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양동 성당(대전 동부지구)
본당 설립:1987.2.16/주보성인:삼위일체
+ 요한 복음.16,12-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말씀의 향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 황화인 도미니코 문창동 주임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관한 교의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뿌리, 토대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들어도 거리감을 느끼고, 나와 나의 삶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하느님의 신비로 여깁니다. 맞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의 삶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해해야만 하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1 요한 4,9,17)라고 고백할 때, 사랑의 삶이 없이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는 논리로 하느님은 위격들 사이의 사랑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위격들 간의 '관계의 하느님'이시고, '위격들 간의 공동체'를 이루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이민자와 같이 성부께로부터 파견된 분으로 오셔서 이 하느님의 현실을 이 땅 위에 건설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삼위일체의 현실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실상 하느님의 나라는 곧 삼위일체적 사랑의 관계, 하느님 안에서 서로 형제자매로서 거대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면 우리는 모두 형제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보편적 형제애를 건설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계명을 주셨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모든 말씀들에서 일관성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새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이 새 계명 안에는 상호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상호성은 성부, 성자, 성령 간의 사랑의 상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호적인 사랑의 교류입니다. 우리에게도 그 하느님 안의 상호적인 사랑의 교류 안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들의 삶 안에서 확장되고 번져간다면 이 땅 위에 그분의 평화가 함께할 것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의는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느님 존재의 신비입니다. 우리 인간은 시작이신 하느님에게서 사랑으로 태어나서, 모든 것의 의미이지 목표이신 하느님에게로 간다는 것을 보여 주며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새 계명은 하느님의 법칙이며 이제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 땅의 법칙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에 의해서 위격-관계라는 하느님의 신비가 잘 보존되고 신앙의 진리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 외로이 고독한 하느님이 아니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미 천국을 맛보라는 하느님의 초대의 근거가 되는 삶의 신비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표한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사목교서 연재(1)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사목교서
박해시대 교회에 대한 반추
올해는 병인순교 15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한국 천주 교회가 살아온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현재의 교회를 이해하고 미래의 교회를 미리 전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를 거치며 백여 년 동안 모진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이 기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고통의 십자가가 얼마나 큰 은총과 영광으로 이어지는지를 깨닫게 하는 순례의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1 베드 5,10 참조)
특히 십 년 가까이 지속된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의 근간을 뿌리째 흔든 혹독한 시련기였습니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지 5년 만에 8천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처형되거나 희생되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전국의 각지로 흩어져 정처 없이 떠돌며 가난과 질병,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병인순교 150주년을 맞이하여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분들 특히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오늘날에도 묵묵히 신앙을 증거 하는 분들을 보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병인박해 백주년(1966)에 병인박해 순교자 26위의 시복을 고대하면서 교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교서에서 초창기 교회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한국 교회사는 이승훈이 갑진년(1784) 초에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평신도 교회를 창설한 이래 불과 2백 년이 못 되는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의 용기 가득한 신앙 증거는 신앙인들의 모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초기의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박해로 희생된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합니다. 신앙의 선조들 중 이벽 요한 세례자의 순교는 신앙 때문에 가족들이 서로 갈라지고 맞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루카 12,52-53 참조) 또한 유배지에서 많은 이들이 신앙을 증거하며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 중에 대표적인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를 기억합니다.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들에 대한 이러한 기억과 존경이 이미 추진 중에 있는 하느님의 종 133위의 시복으로 이어지고 한국 교회 안에 순교의 신앙이 면면히 흐르기를 희망합니다.
근 · 현대 신앙의 증인들
한국 천주교회는 병인순교 백주년(1966)년 교서를 통해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와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의 양성을 포함하여, 그 외의 방인 신학생 양성에 힘쓴 파리 외방 전교회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바 있습니다. 병인순교 15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메리놀 외방 선교회와 성 골롬바 외방 선교회 등의 선교사들,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 수도자들과 그 밖의 여러 수도회의 헌신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이울러 이 땅에서 한국 전쟁 시기에 순교한 선교사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시복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평양 교구의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 순교자들을 비롯하여 근· 현대 시기의 순교자와 증거자들의 신앙 증거에 경의를 표하며 그분들의 신앙과 삶을 본받고자 합니다.
우리 곁에는 침묵하고 있는 북녘 교회가 있습니다. 단한 명의 사제와 수도자도 남아 있지 않은 북녘 땅에는 57개의 본당과 80여 명의 사제, 180여 명의 수도자, 5만 2천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70년간 지속되어 온 침묵의 북녘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하루 빨리 되찾고, 헤어지고 갈라진 형제들이 서로 용서하고 진정한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갈구합니다.
