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부활 제 6주일 2017년 5월 21일 (가해)

모든 2 2017. 5. 21. 22:30

반석동 성당(대전 북구지구)

본당 설립:2006.1.10/주보성인:성 베드로

 

+ 요한 복음 14,15-21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말씀의 향기>

 

주님 안에서의 침묵 -최견우 사도 요한 부여성요셉병원장

 

 

  오늘 복음은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암시로 그분이 우리 곁에 계심을 알려주십니다.

 

  사람은 세상의 삶을 정리할 때가 되면 진심 어린 말을 전하게 됩니다. 수난 전날, 주님께서는 당신이 비록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지라도 제자들은 결코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과 함께하지만, 우리 눈에는 직접적으로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동행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하느님의 손에 의지하여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쉬울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있기에 험난한 길에서도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눈을 뜨고 있다고 해서 세상을 올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진리란 '인간이 어떠한 가치로 살아야 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하면 더 편하고 쉽게 살 수 있을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치 판단은 물신주의를 만들고 함께 살아가는 삶이 아닌 무한경쟁만을 부추깁니다. 한적하게 길을 걷거나 멍하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조차 없는 삶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치는 말로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드냐?'라는 넋두리를 우리는 무의식 중에 던지게 됩니다.

 

  험난한 인생의 길 속에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도 '이 말이 과연 맞는 이야기일까?'머리는 재빠르게 회전을 하며, 일단 의심부터 갖는 중병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도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나는 이렇게 말해야겠다.'라고 머릿속 복잡하게 다음 말을 준비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리 없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말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너무나 생각이 많은 것은 아닐까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저에게는 남의 말을 끊는 나쁜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 말이 맞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게 됩니다. 내 생각이 맞고 내 말을 들어야 된다는 큰 병을 안고 사는 중환자입니다.

 

  뒤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들이 참 많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어떤 것에 즉시 반응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진실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가 판을 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 되고, 사랑을 한다면 주님 안에서 침묵 중에 조용히 머물러야 됩니다.

 

  요즘은 주님 안에서 침묵의 시간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간다고 하면서 주님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를 침묵 중에 느끼신 적이 있으신가요?

 

 

via의 시선(문을 열자)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일은 두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잠시 읽기를 멈춥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생각에 잠깁니다.

 

  '사람이 평화롭게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사람이 괴로운 삶을 견뎌내는 것은 더 나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일은 고난 속에서도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 그러나 교회는 가르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현존한다고.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는 완성되지 않았지만, 선취하며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느님 나라는 피조물의 창조성에 무한히 응답하는 나라이며 동시에 피조물의 한계성에 반응하며 축소되기도 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의 선택에 의해서 미리 살아지는 것이지만 한없이 유보되는 체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장을 통해서 인지되고 경험하는 나라입니다. 성숙한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는 사랑과 평화를 실현하는 열려있는 문이 되지만, 미성숙한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No Topia입니다.

 

평화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결코 우호적이지 않는 존재의 원 안에서 경험해야 하는 고통과 아픔, 그러나 그 속에서 평화를 사는 사람들은 나무를 태울 때 피어나는 불꽃처럼 지금 여기에서 현존합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사랑의 심지로 불을 댕겨 자신을 비춥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택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선택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듭니다. 내 안에서 숨 쉬는 하느님의 숨을 의식하며, 나의 숨을 하느님의 숨으로 변형시킵니다. 하느님의 숨으로 사는 나, 그래서 사랑할 수 있고, 평화를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창조의 원 안에 있습니다. 창조의 바닥 위에 발을 굳게 디디고,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하느님 집의 문을 엽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서 우리 모두 그분을 따르게 되기를. 아멘(엑카르트 강론 중)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61)>

 

먼지마저 더럽힌다는 것

 

  아마도 먼지는 인간이 이 세상에 있기 한참 전부터 있어 왔던,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물질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고 하지만, 자연은 털지 않아도 늘 먼지와 함께 해 왔습니다.

 

  먼지는 바람을 제일 먼저 느끼고 공기 중에 나부끼며 세상 어디라도 날아갑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먼지를 만들어 냅니다. 한 번 생긴 먼지는 눈처럼 쉽게 녹지도 않고 어딘가에 하나둘 쌓여갑니다.


  요즘 미세먼지 때문에 우울한 기분까지 듭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던 5월은 그 명칭이 무색해질 만큼 잿빛 하늘을 여러 날 보여 주고 있습니다. 초록의 나뭇잎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향기는 마스크로 가려진 제 코까지 닿지 못하고 덧없이 허공에 사라져 갑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먼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먼지가 뉴스에 일상처럼 오르내리는 경우가 예전에 없었습니다. 먼지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창문도 열지 못하고 외출을 고민하는 경우는 어제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일 뿐입니다.


  어린 시절 하루 종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녔을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새로 입은 옷을 입고 나가 먼지를 잔뜩 묻혀 온 것은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엄마에게 야단맞을 개인적 문제였을 뿐이었으니까요.


  먼지를 위험하게 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니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빠르고 더 편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한 알의 티끌마저 더럽힌 것 같아 마음이 더 먹먹해집니다.


  몇 그루의 나무가 잘려 나가든 말든, 흐르는 시냇물에 몇 방울의 불순물이 섞이든 말든 당장 오늘 내 눈앞의 혜택에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먼지보다 더 위험해 보입니다.


  그냥 한 두 번 툴툴 털어 내면 사라지는 먼지와 더불어 사는 세상이 그립습니다. 오늘의 이 위험한 미세먼지는 밖에서 날아온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길을 가다

풀섶이나

오래된 담장 위를 지나는 이 있으면

살짝 귀 기울여

말을 걸어볼 일이다.


그의 쓸쓸하거나

아름다운, 슬프거나 기쁜

여정을

담담히 들어볼 일이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