고, 가운데 성자 하느님의 모습 뒤에는 나무가 있는데 이는 생명과 십자나무를 상징합니다. 오른쪽에는 성령이신 하느님 뒤에 산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가야 할 완덕의 길을 상징합니다. 수도사이자 화가인 루블레프는 깊은 묵상과 기도 속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 하나로 표현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삼위일체'신비를 설명하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완벽한 게 아니라 다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려는 방편들에 불과합니다. "완전히 이해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는 말처럼,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위대한 신비를 머리로 이해하고 헤아릴 수 없지만, 그 신비를 실천할 수는 있습니다. 그 신비를 실천하고 닮는 길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사랑 때문에 몸소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사랑 때문에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어 우리를 지켜 주시고 당신께 이끌어 주십니다.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다른 말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사랑하면서 산다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작은 기도 하나 바쳐볼까요? 영광송은 우리들이 고백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삼위일체 기도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via의 시선(걸어가기)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신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살아계신 분, 그래서 살아있지 않은 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른 아침 의식을 차리고 눈을 뜨면 숨을 쉬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숨을 쉬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는 나를 느낍니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보고 일어나 앉습니다. 주어진 시간, 서두르지 않습니다. 천천히 움직여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하느님과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채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빈 통에 물을 채웁니다. 급한 마음에 수도꼭지를 최고로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는 짓이 죄송스러웠습니다. 채워지는 물보다 튀어 나가는 물이 더 많습니다. 알맞은 속도를 찾습니다. 물이 채워집니다. 천천히 수도꼭지를 최고로 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물이 튀어 나가지 않고 빠른 속도로 채워집니다. 삶은 빨리빨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알맞은 속도로 살아야 합니다.

 

시작은 천천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백 미터 달리기가 필요할 때는 힘껏 달리면 됩니다. 그러나 매 순간 백 미터 달리기를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하고 나면,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주저앉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숨을 느끼고 나와 함께 숨을 쉬는 그(그녀)그리고 나의 숨이 품어 내고 지켜야 하는 가치를 기억해야 합니다.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가치는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치는 언제나 과정입니다. 삶의 여정 속에서 설정한 목표도 가치의 추구 과정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가치는 깨어있음에 대한 확인이고, 움직임과 멈춤의 조화를 위한 자원이 됩니다.

 

알맞은 속도로 살아야 합니다. 창조의 6일과 하루의 멈춤의 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멈춤의 시간 속에서 하느님의 감탄이 선포됩니다. "보시니 좋았다!"

멈춤이 없는 상태는 죽음을 잉태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멈춤"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멈춤으로써 연대기적 시간 속에서 종말론적 시간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역사의 여정 속에서 선조들과 동반하신 하느님을 "지금 여기"에서 만납니다. 그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64)>

 

성당에 가는 세 가지 이유

 

  제가 매주 빠짐없이 꼬박꼬박 성당에 나가는 이유는 세 가지 기쁨 때문입니다.


  1. 자유의 기쁨
  정해진 시간에 매주 성당에 가면 저의 몸은 그 시간에 구속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하는 미사 시간 동안 저의 영혼은 완벽한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끝없는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홀가분함이 저를 찾아옵니다. 가지고 있는 것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고 꼭 쥐었던 손이 기도를 위해 펴지는 순간, 무거웠던 마음이 깃털보다 가벼워지는 신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2. 역설의 기쁨
  일상의 공간은 매우 단순한 논리가 지배합니다. 높은 자리는 높은 곳에 있고, 낮은 자리는 낮은 곳에 있습니다. 이기는 사람이 승자이고 지는 사람은 패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성당 안에서는 모든 것이 자리를 바꾸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낮은 것이 오르고,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며, 상처를 주는 사람일수록 더 사랑하게 됩니다. 이 신비한 체험은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제게 선물합니다.


  3. 연결의 기쁨
  성당에 들어서면 신기하게도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기도할 때 자기 자신의 얼굴만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나 자신보다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 혹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이웃들을 자꾸만 생각나게 하는 곳인 성당.. 그곳에서는 제가 섬이 아니라 숲 속에 뿌리를 내리며 성장해 가는 한 그루 나무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토록 기쁜데 어찌 매주 성당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도 그곳을 향해 출발합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하나 둘 셋이

모두가 하나

 

온누리 밝히시어

환하게 채우소서.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