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연중 제 8주일 2017년 2월 26일(가해)

모든 2 2017. 2. 26. 22:30

  

천안월랑성당(천안서부지구)

본당설립:2015.1.9 

+ 마태 복음.6,24-34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via의 시선(살아 내는 삶)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위기를 얼마나 잘 피했는지가 아니라 위기를 얼마나 일찍 만나서 다음 번 위기를 최대한 잘 넘어갈 수 있었는지 그리고 사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위기를 자기 안에 담을 수 있는지에 따라서 정신건강의 상태가 달라집니다. 스캇 백은 사람은 위기나 고통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위기를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살아 내야 하는 삶을 삽니다. 살아지는 대로 살수 있다면 좋겠지만,살아지는 대로 사는 삶에는"내"가 없습니다. 인기를 얻기 위한 경연장처럼 사는 것이 삶이라면 살아지는 대로 살 수 있습니다. 어향이 바다인 줄 알고 사는 고기는 자신에게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는 대상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오늘을 살아야 하고,그것이 최상의 삶이 되는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서 다른 노력은 필요없습니다. 얼굴에 홍조를 띠는 몸짓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왠지 거북하고 불편해집니다. 치수가 적은 옷을 입고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불편합니다.

 

가끔 도시의 밤 속을 걸으면 머리가 멍해집니다. 어둠이 없는 밤을 사는 도시,거리 사이사이의 네온사인 아래에서 걷고 있는 이방인으로서의 나를 발견합니다. 그럴때면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인지 의심하면서도,어느새 그 어색함의 길 위의 네온사인 밑에서 짙은 화장을 한 채 하룻밤의 쾌락을 약속하는 여인의 웃음에 응답하면서 짓궃기는 오늘을 운명으로 순응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살아지는 내가 놀랍습니다. 내가 없는 나를 살고 있는 내가 놀랍습니다. 그 누군가가 요구하는대로 순응하면서 사는 내가 놀랍습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묻지 않는 나,그럼에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놀랍습니다. 위기를 느끼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한 표현으로는 위기를 피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직면해야 할 것을 똑바로 보지 않았습니다.

 

선의 결핍이 악이라는 위안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규정되는 사회,인간의 선함을 믿는다는 희망으로 악은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삶은 살아 내는 것"이라는 소리에 귀막고 살았습니다. "선택"이 없는 삶,"왜?"를 묻지 못하는 삶,이런 상태를 자유롭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싫습니다. 내가 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삶을 살아 내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삶,창조의 이유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희망합니다. 제가 걷는 길이 무의미의 길이 아니기를...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49)>

 

특별 보너스 받고 계세요?

 

 

서로 다른 직장을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이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친구1:어제 또 회식했냐?피곤해 보이네.

친구2: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봐.

친구1:그러게,넌 술을 너무 좋아해,술 좀 줄이라니까!

친구2:나 사실 술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친구1:근대 왜 맨날 회식하면 끝까지 남아 있냐?

친구2:그게 사실은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친구 2는 친구 1에게 한숨을 쉬며 사실을 털어 놓았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회식자리에서 먼저 자리를 뜨면,남아 있던 사람들이 먼저 간 사람을 그렇게 흉보더라고..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하호호 하면서 서로 칭찬하기 바빴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싹 변하는지..너무 놀라서 나도 그런 일을 당할까봐,할 수 없이 자리에 끝까지 남아 있다 보니 술만 많이 마시게 된 거야."


친구 1은 깜짝 놀랐습니다. 본인이 직장에서 회식 할 때는 정반대의 경우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일어나 간 사람을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칭찬하는 그런 분위기였으니까요.


친구 2은 사실 전부터 친구 2를 부러워했었습니다. 그 친구가 자신보다 더 많은 보너스를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오늘 친구의 고백을 들으면서 친구 1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리에 없는 사람일수록 좋게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특별한 '행복 보너스'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직장,단체,모임 등을 더 이상 다니고 싶어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매번 그 보너스를 받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교회 공동체 생활은 어떨까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가더라도 뒤통수가 따갑지 않는 공동체,자리에 없는 사람을 칭찬으로 그리워하는 공동체,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끝까지 남아 함께 하는 그런 공동체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어제 그 달

그제의 저 별


어제의 내일

내일의 어제


노란 달 꽃

하얀 별 꽃


참 예쁘게도 산다

우리는 오늘.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