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 성당(아산지구)
본당 설립:2010.1.13/주보성인:예수 성심
+ 루카 복음. 7,11-17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 무렵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말씀의 향기>
측은 지심 - 안상길 사도요한 천안 오룡동 주임
예수님께서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예수님 시대에 가장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받은 사람은 과부와 고아였습니다. 지금같이 여자가 직업 전선에 나가 벌어먹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거든요. 그러한 어려운 처지이다 보니 살면서 받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표현이 옳을 겁니다.
때문에 자신의 외아들이 삶의 희망이었음을 말할 것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금쪽같은 아들이 죽었으니 그 과부는 절망에 떨어진 상태였지요.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차마 못 보신 체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기적 이야기는 단순히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시는 기적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로 죽음과 고통에 빠진 우리 불쌍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는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자비의 삶을 우리도 살라고 가르침을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은 이 측은지심은 우리 신앙인의 삶 안에서 가장 주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때문에 남들이 어려움에 빠지거나 말거나,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삶의 기쁨만 추구하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결코 압니다.
자비의 대희년을 발표하신 교황님께서 작년 한국 방문 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교황님은 한국 방문 동안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면서 닷새 동안 노란 리본을 달고 가족들의 고통에 함께하셨지요. 그런데 정신 나간 기자가 떠나시는 교황님께 "중립을 지켰어야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했지요. 교황님은 "고통 앞엣 중립을 지킬 수 없노라"는 참으로 예수님 같은 대답을 지혜롭게 하셨지요. 모든 걸 정치적 색깔을 씌워 판단하는 어이없는 기막힌 세상이지요.
그러다보니 요사이 정치적 색깔을 씌워 고통 속에 있는 피해자 가족들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지극히 일부이지만 신앙인들이라는 사람들도 말을 함부로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측은지심이 없는 신앙인은 엄격히 신앙인이 아닙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신앙인이 할 일입니다. 쓸데없이 세속인들 따라하면서 죄인이 돼서는 안 되겠지요. 세사이 아무리 살벌하게 변하단 하더라고 우리 신앙인들만은 어려운 이웃, 슬퍼하는 이웃, 고통에 빠진 이웃과 함께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비의 대희년을 맞은 우리 모두 이러한 것을 깊이 깨달아 주님의 마음을 닮아 진정한 기쁨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1)
병인박해 150주년을 맞으며
<가톨릭 성가> 289번 '병인 순교자 노래'2절에 보면, "병인년 그 옛날에 '구름재'서릿발에 팔도는 '오가작통'피바다 이뤘을 제" 라는 가사가 나온다. '병인년'은 1866년을 말하고, '구름재'는 그 해에 박해령을 내린 흥선대원군이 살던 운현궁(雲峴宮)을 지칭한다. 서릿발 같은 명령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1873년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7년 넘게 계속되어 8천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전의 박해들은 길어야 1년이면 마무리되었는데 왜 이 박해는 그리도 길어졌을까?
병인박해 이전 우리 교회는 15년 정도 무난한 시기를 보냈다. 천주교 금령은 여전하였지만 적극적 박해가 없었으므로 신자는 두 배로 증가하여 23,000명에 이르렀고, 프랑스 선교사들은 최대 12명까지 들어와 활동하였다. 이때 조선 밖에서는 큰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860년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이 중국 북경을 점령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북경조약이 체결되었고, 그 안에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항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조선 천주교회는 국내에서도 자유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내외 사정은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배경이 되었다.
1864년 러시아인들이 북쪽 두만강 국경에 나타나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난데없이 러시아인들의 출현에 조선 사회가 공포에 휩싸였을 때 몇몇 지도급 신자들이 흥선대원군에게 한 가지 의견을 내었다. 오래전부터 조선에서 활동해 온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와 접촉하여 러시아를 견제하자는 제안이었다. 대원군의 수용적인 태도에 잠시 환호하던 우리 교회는 오히려 거센 역풍을 맞았다. 조정 대신들과 양반들의 적극적인 반대. 그리고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원군의 정치적 판단이 맞물리면서 천주교는 큰 박해를 마주하게 되었다.
