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2017년 4월 23일(가해)

모든 2 2017. 4. 23. 22:37

합덕성당(당진지구)

본당 설립: 1890./주보성인: 성가정

 

+ 요한 복음.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가 가운데 하나로서'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따.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의 향기>

 

만두의 추억 -한동성 갈리스토 도고 주임

 

 

  어린 시절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의 계모임이 있는 날은 기다렸다. 그날 어머니는 존 일찍 저녁 준비를 마치고 가벼운 단장을 한 후 외출하셨다.

 

  즐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를 내 가슴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따뜻한 손으로 내미시는 작은 상자 속엔 기름에 튀긴 만두가 가지런히 누워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릇노릇하고 고소한 만두를 입속에 하나 넣으면 내 모든 감각은 혀 속에서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가족들이 함께 밥을 먹었다. 상을 물린 후 형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알고 있지?"

  "뭘?"

  "엄마가 계모임 할 때마다 당신 몫의 저녁 대신 만두를 싸가지고 와서 우리 주신 것"

 

  나만 몰랐던 만두의 비밀이 형의 입을 통해 거의 반세기가 지나 전해졌다. 빚진 자의 안타까움, 갚을 길이 없어진 채무자의 서러움..

 

  만두로 인해 생긴 고소한 상처가 내 가슴에 어머니란 이름의 꽃으로 피었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을 몰랐다.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져 보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제자들의 증언에도 극구 부인한다. 혼자 보지 못했다는 서운함과 소외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의 태도에는 인간적인 면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토마스의 후예가 아닌가?

 

  현실적이고 고집 센 그를 위하여 자비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토마스는 자신이 지녔던 생각과 세상에 큰 쓰나미가 일어난다.육체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믿음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의 살에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고백은 단순하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맹인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열린 입으로 첫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것처럼 그의 영혼이 새롭게 열린 것이다.

 

  수많은 죽음을 탐구한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도 말한다. "우리의 육체는 영혼불멸의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다른 차원의 하느님 나라로의 이동일 뿐이다."

 

 

via의 시선(소리를 듣다)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바람부는 날을 좋아합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가슴을 펴고 몸을 스쳐가는 바람을 느껴봅니다. 어디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인지 그리고 언제 부는 바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솔로몬보다 화려한 옷을 입은 들꽃이 흔들리면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바람은 피부의 감각으로 느끼기 전에 눈으로 먼저 봅니다.

 

   눈으로 보는 바람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창조된 존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가는 바람은 살아있는 생명을 확인하게 만듭니다. 얼마 전,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붕어를 보았습니다. 물의 흐름에 온전하게 몸을 내어주고 떠내려가는 붕어, 죽음의 향기가 났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생명은 바람에 몸을 맡기며 춤을 추지만, 존재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생명은 흐르는 물 속에서도 삶의 터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은 물의 흐름에 역류하며 살아갑니다. 아니 역류하는 것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켜줍니다.

 

   생명의 물은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끌어 올리는 암반수가 아닙니다. 생명의 물은 지하 깊은 곳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삶의 터 안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흐르는 물의 상태에 도전하면서 역류의 삶을 선택할 때, 내가 만나고 경험하는 물은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생명의 물이 됩니다. 그러나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암반 수더라도, 그 물에 떠내려 가면 나는 죽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깊게 뿌리를 내린 나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무의 뿌리는 이미 썩어 있었고,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고 믿었던 물 속에는 독약이 들어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무 그늘에 쉬다가 혹은 생명의 물이라고 알려진 물을 먹다가 죽어갔습니다.

 

   세상은 맘몬을 선택하라고 유혹합니다. 짙은 화장과 식스팩으로 잘 가꿔진 몸뚱이를 교태스럽게 내보이며 말합니다. "풍요를 주는 황소를 너희의 하느님으로 경배하라고..", 그런데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가 보여준 풍요는 사탄의 것이며, 자신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맘몬과 하느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생명과 죽음 사이의 선택,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 선택이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의 터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57)>

 

두 종류의 부모

 

  세상에는 두 종류의 부모가 있습니다. 자녀에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가르치는 부모와 '어떤'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먼저 가르치는 부모입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엇'도 중요하고 '어떤'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순서입니다. 둘 중에 어느 쪽을 최우선으로 하는지에 따라 아이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고 먼저 묻는 것은 아이에게 오로지 한 곳만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살아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먼저 묻는 것은 아이에게 세상은 결코 혼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손을 잡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 되기 위한 것이 목표가 되면, 아이는 끊임없이 비교와 경쟁 속에서 긴장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의 성취여부가 인생에서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가 최우선시되면, 아이는 늘 성찰과 보람의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성찰과 보람이 길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이정표가 되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결코 무엇이 되라고 요구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 일이 다른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비교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느냐에 더 많은 관심이 있으셨을 뿐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언제나 든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사랑이 무엇이 되라고 몰아가는 사랑이 아니라, 단지 길을 잃지 않기만을 바라시는 애틋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뒤로하고 '어떻게'를 먼저 고민하는 부모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 자녀를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첫걸음이 아닐까요?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어둡고 지난한 마음과

깊은 곳의 불신

모두 걷어 내고

너와 나,

저들과 그들이

우리가 될 수 있는

참 믿음을

이 땅에 내려주소서.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