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7년 주보

연중 제3주일 2017년 1월 22일(가해)

모든 2 2017. 1. 22. 22:30

 

당진성당(당진지구)

본당 설립:1939.6.24/주보성인:모든 성인의 모후

 

+ 마태복음. 4,12-23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면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말씀의 향기>

 

기쁨의 빛은 우리들 삶의 자리에...  -맹세영 세례자 요한  홍성 주임

 

  성탄을 앞두고 신자들 가정방문을 하였습니다. 가정방문을 하면서 많은 분들이 부담을 갖고 피하기도 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기도 하였지만, 원하는 신자 가정을 방문하였습니다. 가정에 성수를 뿌리며 축복해 주었고, 신자분들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달 간의 가정방문을 하면서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한 분 한 분을 만나면서 오히려 힘을  얻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특히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먼 곳에서부터 성당에 오시는 분들을 보면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흙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는 빛이 비칩니다."(이사 9,1)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났던 교우들의 집에는 빛도 이웃의 관심과 배려도 부족한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지닌 풍요로움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부족한 삶의 자리를 한 사제의 방문을 통해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하는 단순함이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에 가시어 사람들을 만나신 것처럼 기뻐하고 좋아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의 모습 속에 누군가와 단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음은 어느 지역이나 출신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결코 세상에서 누리는 풍요로움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을 향한 단순한 사랑, 바람을 한결같이 지닐 때입니다. 그때 그 자리 그 마음에 복음의 기쁜 빛이 비춰질 것입니다.

 

  마치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언제 어디서 우리의 기쁨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것은 높고 깊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찾아 고쳐주심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의 기쁨을 선포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들 각자의 이웃 안에서 사람의 관심과 배려를 바라는 이들을 향해 주님을 맞이하듯 다가가는 일을 통해 기쁨 선포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들 각자의 이웃 안에서 사람의 관심과 배려를 바라는 이들을 향해 주님을 맞이하듯 다가가는 일을 통해 기쁨이 충만해지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via의 시선(바라봄의 이유)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 주간의 글-

 

하늘을 봅니다. 밤부터 내린다는 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슴에 구멍이 생긴 느낌입니다. 사제관 창문을 통해서 바라보는 작은 길은 많은 차들과 사람들로 채워집니다. 비어 있는 길을 보기 위해서는 이른 아침까지 깨어있어야 하는 수고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가끔은 비어있는 길이 보고 싶어서 이른 아침까지 무엇인가를 합니다.

 

바쁘게 삽니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모두 바쁘게 삽니다. 바쁘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사는 이유는 그들에게 시간이 없거나 하루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바쁘게 사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천천히 사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사는 법을 배우지 않아서 천천히 사는 것이 두려워서 바쁘게 삽니다.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야만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고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모두 행위입니다. 행위란 의지의 활동을 통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멈춤 속에 내재하는 움직임, 그래서 쉼은 관조의 행위이고, 생명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감탄의 언어로 이어집니다.

 

"좋구나, 보니 좋구나!!!"

 

늦은 밤, 불 꺼진 사제관 현관문을 열면서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 문을 열 때, 비어 있는 공간이 없다면 어떡하지? 다행히 현관문을 열면 비어 있는 공간이 보입니다. 그 공간에 나를 채우고 다시 문을 열면, 또 다른 비어 있는 공간이 보입니다. 무엇인가로 꽉 채워진 장소, 그곳에 제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곳에 존재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삶의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무엇인가를 꽉 채운 내가 아니라 비어 있는 나를 살고 싶습니다. 비어 있어서 다른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고, 채운 것을 다시 비울 수 있는 나, 그래서 바쁘게 사는 내가 아니라 천천히 사는 내가 되고 싶습니다.

 

눈이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린 눈을 감탄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오늘을 희망합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45)

 

제목 이즈 뭔들?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오후 두시쯤, 아파트 근처 공원 산책길을 걷던 할머니 세 분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어디에선가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공원에 나와 색소폰 연습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할머니 1: 저곡 "아, 목동아"맞지?

할머니 2: 무슨 소리?"대니 보이"라는 곡인데..

할머니 1: 아냐, '아, 목도아'가 맞다니까?

할머니 2: 글쎄'대니보이'라니까!

할머니 1: '아, 목동아'라니까 왜 그리 고집이 세?

 

사실 두 할머니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그 곡의 원래 제목은 "대니 보이"고, 그걸 한국말로 번역한 것이 "아, 목동아"였으니까요. 같은 곡을 서로 다른 제목으로 알게 돼서 생긴 해프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 할머니가 서로 양보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동안, 나머지 한 할머니께서는 그냥 눈을 지그시 감고만 계셨습니다.

 

할머니 1: 아니, 할멈은 뭐해?

할머니 3: 뭐하긴? 그냥 눈 감고 음악을 들으니 참 좋네..

할머니 2: 이 곡 제목 알기나 해?

할머니 3: 제목이 뭐가 중요해, 마음이 즐거워지면 그뿐이지.

 

살다 보면 그저 귀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 이것저것 따지다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 말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은 제목을 기억할 필요가 없는 , 영원한 위로를 주시는 지상 최고의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귀에 들리는 대로, 마음에 와닿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느라 지쳐가기 때문입니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차가운 공기를 뚫고 들려오는 한 줌 햇살 같은 그분 말씀에 영혼의 귀를 온전히 맡겨 보고 싶어 집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입장들

너와 나

우리들

 

같은 곳

다른 행동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