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동 성당(대전서부지구)
본당 설립:2002.1.29/주보성인:세례자 성요한
+요한복음. 10,27-30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말씀의 향기>
성소를 살고, 성소를 키웁시다! - 이의현 베드로 성소국장
성소(聖召),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에 순명하며 살아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인 착한 목자의 비유처럼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를 따라갈 때 생명이 보장되듯 말입니다. 양들은 목자를 따라 푸른 풀밭에서 주린 배를 채우고 물가에 인도되어 목마름을 채웁니다. 목자의 인도로 안전하게 무리를 지어 더 좋은 먹이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 한눈이 팔리거나 방심하여 목자를 따르지 않고 무리를 떠나게 되면 들짐승의 먹잇감이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복음의 비유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의 처지 또한 양과 같음을 깨닫습니다. 매일매일, 순간순간의 생활에서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건네주십니다. 거룩한 삶으로 끊임없이 초대하시는 생명의 길을 걷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듣고도 방심하고 변화되기를 주저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 세속에 물들게 되어 하느님 앞에 나서기 부끄러운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은 우리가 들으려 노력할 때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 미사와 전례 생활을 통해, 그리고 희생과 봉사, 자선을 통해, 즉 이렇게 귀를 열려는 신앙의 노력을 통해 하느님의 음성은 우리의 지성과 감성, 양심, 이웃을 통해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습관과 의무가 아닌 진실한 마음오 신앙의 노력을 기울일 때 하느님이 거룩한 부르심, 성소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실현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우리는 매년 부활 4주일을 성소주일로 지내며 나 자신의 성소를 깊이 생각하고 하느님의 음성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기를 다짐합니다. 특별히 성소주일은 사제와 수도자, 선교사들의 성소 증진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다짐한 사제, 수도자,선교사들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또한 사제,수도자,선교사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인 성소자들이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도록 합시다. 나아가 젊은이들이 신앙을 외면하고 사제,수도자 성소가 급속히 줄어드는 이때에,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경제적 성공에 연연하기보다 신앙의 가치에 중심을 둔 생활을 하여 사제,수도자 성소가 더욱더 많아지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시다. 우리 또한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충실하며 자녀들과 본당의 어린이,중고등부 학생들을 사제,수도 성소자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데 앞장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10여 년 대전교구 사제성소의 풍성함에 취해 마음 놓고 한눈팔았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며 지금부터 다시 성소자 발굴과 육성에 교구민들이 다 함께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2016년 요한복음의 해
요한복음 이해하기(3)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복음의 저자에 관하여 복음서 안에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없다. 그런데 복음서에 따르면 저자는 목격증인이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제자가 '요한복음'이라는 복음서의 이름대로 사도요한과 동일 인물인지는 복음서의 내용만으로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복음서가 사랑받는 제자의 목격 증언에 바탕을 둔 기록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제자는 예수님의 사건과 말씀을 상기하고 믿으면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증언한 본래 전승자이며, 그(사랑받는 제자)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복음서(1장~20장)를 엮었을 것이고, 후대에 또 다른 제자가 부록(21장)을 덧붙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의 제자들 혹은 공동체에 의해 사도적 전승을 따른 정경으로 재확인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담긴 저자의 관심
요한복음의 저자는 왜 자신을 밝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가 복음서를 저술한 목적대로 복음서를 읽는 이들의 관심이 저자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집중되어야 하고 또 그분의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믿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이 예수님을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것인 만큼 저자가 말하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메시아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예수님과 관련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내주신 외아들, 즉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은 이들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의 삶은 마치고 미래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저자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그 믿음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한 4,1~42)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를 통해 믿음의 성장을 보여준다.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유다인'으로 칭하지만 점층적으로 '선생님', '예언자', '그리스도'그리고 마침내는 사마리아 여인뿐 아니라 그 여인의 증언을 통해 사마리아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며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믿음의 성장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그가 '믿음'이라는 명사를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는 반면 '믿다'라는 동사를 98차례나 사용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정된 명사와 대조적으로 동사는 움직임이 있는 역동성을 담고 있다. 저자가 역동성을 가진 '믿다'라는 동사를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점차 성장하는 믿음의 역동성이었을 것이다.
-대전교구 사목 기획국-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05)>
동전을 금화로 만드는 법
결혼한 지 3년 된 부부.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한 번도 제대로 된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다음 주말에는 여행 한 번 가자고 제안합니다.
남편: 여행?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아내:우리 둘만의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남편:조금만 참아. 내가 이번 일 끝나기만 하면 그땐 꼭..
얼마 후, 남편이 드디어 바쁜 일을 끝마치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여행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곤란한 듯 말했습니다.
남편:여보, 여행은 다음에 가자.
아내:왜요?일 끝내면 가기로 했잖아요.
남편:당신도 내가 사업 새로 시작한 거 잘 알잖아?
아내:하지만..
남편:딱 3년만 기다려. 사업이 자리 잡히면 내가 그땐 유럽여행 보내줄게.