예전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 박해 역시 1년 정도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이미 몸집이 커져 있었고, 중국 인근에 도움을 청할 만한 세력이 포진해 있었다. 결국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들어오는 빌미가 제공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이는 천주교 박해를 더 부추기고 장기화하는 원인이 되었다."(마르 10,24)는 말씀처럼 가진 것이 많아진 교회는 예전처럼 순수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교회 전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신자들이 어느 때보다 많은 시기였기에, 그중 몇 분이라도 작은 지면을 통해 나눠 보려 한다.
-김정환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아충무의 행복 나침반(112)>
멍 때리기, 기도의 시작
지워야 보이는 답
언젠가 영국에서 열린 '구르는 치즈 잡기 대회'라는 걸 텔레비전을 통해 본 기억이 납니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 아래로 빠르게 굴러가는 치즈를 누가 먼저 잡는지를 가리는 대회였죠. 치즈만 구르는 게 아니라, 사람들도 함께 마구 굴러 내려가는 모습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굴러 내리는 치즈를 먼저 잡으려는 대회보다 열 배쯤 독특한 대회가 서울 한강에서 열렸다는 걸 혹시 알고 계신가요? 남녀노소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이 대회가 특이한 이유는 오로지 아무 생각 없는 상태로 오래 버티기만 하면 되는 대회였기 때문입니다.
이 대회의 이름은 '멍 때리기 대회'입니다. '멍 때리기'라는 말은 생각과 마음을 텅 비우고 아무런 인위적 노력을 하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 신조어입니다. 마음을 비우려는 노력마저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상'과도 구별되는 완벽한 멍한 상태를 의미하는 말인 셈이죠.
이 흥미로운 대회 소식을 접하면서 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쓸쓸해졌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안고 살고 있기에 이런 대회가 나오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저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하루 중 혹시 내가 멍 때린 상태로 있던 때가 언제 그리고 얼마나 자주 있었을까?" 돌이켜보니 그런 순간을 찾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늘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겨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마음은 산만했으니까요.
밥을 먹으면서도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찌는 건 아닌지, 출근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한 사람과 전화를 하고 있으면서도 이 통화가 끝나면 또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지... 단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하게 비워질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가 힘든 것은 마음을 완전히 비우는 기도의 준비과정이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과 마주 앉아 진심을 속삭여야 하는데,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자마자 자꾸만 오만가지 상념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오니 주님은 점점 제게서 멀어져 갑니다.
기도는 지워야 보이는 답입니다. 마음에 무엇인가를 잔뜩 적으면 기도는 사라집니다.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아니라, 남 보기에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멍 때리기 대회에서 우승할 자신은 없지만, 주님과 오롯이 만날 수 있는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오늘부터 밥을 먹으며 살찔 걱정 대신 감사의 기도만 열심히 드려 보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화분 한 귀퉁이 괭이밥
길모퉁이 달개비
마당언저리 애기똥풀
감자밭 사이 메꽃
느닷없이 찾아와
원인 없는 미소를
짓게 하는 것.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 마당>
성모님의 찬란한 빛!!!
해마다 오는 5월, 성모성월이지만 올해는 성모님이 더 그리웠다. 언제부터인지 성모상을 우연히 쳐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내가 기쁘면 성모님도 함께 웃고 내가 힘들고 우울한 날은 성모님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요즘 며칠간은 내 마음이 슬펐는지 성모님의 얼굴에도 왠지 그늘이 드리워 보였다.
