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연중 제2주일 2017년 1월 15일(가해)

모든 2 2017. 1. 20. 10:58

 

신탄진 성당(대전 동부지구)

본당 설립:1971.7.13/주보성인:착한 목자

 

요한복음. 1,29-3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다.>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말씀의 향기>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강길원 베드로 당진 주임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증언하는 대목이다.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에 관한 내용은 계속된다.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러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가리킨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이다. 가슴 벅찬 고백이다.

  예수님께 관한 요한의 증언이 우리 맘을 뜨겁게 달구는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어린양이 무엇일까?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로 어린양을 바쳤다. 사람이 어린 양을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물로 준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어린양 이시다. 이사야 예언자는 일찍이 장차 올 메시아를 '고난의 어린양'(이사  53,7) '고난의 종'으로 묘사했다.

 

  요한은 바로 자신의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 세상에 왔음을 알린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소리라는 것이다. 외쳐지고 흩어지고 마는 준비자일 뿐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증언하는 요한의 맘이 설레고 당당히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하느님의 어린양 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줄 사람이기에, 저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된다는 속 깊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운 감사함일까?

 

 요한이 부럽다. 가장 먼저 메시아를 알아본 사람이다. 그가 세상에 자신의 주군을 소개한다.

 

  내가 누군가를 소개하면서 나 자신까지 으쓱해지고 자랑스러워지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가 많이 배워서 똑똑하고 성공한 사업가로 부와 명에를 얻어서가 아니다. 늘 변함없이 성실하며 자신의 상처를 싸매고서도 누군가를 안아줄 줄 아는 넓은 가슴과 이해심 깊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에 그가 자랑스러운 것이다. 자신은 작아지더라도 다른 이를 키울 줄 아는 사람이기에 고마운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바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via의 시선(바라봄의 이유)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젊은이여, 일어나라!"

1999년 1월 26일, 서품식장에 걸려진 서품 성구입니다.

성소의 갈등으로 짐을 싸고 싶었던 신학과 4학년 어느 날, 복음을 통해서 들려온 소리,

"젊은이여, 일어나라!" 평생 가슴에 기억해야 할 성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 말씀은 저의 서품 성구가 되었습니다.

 

복음에서의 젊은이는 과부의 죽은 아들입니다. 죽은 아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죽었다는 것과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와 자식을 잃은 어머니를 위로해 주는 많은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장례행렬은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도 살아있음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관계 맺지 못하는 관계, 그래서 언제나 일방향적입니다.

 

삶이란 일방향적인 관계를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삶은 너를 만나는 양방향적 관계 맺음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삶으로의 회귀는 내가 너를 만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서로를 "바라봄'입니다.

 

죽은 아들을 돌려준 이유는 젊은 나이에 죽은 아들을 아파하는 과부의 애처로움과 아들을 돌려받아야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과부의 현실 때문입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사는 것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지금 살고 있으면서도 사는 것이 아니라면, 사는 것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돌려줘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식을 낳고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축복의 소리와 더불어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하느님의 창조의 기쁨을 살 수 있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죽은 아들을 과부에게 돌려주신 예수를 바라봅니다.

 

공동체의 사람으로 부르신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경험하는 백성의 현실을 마주합니다.

때론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지금 여기에서 들려주시는 표징을 통해서 주어지기에 회피하지 않습니다.

직면하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길을 찾습니다. 보고, 판단하고, 기도하며 선택합니다.

 

삶을 살아야 하는 "나"와 "너",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잡습니다. 아!, 지금 살아있는 나를 느낍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44)

 

희미한 옛 친구의 그림자

 

  대학 동창으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하도 오랜만이라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자, 그 친구는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벌써 잊었느냐고 서운해하면서도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그제야 대학시절 철학과에 다녔던 개성 충만한 저의 절친 얼굴이 떠올랐고,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에 우린 바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약간의 주름 외에는 대학시절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친구를 보니, 갑자기 저는 무엇보다 오랜 세월 더 업그레이드된 그 친구의 인생철학에 대한 강의가 듣고 싶어 졌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책들을 소개해 주고, 동양철학의 오묘한 세계로 저를 이끌었으며, 스무 장이 넘는 편지에 멋진 필체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적어 보냈던 그 친구는 대학시절 제겐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그 친구는 그때처럼 매우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왔는데, 그 안엔 분명 저를 놀라게 할 새로운 책들이 들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대감은 점점 더 커져 갔습니다.


  마침내 그 친구가 배낭을 열어 하나씩 뭔가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가방에서는 인생의 지혜로 가득 찬 책 대신,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약보따리들이 나왔습니다. 놀란 저를 보고 친구는 요즘 건강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먹어 보고 있다며 하나씩 친절하게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약은 어디에 좋고, 이 차를 마시면 어디가 좋아지고..


  두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시간 반이 건강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나이에 누구나 할 수 있는 흔한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대학시절 저의 '우상'으로 부터 듣고 있으니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이제부터 무엇보다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는 친구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우리가 어쩔 수 없이 건너온 세월의 강물이 얼마나 거센 것인지 실감하고 말았습니다.


  빛나던 눈동자,타협을 거부한 고집,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집어삼킨 그 오랜 시간 속에서도 우리가 끝내 지켜온 건 무엇일까요?희미해진 옛 친구의 그림자 안에서도 결코 희미해지지 않는 한 줄기 불굴의 정신을 지켜달라고 기도해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겨우내 시린 마음

꾹꾹 참으면

가까이 있는 사람도

그립습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비워둔 마음에

바람으로 불어와

환한 꽃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