3년이 지났습니다. 사업도 제법 번창해서 이제 생활에 여유도 좀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다시 여행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내:이번엔 꼭 가는 거죠?
남편: 저기..딱 2년만 기다려. 이번에 이 중요한 일 하나만 딱 끝내고 나면 그땐 정말 세계 일주 꼭 가자고..
짐작하시다시피 2년이 지나서도 이 부부는 세계 일주는커녕, 가까운 동네 뒷산에 마저도 놀러 가지 못했습니다.
때가 되면 잘 해주겠다는 사람의 약속처럼 허망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
어느 때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장거리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하나둘 모으는 동전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에서 생길 때마다 바로바로 아낌없이 써야 빛나는 금화입니다.
지금 당신은 마음의 주머니에서 어떤 사랑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까?
혹시 무겁게 동전만 쌓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아지랑이 흙 부벼
싹 틔우고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 불어
피워낸
연분홍 복사꽃
작은 새가 전하는
한 송이 꽃.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 마당>
요한복음 필사를 마치고
내 아내는 성서 쓰기의 명인이다. 신. 구약 전권을 세 번쓰고 현재 네 번째 쓰고 있는 중이다. 나는 왜 그렇게 열심히 쓰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막상 경험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훌륭하고 대단한 일인지 가슴에 사무치도록 느껴진다. 존경할 만하다.
아내가 성서 쓰기를 권유할 때마다 핑계를 대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었는데..
금년 본당의 사목지표가 '요한복음 필사하기'로 정해지고 성물방에서 쓰기용 노트를 판매했다. 그래서 그것을 구입은 했지만 필기구를 탓하며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갑자기 만년필로 써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대형 문구점에 만년필을 사러 갔다. 가격은 2만 5천 원부터 몇십만 원 이상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하지만 아내가 비싼 만년필에는 눈길도 주지 못하게 했고 몇만 원짜리 만년필은 눈에 차지 않아서 그냥 잉크만 사 가지고 왔다.
그냥 볼펜으로 처음 몇 장은 썼다. 그러던 중 서울의 손녀가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갔었는데, 진료 후 장난감을 사러 들어간 완구점에서 펜촉을 1개 천 원씩 4 개식 샀다. 집으로 돌아와 예전에 딸이 쓰던 펜대에 꽂고 잉크를 찍어 요한복음을 한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이 얼마만에 써 보는 펜글씨인가? 중학교 이후니까 45년도 더 된 것 같다. 처음엔 잘 안됐지만 집중하며 써 내려갈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마치 주님의 은총처럼 느껴졌다.
성서의 구절은 미사를 통하여 단편적으로 이해는 했지만, 전체적인 이해는 부족했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동안 너무 공부에 게을리하지 않았었나 반성해 본다. 언제나 입으로는 '주님! 예수님!' 하면서도 사회생활과 일상생활은 성서 속의 유다인이 아니었나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갑자기 성서 쓰기가 재미있게 느껴졌다. 늘 작은 행복을 주시는 주님, 예수님! 감사합니다.
-송정근 토마스/천안 성정동 성당-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나태주
평생을 시골과 소도시 공주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정년 퇴임한 나태주 시인은
한때 병원 중환자실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을 만큼 중병을 앓았었다.
병석에서 생사의 기로에 선 자신보다 곁에서 간호하는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이 더 컸기에 그 마음을
하느님께 하소연하며 기도하는 내용의 시를 마지막 편지처럼 썼다.
그리고 아내는 그 시에 답장을 썼다.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느님,
제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고요.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에 없었던 여자이지요.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이지요.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숙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아내의 답글"
너무 고마워요, 남편의 병상 밑에서 잠을 청하며
사랑의 낮은 자리를 깨우쳐주신 하느님,
이제는 저이를 다시는 아프게 하지 마시어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죄로
한 번의 고통이 더 남아 있다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것이라면,
이제는 제가 병상에 누울게요.
하느님, 저 남자는 젊어서부터
분필과 함께 몽당연필과 함께 산,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시에 대한 꿈 하나만으로
염소와 노을과 풀꽃만 욕심내 온 남자예요.
시 외의 것으로는 화를 내지 않은 사람이에요.
책꽂이에 경영이니 주식이니
돈 버는 책은 하나도 없는 남자고요.
제일 아끼는 거라곤 제자가 선물한 만년필과
그간 받은 편지들과 외갓집에 대한 추억뿐이에요.
한 여자 남편으로 토방처럼 배고프게 살아왔고.
두 아이 아빠로서 우는 모습 숨기는 능력밖에 없었던 남자지요.
공주 금강의 아름다운 물결과
금학동 뒷산의 푸른 그늘만이 재산인 사람이에요.
운전조차 할 줄 몰라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남자예요.
승용차라도 얻어 탄 날이면
꼭 그 사람 큰 덕 봤다고 먼 산 보던 사람이에요.
하느님, 저의 남편 나태주 시인에게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좀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아름다운 시로
당신 사랑을 꼭 갚을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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