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성당(서산지구)
본당 설립:1964.8.4/주보성인:성모 성탄
+ 루카 복음.24,46-5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 50차 홍보 주일 담화
커뮤니케이션과 자비의 풍요로운 만남
자비의 성년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는 커뮤니케이션과 자비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강생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 교회의 모든 존재와 활동의 특성인 자비를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의 내용과 방법, 우리의 모든 언어와 동작은 모든 이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과 온유와 용서를 표현하여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인 사랑은 우리가 자신을 열어 나누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으로 활기를 얻게 되면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은 하느님의 힘을 전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이와 소통하도록 요청받습니다. 특히 교회의 언어와 활동은 본래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이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충만한 삶을 향한 여정에 힘을 보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충만한 삶을 모든 이에게 전해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도 기꺼이 어머니인 교회의 따스함을 받아들여 이를 다른 이들과 나누어 그들이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따스함이 바로 신앙의 언어에 진정성을 담아 주어,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할 때 그 언어에 생기를 불어넣는 불꽃을 일으키게 됩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서로를 연결해 주고 만남과 유대를 촉진하여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려 깊은 언어와 행동으로 오해를 피하고 아픈 기억을 치유하며 평화와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언어는 개인들, 가족들, 사회 집단들, 민족들을 저마다 연결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에서 모두 가능합니다. 우리의 언어와 행동은 우리 모두가 비난과 복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악순환은 개인과 민족들을 끊임없이 속박하고 증오에 찬 언어의 표현을 조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언어는 늘 친교를 촉진하여야 하고, 심지어 악을 단호히 단죄해야 하는 경우에도 결코 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을 단절시키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이 상처 입은 관계를 치유하고 가정가 공동체의 평화와 조화를 회복시켜 주는 자비의 힘을 재발견할 것을 요청합니다. 오랜 상처와 남은 원한이 인간을 사로잡아 소통과 화해를 얼마나 방해하는지를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는 민족들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자비는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고 대화하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였습니다. "자비는 본질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는 땅을 적시는 부드러운 단비처럼 하늘에서 내립니다. 자비는 서로에게 은총이 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과 자비를 입은 사람 모두에게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베니스의 상인」),4막 1장)
결코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자비에서 정치와 외교의 언어가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저는 제도적 정치적 책임을 지는 이들과 여론을 이끄는 이들이, 자기와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이들, 또는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 특히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처지를 악용하여 불신과 두려움과 증오를 부채질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화해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로 이러한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담대함이 오래된 갈등의 실질적 해결과 지속적인 평화를 실현할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7,9)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교회 목자로서의 봉사가 우리의 반대자들을 이겼다는 교만한 자부심을 표출하거나, 세상의 정서로는 패배자로 여겨져 버림받은 이들에게 굴욕감을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비는 삶의 어려움을 덜어 주고 세상의 냉대만을 받은 이들에게 따스함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의인과 죄인을 철저히 구분하는 사고방식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폭력과 부패와 착취와 같은 죄의 상황을 단죄할 수 있고 또한 단죄하여야 하지만, 사람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사람들의 마음속을 깊이 들어다 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잘못을 저지른 이들의 특정한 행동 방식이 지닌 부정과 불의를 꾸짖어 그들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을 해방시켜 주고 넘어진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진리는 궁극적으로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의 온유한 자비는 우리가 진리를 선포하고 불의를 단죄하는 방법의 척도가 됩니다.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사랑으로 진리를 확언하는 것입니다(에페 4,15 참조) 사랑에서 나와 온유와 자비를 담은 언어만이 죄인인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엄격하거나 도덕주의적인 언어와 행동은 우리가 회개와 자유로 이끌고자 하는 이들을 더욱 소외시킬 위험이 있으며, 그들의 거부감과 방어적 태도를 강화시킵니다.