-다음 주에 계속-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10)>
습관은 상상력을 키운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삶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흰 종이에 손을 베었다/종이가 나의 손을 살짝 스쳐간 것뿐인데 피가 나다니/쓰라리다니/나는 이제 가벼운 종이도/조심조심 무겁게 다루어야지 다짐해 본다/세상에 그 무엇도 실상 가벼운 것은 없다고/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내가 생각 없이 내뱉은 가벼운 말들이/남에게 피 흘리게 한 일은 없었는지/반성하고 또 반성하면서..(종이에 손을 베고/이해인)
복사 용지를 만지다 손을 베었습니다. 손가락은 쓰라리고 제 자신의 부주의함에 속상한 순간 문득 수녀님의 시가 기억났습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역시 시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어떻게 얇은 종이에 베인 '피해자'가 그 아픔의 순간 혹시 내가'가해자'였던 적은 없었는지를 돌아볼 수 있었을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죠.
그런데 오늘 수녀님의 시를 다시 읽어 보면서 저도 혹시 시라는 것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적 상상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시적 영감은 어느 순간 갑자기 벼락처럼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일상적으로 반복해 온 자기 성찰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수녀님의 시는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수녀님께서 평소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하셨다면 어떻게 종이에 손을 베인 순간 그런 아름다운 상상력이 발휘되었을까요? 늘 하느님 앞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에 관해 묵상과 참회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시가 탄생했을까요?
사람들은 상상력이 시를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엉뚱하게도'습관'이 시를 만드는 거라고 믿어 봅니다.
돌아보는 습관, 질문하는 습관, 고뇌하는 습관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진실의 언어 또한 만들 수 없습니다.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한 편의 시를 남기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은 내 삶의 시가 공허해지지 않기 위해 어떤 습관부터 들여야 할까 고민하는 별 헤는 밤이 될 것 같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꿈
꽃
바람
하늘 아래
사는
우리들의 사랑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 마당>
삶의 목표가 선명해졌습니다.
나이 오십을 넘기고서야 세례를 받았습니다. 중년 이후, 신앙에 대하여 막연한 동경만 가졌을 뿐 실천으로 옮겨 볼 용기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4학년을 앞두고 있던 아들이 세례를 받고 '라파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집안에 빛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집에서 가까운 천안 쌍용2동 성당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용기가 부족한 저를 위해 주님의 뜻을 먼저 실천할 수 있는 어린양 하나를 골라 저에게 아들로 보내주셨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에게 세례는 영광스런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 주위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성소(聖召)를 받아 오로지 하느님 나라의 법규에 의지한 채, 매일 이 세상의 모든 달콤한 유혹들과 싸우며 주님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성직자의 숭고한 고독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 아물 수 없는 절절한 사연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분들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자기가 품고 있는 상처가 클수록 더 큰 신앙 안에서 봉사와 헌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낯설고 어설픈 저에게 따뜻한 손을 먼저 내밀어준 이들도 그분들이었습니다. 어딘가 살짝 불만스러웠던 제 삶의 일부도 돌이켜보니 전혀 부족함이 없는 큰 선물임을 교회 안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작은 성취마져도 제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했던 교만과 어리석음이 저절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언제부턴가 '가치있는 삶'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려 왔었는데, 신앙을 통해 그 목표가 선명해졌습니다. 이제부터는 제 선택이 어떤 것이라도 모두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이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제가 하는 모든 일들이 무의식적인 행동일지라도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이 되길 희망합니다. 우리 부부는 주님이 보시기에 예쁜 모습으로 성가정을 이루고, 올곧고 겸손한 신앙 안에서 우리 이웃들과 진심으로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고 남은 육신 중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아낌없이 기증하여 필요한 분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떠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가까운 가톨릭 공원묘원 한 켠에 소박한 자리를 빌려 우리 부부가 영원히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그때까지 늘 주변에 대한 감사의 끈을 놓지 않고, 세례와 견진성사 때 받은 성구를 매주 미사 때마다 확인하면서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교회 안에서 흔들림 없이 저의 바램을 실천하며 살고 싶습니다.
-문용원 자마/천안 쌍용 2 동성당-
기도와 응답 -정채봉-
"쫓기는 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년 끝의 풍경 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꿀밭 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 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기도를 마친 그에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들은 내 도움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네가 그리하면 나의 감사의 은혜를 주겠노라"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16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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