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부활 제3주일 (이민의 날)2017년 4월 30일(가해)

모든 2 2017. 4. 30. 22:39

버드내성당(대전 중부지구)

본당 설립:2003.1.14/주보성인:예수 성심

 

+ 루카 복음 24,13-35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이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령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말씀의 향기>

 

손을 대니 봄이 온다 - 손은석 마르코 천안 이주사목 전담

 

 

'착수생춘(着手生春)', 중국 고문에 나오는 말로 '손을 대니 봄이 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보통 명의의 뛰어난 의술에 빗대어 많이 뛰어난 의술에 빗대어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인간에게 부활의 봄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에게 가장 아울려 보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온전히 독립적인 개인의 의해서만 봄을 얻게 되지 않고, 자기 밖의 타자의 손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이민의 날입니다. 이 구절을 이민자들과 우리 사회 공동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한 인간이 스스로 정체성과 자신의 개성을 형성하는 것 역시 혼자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공동체, 즉 가족, 회사, 국가, 교회 등으로부터 분리된 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회철학자 테일러는 한 사람의 정체성과 특성도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때 성립된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의 이주민들 역시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서로 다른 '차이'가 '차별'이 되고 억압과 폭력이 되어 그들에게 봄은 오지 않습니다. 제국주의 유럽 사회는 백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인간 동물원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지만, 모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보았듯 미국은 1906년 브롱스 원숭이 동물원에 흑인 청년을 가두어 두고 전시했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19-20세기 유럽 사회도 인간 동물원이 퍼져 있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 사회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얼마나 추악한 죄악으로 추락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가 됩니다."나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주민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생각과 말 자체가 인간 동물원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이런 추악한 행동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도 있습니다. 2011년 미국 공영방송 pbc에 지능형 로봇 안드로이드 딕이 소개되었습니다. "로롯이 인간을 지배하는 날이 올까?" 개발자가 질문합니다. 딕은 "넌 내 친구이고 난 친구를 기억해. 내가 터미네이터로 변한다 해도 너에게 잘해 줄 거야. 인간 동물원에서 안전하게 잘 보호해 줄 게!" 인간을 모델로 만들어지고 인간에게 학습된 로봇의 참담한 대답입니다.

 

  개인과 사회를 연결해 주는 매개가 '인정'이라면 이것은 봄을 주기 위해 손을 얹어 주는 행위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인정', 이것은 봄이 오도록 하는 명의의 손이 아닐까요? 예수님이야말로 봄을 가져다주시는 최고의 치유자이십니다. 그분은 빵을 떼어 함께 나누어 주시면서 부활의 모습을 알리셨습니다. 이민자들을 남이 아니라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는 형제로 '인정'해 줄 때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사명이 실천되는 것입니다. 어느 본당이든 이주민들을 남으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지만 동등한 가치의 형제로 인정해 준다면 봄은 찾아올 것입니다.

 

 

via의 시선(멈춰 바라보기)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머리로 생각합니다 가슴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행동합니다. 생각과 느낌 그리고 행동의 일치를 희망하면서 오늘을 보냅니다. 그런데 어렵습니다.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감정과 행위,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 생각과 행위, 행위하지 않는 생각과 감정을 매일 경험합니다. 생각과 느낌,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생존에 대한 욕구때문입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관계란 다름을 전제합니다. 다름이 있어서 관계를 맺습니다. 다름이 없는 상태의 관계는 속박이거나 지배와 종속의 상태입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 관계는 성장을 위한 자원이 됩니다.

 

   자녀를 바라봅시다. "자녀가 당신과 같습니까?"아니 "당신과 같아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자녀를 지배와 종속의 상태로 만들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는 당신과 달라야 합니다. 유전적으로도 자녀는 당신과 똑같지 않습니다. 일부 닮기는 했어도, 당신의 일부를 지니기는 했어도 자녀는 당신과 다릅니다. 다름이 있어서 자녀는 당신을 성장하게 만드는 소중한 협조자가 됩니다. 만일 당신이 자녀에게 섣부른 평가와 판단을 한다면, 당신은 성장해야 하는 당신 자신을 부인하게 될 것이며 결국 자녀의 성장까지도 방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름을 경험하면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다름이 옳지 않음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이 지어내는 거짓 생존기제의 발현입니다. 마음은 일종의 생존기제입니다. 마음이 생존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은 감정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의 바탕에 깔려 있는 감정을 잊거나 무시하고 느끼지 못하면 자신의 하는 행동의 이유를 자각하지 못하고 갖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지어냅니다.

 

  잠시 멈춰서 보십시오. 그리고 느껴보십시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살피십시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을 살펴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에 맞춰서 행동하게 됩니다.

 

  부활시기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는 촛불의 타오름이 오늘 내 안에서도 불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58)>

 

관태기를 아십니까?

혹시 '관태기'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요?

권태기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난생처음 들어보는 낯선 단어라 처음엔 권태기를 관태기로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이 '관태기'가 권태기보다 더 만연하고 있다고 합니다. 관태기란 관계와 권태의 합성어로 인간관계에 피로감을 느끼는 심적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권태기처럼 이 관태기에도 여러 증상들이 있습니다. 두드러진 증상으로는 '카페인'기피 현상을 꼽습니다. '카페인'이란 가장 보편화된 SNS 활동이 이루어지는 카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이 축약된 말입니다.

 

SNS를 통해 타인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의외로 깊은 '외로움'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활동들이 주는 공허함 때문입니다.

 

아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는데, 정작 진심으로 마음을 나눌 사람은 점점 얼굴조차 마주하기 어렵고,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내면보다는 외면을 가꿔야 하는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를 보고, 나 혼자 여행을 가는 편이 훨씬 더 편해진 사회, 관계가 기쁨이기보다 권태로움의 빌미가 되는 사회.

 

땅 속에 뿌리를 두고 평생 움직이지도 않은 채 혼자 피어 있는 꽃도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과의 관계 속에서, 매일 아침 내려쬐는 햇살의 도움으로 생명을 이어 가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줄입니다. 관계가 권태가 되지 않고, 관계 속에서 권태가 잊혀지는 날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카페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사람 향기가 물씬 느껴지는 진정한 '카페인'향기에 마음을 빼앗겨 보는 기쁨의 5월을 기다려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길을 찬찬히

걸어가다 보면

문득 몸서리치듯

불어오는

바람 빛과

강물의 향기
잘근잘근

그 섭리를

알았으면 좋겠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