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2017년 6월 18일(가해)

모든 2 2017. 6. 18. 22:30

 

신례원 성당(홍성지구)

본당 설립:1977.10/5/주보성인:예수 성심

 

  +  요한 복음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말씀의 향기>

 

일용할 양식이란 무엇인가?  -최교정 세례자 요한 홍주성지 겸 직장직종사목 전담

 

 

  3년 전 국민 모두가 멘붕상태를 겪은 세월호 사건 때의 일이다. 가족들 모두 넋을 잃고 서 있지도 못할 때, 정확히 사건 발생 3일 후 9시 뉴스에서 장례미사를 하고 나오는 어느 유가족의 모습이 방영됐다.

 

  그 부모는 세월호 사건을 뉴스로 접한 순간,교사인 아들은 아이들을 살리고 본인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단다.

 

  부모는 그렇게 자식을 키웠던 것이다. 예수님의 의로운 길을..

 

  이 부모 역시 가슴 아픈 고통이었지만 이 세상엔 없는,그 너머에 있는 그 어떤 생명을 본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지닌 자는 지나가는 세상을 모두 이겨낸다.

 

  박해시대 때 영세는 곧 죽음이었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세례를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인생의 목적이 바뀐 것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는 시대에 진리와 옳은 일에 더 굶주렸던 것이다. 참된 인간, 예수님과의 같은 인간상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눈앞의 이익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빵만을 구하고 현실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 떠나버렸다. 심지어 지상 천국을 꿈꾸던 자들은 예수님을 팔아버리기까지 했다. 이 진실은 역사 안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매번 영성체를 하기 전 일용할 양식을 청한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은 무엇인가? 단순히 빵을 말흔 것일까?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 이외 다른 것에 넘어가지 않는 일용할 양식,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일용할 양식,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성체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유혹의 과정 속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좇아가게 하는 힘이요, 참생명이신 것이다.

 

 

 via의 시선(물속으로..)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담는 방법은 물속에 항아리를 담그는 것입니다. 물을 담는다는 것은 물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한데 깨진 독에 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받아들임은 닮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닮아감으로써 담을 수 있게 되겠지요.

 

  가끔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말과 행동에 힘이 있습니다. 주저함없이 행동하는 용기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강한 빛은 그림자를 짙게 합니다. 그 사람이 발산하는 강한 자부심의 그늘에서 편안하게 쉬지 못하는 나, 그리고 그와 대면하기 꺼려하는 저를 알아차립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받은 것입니다. 나의 몸과 영혼 그리고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모든 것,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빌려온 것입니다. 부여받은 것으로 살고 부여받은 것을 돌려주면서 삶을 완성해갑니다.

 

  나의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쌓여갈수록 자부심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영원한 것이라고 믿을수록 자부심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내 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밑 빠진 항아리라는 의미입니다. 수없이 물을 부어도 시간이 지나면 물은 사라집니다.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비뚝거리는 것일까요. 비뚝거리며 걷고 있는 나를 숨기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 강하고 완벽해지려고 합니다.

 

  내 안에 물을 담으려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반대로 물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인간이 전하는 말은 인간의 언어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사랑, 겸손, 여러 가지 덕에 관한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언어이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나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변환되지 않으면, 그것은 이웃을 괴롭히는 소리가 됩니다.

 

  내 안에 물을 담으려 하는 자, 지식을 통한 당위를 주장하며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주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65)>

 

있어빌리티 VS 어니스티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끔 듣게 되는 '있어빌리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있어 보인다'는 우리말의 '있어'와 '능력'이라는 뜻의 영어 '어빌리티'(ability)가 합쳐진 신조어입니다.

 

  그 뜻을 굳이 풀어 설명하자면 무엇인가 '있어 보이게 하는 능력'쯤으로 해석됩니다. 돈이 있어 보이거나, 인맥이나 감각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월하게 보이도록 하는 능력이 바로'있어빌리티'인 셈이죠.

 

  가령, 한 잔의 커피 사진을 인터넷을 올리면서 테이블 위에 자연스럽게 고급 수입자동차 키를 보이게 하거나, 영화 티켓 사진을 올리면서 비싼 손목시계가 보이게 하는 행위들이 그 좋은 사례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행위들을 '허세'라고 부르며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최근 들어 이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온라인상에서 유명인사로 자리 잡으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곤 합니다.

 

  실제 모습과는 달리 다소 과장된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할 줄 하는 것도 능력으로 인정되는 관대한 사회.. 지나치게 경직되지 않은 채 인간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의도를 갖고 연출된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이에 괴리감이 점점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들어진 내가 진짜 나 자신일 거라는 환상은 결국 나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라도 찾아 헤매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양이 스스로를 늑대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라면, 하느님이라도 그 한 마리 양을 찾아내시기란 불가능할 겁니다.

 

  부족하고 약해 보여도 있는 그대로의 정직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 용감한 사람들로 인정받는 사회.. 하루빨리 그런 멋진 신세계가 펼쳐지길 기도해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내가

스스로를

믿을 수 있기 위해

줄곧

이 삶을 다듬듯


오늘도

한발 한발

다가

가나이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일용할 양식이란 무엇인가?

 

   3년 전 국민 모두가 멘붕상태를 겪은 세월호 사건 때의 일이다. 가족들 모두 넋을 잃고 서 있지도 못할 때, 정확히 뉴스에서 장례미사를 하고 나오는 어느 유가족의 모습이 방영됐다. 그 부모는 세월호 사건을 뉴스로 접한 순간, 교사인 아들은 아이들을 살리고 본인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단다.

 

   부모는 그렇게 자식을 키웠던 것이다. 예수님의 의로운 길을.. 이 부모 역시 가슴 아픈 고통이었지만 이 세상엔 없는, 그 너머에 있는 그 어떤 생명을 본 것이다.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품고 살아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지닌 자는 지나가는 세상을 모두 이겨낸다.

 

   박해시대 때 영세는 곧 죽음이었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세례를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인생의 목적이 바뀐 것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는 시대에 진리와 옳은 일에 더 굶주렸던 것이다. 참된 인간, 예수님과 같은 인간상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눈앞의 이익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빵만을 구하고 현실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 떠나버렸다. 심지어 지상 천국을 꿈꾸던 자들은 예수님을 팔아버리기까지 했다. 이 진실은 역사 안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매번 영성체를 하기 전 일용할 양식을 청한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은 무엇인가?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 이외 다른 것에 넘어가지 않는 일용할 양식,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일용할 양식, 하느님의 자녀로서 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일용할 양식,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성체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유혹의 과정 속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좇아가게 하는 힘이요, 참 생명이 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