어떤 이들은 자비를 바탕으로 삼는 사회관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거나 관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정에서 처음 경험해 본 인간관계를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모는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의 능력과 성과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부모는 당연히 자기 자녀가 최고이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표 달성을 조건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은 늘 우리를 환대해 주는 곳입니다.(루카 15,11-32 참조) 저는 인간 사회가 모르는 사람들끼리 경쟁하여 일등을 뽑는 경기장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언제나 문이 열려 있어 누구나 환대를 느끼는 집과 가정임을 모든 이가 깨닫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먼저 경청하여야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은 나눔을 의미합니다. 나눔에는 경청과 수용이 필요합니다. 경청은 단순한 청취 이상의 것입니다. 청취는 정보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지만 경청은 커뮤니케이션으로 친밀함을 요구합니다. 경청을 통해서 우리는 수동적인 관망자나 사용자나 소비자의 상황에서 벗어나 올바른 자세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경청은 또한 다른 이와 함께 의문과 의혹을 제기하고, 나란히 함께 길을 가며, 절대 권력의 독선에서 벗어나고, 공동선을 위하여 우리의 능력과 은사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청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못 들은 척하는 것이 더 편합니다. 경청은 다른 이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를 이해하고 높이 평가하며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순교 또는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이는 우리가 불타는 떨기 앞에 선 모세와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만나는 "거룩한 땅"위에 설 때 우리는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탈출 3,5 참조) 경청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커다란 은총입니다. 이는 우리가 청하여 실천하도록 노력하여야 하는 은사인 것입니다.
전자 우편, 문자 메시지, 소셜 네트워크, 인터넷 채팅 또한 인간 커뮤니케이션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수단을 잘 활용하는 능력과 인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소셜 네트워크는 인간관계를 용이하게 하고 사회의 선을 증진시킬 수 있지만, 개인들과 집단들의 양극화와 분열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디지철 세계는 열린 광장으로 사람들이 만나 서로에게 힘을 주거나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며, 유익한 토론을 하거나 중상모략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저는 신비 안에서 지내는 이 희년에 "우리가 더 활발한 대화를 나누어 서로를 더욱 잘 알고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희년에 모두 닫힌 마음과 서로 무시하는 마음을 없애고 모든 폭력과 차별을 몰아내기를 바랍니다.(칙서「자비의 얼굴」 23항) 또한 우리는 인터넷을 통하여 참된 시민 의식을 키울 수 있습니다. 디지털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에는,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고 존중받아 마땅한 존엄을 지닌 이웃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인터넷은 건전하고 나눔에 열려 있는 사회의 건설에 현명하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평을 넓혀 주는 자리와 수단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선물인 것으로 막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저는 커뮤니케이션과 자비의 만남은 배려하고 위로하며 치유하고 함께 기뻐하는 친밀함을 이끌어 낼 때에 올바른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붕괴와 분열과 양극화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자비와 함께하는 커뮤니케이션은 하느님의 자녀들과 우리의 모든 인류 형제자매들의 건강하고 자유로우며 연대를 이루는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여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08)>
'덕밍 아웃' 준비 중
진심만이 최고의 신심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집 밖에서 식사할 때 저는 이상하게도 기도하는 걸 자주 잊곤 합니다. 집에서는 열심히 하는 식전, 식후의 감사의 기도를 어째서 밖에 나가면 부담스러워하는 걸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거기엔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쑥스러움'입니다. 특히 같은 교우분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그 쑥스러움은 더욱 커집니다. 음식에 대한 감사함보다, 성호를 그으면서 기도 드리는 제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어떻게 비칠지 자꾸만 신경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무지함'입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리고, 주일미사를 매주 꼬박꼬박 드리지만 누군가 제게 천주교에 관해 물어 본다면 정말 자신 있게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이유가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자신감'의 부족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제 스스로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당당하게 드러낼 만큼 성실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마음 깊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식사가 시작된 지 채 5분도 안 돼서 타인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고 있는가 하면,자신을 낮추라 하셨는데 식사 중에 어느새 제 말만 더 많이 하고 있는 제가 어찌 식사 후에 태연하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요즘 저는 이른바 '덕밍 아웃'준비 중입니다. '덕밍 아웃'이란 자신이 '덕후'임을 여러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를 말하는 신조어입니다. '덕후'란 자신이 그 무엇을 열정적으로 사랑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한 '버스 덕후'청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버스를 미치도록 사랑한 사랑이었습니다. 버스의 역사와 종류뿐만 아니라 버스 손잡이 생김새까지 찾아서 연구하고, 나중에는 버스 박물관을 짓는 것이 꿈이 돼버린 그 청년을 보면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저도'하느님 말씀 덕후'가 한 번이라도 되어 보고 싶습니다. 말씀하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의미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그런 덕후 말입니다. 지금은 턱없이 부족한 제가 어느 자리에서라도 당당하게 식탁에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그런 날을 꿈꾸며 오늘도 저는 행복한 '덕밍 아웃'을 준비하며 하루를 시작해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다 내어주고
껍질 한 줌 남은
내 어버이의
촘촘히 꿰맨 심장
식을 줄 모르는 사랑.
