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천 성당(천안 동부지구)
본당 설립:1999.1.26/주보성인:성 베드로
+ 마태 복음 28,16-20
<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의 향기>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 오종진 베드로 청소년 사목국장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는 것을 단순히 생각하면 이제 더 이상 그분을 뵐 수 업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승천은 단순히 이별 사건이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존재하신다면 참 좋겠지요.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 내 마음속에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요? 교황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 한 번 하는 것도 힘든데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일까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고,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예수님께 우리의 이야기를 건넬 수 있습니다. 때문에 승천은 단순히 이별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가 온전히 만날 수 있게 된 새로운 만남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승천 사건을 통해 사도들 역시 새로운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께 의지하며 다소 수동적인 태도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는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직접 세상에 나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며 참된 사도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 안에 담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활동함으로써 놀라운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이런 승천 사건이 필요합니다. 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녀석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수동적으로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이들에게 삶의 주인으로 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우리가 아이들을 대하듯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 판단하고, 책임을 묻고, 순종을 요구하기만 하셨다면 과연 사도들이 초대교회와 같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요? 복음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시며 사도들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시고 신뢰와 지지를 보내셨을 뿐, 결코 그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하신 것은 무거운 과제를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하고 있음을 명확히 표현하신 것이고, 때문에 제자들은 그 명령을 따르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청소년들을 대하는 태도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요?
청소년 주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가 청소년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게." 라며 우리 청소년들에게 진심어린 신뢰와 사랑을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via의 시선(영평에서)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좋은 아침입니다. 양평의 산골에서 이른 아침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밤에 들리는 소쩍새의 울음소리에 숨을 더하고 이른 아침 지저귀는 박새소리에 숨을 내쉬며 눈을 뜹니다. 어제는 비가 내렸습니다. 빗소리가 듣고 싶어서 아니 빗소리를 이불 삼고 싶어서 창문을 열었습니다. 몸과 마음의 씻김을 치유하는 빗소리의 울림을 경험합니다.
하느님 창조의 바닥에 편안하게 누워봅니다. 수많은 하늘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리운 님의 얼굴이 보이기도 하고, 무언지 모를, 그러나 어딘가는 있을 것 같은 모습의 그림자가 내 몸 위를 지나갑니다.
아름다운 휘파람 소리가 들립니다.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소리, 존재는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스며있는 존재의 아름다움에 함께 공명하는 것으로 기쁨을 느낍니다. 누굴까? 묻지 않습니다. 그저 소리의 파동과 함께 공명하는 자리에 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쉼"이 필요합니다. '소리"를 듣기 위한 "쉼"입니다. 수없이 많은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타인의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 나, 사실 저는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너무 바쁘게 살아서 그랬습니다. 너무 많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듣다 보니 사실 듣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바쁘게 살아갈 때,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쉼"을 통해서 '소리"를 만납니다. 그리고 "소리"에 반응하는 "나를"를 발견합니다. 참,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쉼"을 허락해 주셨으니 그리고 "소리"를 들어야 하는 "나"를 확인하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벗님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행복하소서. 그리고 잠시 멈춰서 쉬소서.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62)>
가까우니 망각일까?
산이 바로 집 뒤에 있는데 의외로 산에 자주 안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산이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이 그 원인 일 수도 있습니다. 언제든 갈 수 있는 짧은 거리가 오히려 산에 오르고 싶은 욕망을 쉽게 흐려 놓습니다.
학교에서 집이 가까운데도 종종 지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학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이 역시 그 원인일 수 있습니다.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빨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행동은 민첩함을 잃게 됩니다.
동네 빵집이 생기면 정말 자주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빵집이 생기니 빵을 구입하는 경우가 예전보다 줄어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제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빵에 대한 간절함이 그만큼 줄어든 거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산에서 다소 먼 곳에 살고 있음에도 매주 주말마다 빠짐없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 학교에서 집이 무척 먼데도 항상 교실에 제일 먼저 등교하는 학생들, 빵집이 생각보다 멀리 있는데도 꼬박꼬박 빵을 사가는 사람들...
얼마나 가까이에 있느냐는 그만큼의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편리하다고 언제나 그만큼의 행복이 주어지는 건 아닌가 봅니다. 거꾸로 편리함을 얻는 대신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집에서 성당이 매우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늘 미사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나, 산이 바로 코앞에 있는 데 늘 바라보기만 하고 거의 가 본 적은 없는 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늘 바쁘다고 그 사람들을 잊고 사는 나...
이제 산도 점점 풍성한 초록을 자랑하는데 더 자주 가고, 미사 시간에도 더 일찍 도착해서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살갑게 챙겨 보는 기쁨을 만들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곁에 가까이 계시기에 자주 망각되는 주님, 이제 그 함께하심을 언제나 한없는 기쁨으로 기억할 수 있는 지혜를 제게 주소서!!!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5월의 언덕에는
유난히 많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더니
촉촉한 땅위에서 꽃이 피었다.
이 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주님의 이름으로
피고 또 피어
화려강산 이 땅에
귀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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