올해 대학을 졸업한 우리 딸 엘리사벳은, 어릴 적 아담한 성당에서 복사도 했고 친구들과 성당에서 공부도 하고 그랬는데,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가게 되면서 친구가 없어서인지 결국 냉담자가 되고 말았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성당에 다시 나가자고 해도 언제나 무반응이었다. 그런데 올 2월 어느 날 '바오로딸 서원'앞을 지나가는데 묵주 하나만 사달라고 졸라서 예쁜 묵주를 사 주었다. 무척 기뻐하며 언제 어느 때나 묵주를 꼭 차고 다닌다. 얼마 전 모회사 신입사원을 뽑는다기에 원서를 냈는데 서류전형을 통과해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실에 들어가자마자 묵주를 보고 종교가 뭐냐고 묻길래, 딸은 당당하고 자신 있게 '천주교'라고 말했다. 그런데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 직장은 개신교 재단이었기에 개신교인을 우선 채용했단다. 난 얼떨결에 "넌 성당도 안 나가면서 그냥 없다고 하지 그랬니?" 했더니 딸은 "내 종교가 안 바뀌었는데 왜 그렇게 말을 해야 해? 이 묵주를 보면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기도를 하고 있어, 난 괜찮아,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야."라며 빙그레 웃는다.
하느님은 분명 더 좋은 다른 계획을 마련하고 계실 텐데.. 내가 왜 그 순간 그런 말을 했는지 후회가 밀려왔고 오히려 부끄러웠다. 요즘 동창모임에 가면 남편 이야기며 자식들이 어디 취직했느니, 이번에 자기네 아들은 임용고시 합격했다느니 하는 자랑을 하는데 그럴 땐 부럽기만 하다.
한 친구가 자기는 9일 묵주 기도를 꾸준히 하는데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며, 나한테도 9일 묵주기도를 해 보란다. 하느님은 빛이기 때문에 한 곳만 비추지 않고, 태양처럼 골고루 모든 이들을 비추신다. 언제나 인자하고 티 없고 겸손하신 어머니의 사랑 넘친 마음을 닮게 하시고 어머니의 이끄심으로 어머니와 함께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에 기쁨이 되게 해야지. 성모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놀라운 장면을 응시하며 성모님께 장미화관을 아낌없이 만들어 드려야겠다.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는 묵주기도의 모후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확신을 갖고 꾸준히 기도해야겠다.
-김옥이 실비아/송촌동 성당-
사제를 위한 연가(예수 성심 대축일) -이해인-
개인적 친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의 가슴이 뛰고
설레게 하는 당신을
신부님! 하고
나직이 불러보면
마음엔 장미 한 송이 피어나고
고향의 시냇물이 흘러갑니다
생의 모든 순간마다
거룩한 성사를 이루며
존재 자체로 빛과 소금인 예언자
당신은 언제나
우리의 스승이고 애인이고 친구입니다.
우리의 이상이고 기쁨이고 희망입니다.
모든 이를 끌어안되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으며
모든이와 함께 하되
항상 홀로여야 하는
아름답지만 고독한 길 위에서
때로는 힘들어 눈물 흘리며
하늘빛 지혜를 구하는
당신의 겸손을 존경합니다.
좋은 일 생기면
소년처럼 수줍게 웃는
담백한 순수함을 사랑합니다.
서늘하고도 뜨거운
사람의 눈길로
당신이 제단에서
정성 다해 두 손 모을 때
우리도 두손 모으며
순결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어찌 다 감사할 수 있을까요
말로는 다 표현 못할
영원에 대한 그리움과 목마름
순례자인 우리의 애틋한 영적 갈망을
이 지상에서 당신 아닌 누구도
채워 줄 순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도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만들어가는
그리스도의 사제여
눈사람을 닮은 예수님이여
당신이 살아계신 세상은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기다리는 집이 되어주십시오
선과 진리가 승리하는
은총의 시간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끝까지 함께 계셔 주십시오
우리 또한 당신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아 행복한
당신의 사람들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오늘도 겸손되이 강복을 청합니다
분꽃처럼 환히 웃어 봅니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중에서.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16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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