저도 그 길을
따라갑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세뇌 -생명평화마을 대표 황대권-
....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는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특정한 국가관과 사회관을 갖도록 훈육된다. 그러다 그가 특정 사회집단이나 개인의 영향 아래 이전과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되면 세뇌되었다고 말한다. 보통 전자를 '교육'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를 '1차 세뇌'로 후자를 '2차 세뇌'로 규정한다.
세뇌를 통해 입력된 정보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지배집단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며, 비교적 최근에 입력된 정보가 과거의 것보다 영향력이 더 크게 작용한다.
1차 세뇌는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교육이 다 포함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불변의 조건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2차 세뇌는 범죄집단이나 극단적인 정치, 종교 집단의 자체 교육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재산을 다 잃고 가정마저 해체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2차 세뇌가 다 나쁜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만약 1차 세뇌의 내용이 지나치게 특정 사회집단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이를 시정하려는 2차 세뇌는 나름 정당화될 수 있다. 조선 말기에 수많은 민란과 신흥종교가 창궐했던 이유는 지배계급인 양반들에게 유리하게 짜여진 1차 세뇌의 내용이 업데이트되지 않고 착취 일변도로 나갔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의 지배집단은 1차 세뇌가 흔들림 없이 언제까지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언론과 방송은 1차 세뇌를 강화하는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내보낸다. 촘촘한 세뇌의 그물망 속에 갇힌 사람들은 주입된 정보의 내용이 원래 자기 것인 양 생각하면서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한다. 이와 함께 지배집단은 1차 세뇌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반사회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사회로부터 추방 또는 격리시킨다.
신생국가나 오랫동안 억압 상태에 있던 나라에서는 1차 세뇌와 2차 세뇌가 팽팽히 맞서 서로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일제로부터 풀려난 신생국가 한국은 극단적인 정치세력이 집권한 대단히 불안정한 사회였지만 지금까지 용케 1차 세뇌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 했겠지만 그 주된 원인은 분단 상황이다. 분단 상황 아래 대한민국 국민에게 평생 가해지는 1차 세뇌의 내용은 다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이며, 북한이 택한 공산주의는 인간을 불행에 빠뜨리는 최악의 정치이념이다. 또 하나는, 미국은 대한민국의 구원자이며,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은 인류가 따라야 할 운명의 정수이다. 따라서 북한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초강대국 미국을 따르는 것은 문명인의 의무이며 행복의 지름길이 된다.
여기에는 초강대국 미국이 망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안전하다는 믿음이 깔려 잇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나름 확실한 생존전략이라고 볼 수 있으나 지금까지의 공과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감안할 때 과연 계속 기대어도 좋은 전략일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대한민국의 발전은 일부 분단 상태에 기대어 이루어진 측면이 있으나 전체적인 대차대조표는 아무래도 심각한 마이너스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국부의 절반 이상이 분단 상태의 유지에 들어가니 아무리 그에 기대어 발전을 한들 바보 같은 짓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분단으로 인한 사회분열은 한국 정치를 늘 1차원적 상태로 붙잡아두고 있다. 경제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저급한 정치는 주로 분단 상황에 기인한다. 다음으로 미국 문명이 과연 인류 문명의 정수로서 인류가 기꺼이 따라야 할 모델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미국 문명이 개인의 해방과 기술의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많은 나라들이 미국이 짜놓은 판 위에서 극도의 경쟁을 벌인 결과 지구 생태계가 파괴되고 그와 더불어 인성마저 해체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인류가 도달한 최고의 문명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꾸로 문명의 소멸을 걱정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세뇌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얘기를 아무리 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21세기에 온전히 살아남으면서 후손에게 지속 가능한 세계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2차 세뇌가 필요하다. 그 내용을 몇 개의 키워드로 표현하면 공존, 저성장, 생태적 순환 등을 들 수 있다.....
경향신문 2016년 4월 26일 오미피니언 흙과 문명"세뇌"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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