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6년 주보

부활 제5주일 2016년 4월 24일(다해)

모든 2 2016. 4. 24. 23:02

천안 신부동 성당(천안 동부지구)

본당 설립:1977.10.5/주보성인: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  요한 복음. 13,31-33.34-35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유다가 방에서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의 향기>

 

'새 계명]을 칼처럼 물처럼 사신 두 신부님 - 윤인규 라우렌시오 대흥 봉수산 성지 전담

 

  우리 대전교구에는 선종일이 11월 2일 '위령의 날'인 신부님이 두 분 계시다. 1982년 수품 8개월 만에 대흥동 본당 보좌로 계시다 교통사고로 선종하신 신양수 바오로 신부님과 수품 47년째가 되던 2004년에 노환으로 선종하신 백남익 디오니시오 몬시뇰이다.

 

  두 신분님은 정반대의 성품을 지니셨던 분들이다. 신부님에 대한 고별식 때 김영교 베드로 신부님은 "그가 언제나 옷맵시를 정갈하게 차려 애로를 간직했던 것처럼 영혼도 늘 때 묻을세라 털어내고 손질하고 있었겠지!"라고 추도하셨다. 과연 그랬다. 신 신부님은 젊은 외모만큼이나 성품도 정갈하다 못해 칼칼했다. 부러지면 부러졌지 휘지 않는 분이셨다. 그래서 사제직도 굵고 짧게 마치신 것 같다. 반면 백 몬시뇰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8 [89],2 [1])라는 사제 품성구에서 보듯, 청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다 들어주시려다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못해 사람들한테 타박을 듣던 분이셨다. 대흥동본당주임으로 계실 때 회갑을 맞으셨는데, 당시 수원교구장 김남수 안젤로 주교님께서 "백번이면 백 번 모두 남에게 이로움을 주시려 한 분의 '백남익' 신부님입니다."라는 축사로 성당을 웃음으로 채우셨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베드로에게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5,52)고 하셨지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마태 10,34; 루카 22,36) 고도 가르치셨다. 그렇다. 칼은 '남을 것과 사라질 것'을 가르는 무기이거나 도구이다. 신양수 신부님께서는 신학생 때부터 하느님이 아닌 것이나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새 계명'을 곧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에 못지않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골자계명을 빼고는 모두 칼처럼 끊어내던 분이셨다.

 

  백 몬시뇰께서는 요한복음의 "물독에 물을 채워라."(2,7)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3,5)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4,14)라는 말씀을 사신 분이다. 그래서 백 몬시뇰께서는 피정이나 특강 때 어떤 주제를 받더라고 한결같이 '사랑의 새 계명'을 선포하셨다. 몬시뇰께서 외치며 실천하신 '사랑의 새 계명'은 상선약수(上善若水)나 수오훈(水五訓)처럼 하느님을 향해 멈추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이웃을 신명나게 하시고,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최대한을 선택하시며, 세상의 평판이 어떻든 겸손하게 변함없이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새 계명'은 두 신부님들처럼 '칼 같은 순교신앙'과 '물 같은 하느님의 자비'로 실천해야 할 사랑의 계명이다. 

 

 

2016년 요한복음의 해

요한복음 이해하기(4)

 

공관복음서들과의 관계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에는 직접적으로  복음서를 작성한 목적을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 세 복음서도 근본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분을 믿음으로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관복음들과 달리 요한복음은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인상과 분위기, 짜임새를 갖고 있다. 초대교회에서도 요한복음을 영적복음이라 하여 공관복음과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일치점과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예수님의 공생활 과정과 기간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먼저 갈릴래아에서 머무르시다가 유다 지방으로 가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잠깐 머무르시다가 수난과 죽음, 부활하시는 것으로 끝난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여러 지방으로 자주 옮겨 다니시고, 유다 지방 특히 예루살렘에 오래 머무르신다. 그리고 공관 복음서에서는 공생활중에 파스카 축일을 한 번 지내는 것으로 나오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 축일을  여러 차례, 즉 여러 해 지내신 것으로 언급된다.(요한 2,13:5,1:7,10:12,12 참조)이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이 적어도 2-3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주 활동 지방이 갈릴래아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주 활동무대가 예루살렘인 것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다.

 

  ② 문체와 구성방식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여러 가지 짧은 이야기를 한데 모아 놓거나 간단한 말씀이 곁들여진 기적이야기로 된 작은 단락들이 주를 이룬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들과 그분이 일으키시는 표징들을 선별해서 대담이나 설교의 방식으로 길게 다루고 있다.

 

 ③ 기적에 대한 보도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들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자료를 독자적으로 선택할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들 안에는 없는 기적들을 전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공관복음들과 구분된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예수님의 세례, 첫 제자들의 소명,성전정화,고관 아들의 치유, 중풍병자와 눈먼 이를 고쳐주신 기적, 호숫가에서 빵을 많이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논쟁, 베타니아에서 한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드린 일화, 수난과 부활을 둘러싼 전개 등은 공관복음들과 공통으로 다루고 있는 일화이다.

 

  그러나 공관복음에는 등장하지만 요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는 사회들도 있다. 광야의 유혹, 거룩한 변모, 성찬례 제정, 겟세마니에서의 고통 등 공관복음들이 다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공관복음에 없는 새로운 행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가나 혼인 잔치, 니코데모와의 대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라자로의 부활과 뒷이야기,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일 등은 요한복음이 독자적으로 다루고 있는 예수님의 일화이다.

 

-대전교구 사목 기획국-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06)>

 

 페르시아의 흠과 영혼의 구슬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나는 정말 완벽한 사람을 바라는 건 아니야. 그냥 평범한 사람이면 돼."

 

그런데 이렇게 말한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고 나면 다음과 같이 투덜대곤 합니다. "아, 세상에 정말 평범한 사람 만나기가 이렇게 힘든 거야?"

 

이 말은 결국 자신이 평범한 사람을 어딘가 특별히 부족한 부분이 없는 무난한 사람으로 착각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디가 특별히 모자람이 없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우리가 '완벽한'사람이라 불러야 합니다.

 

사랑은 완벽하기 때문에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완벽해지는 것 또한 아닙니다. 사랑은 완전해졌을 때 베푸는 일반적 혜택이 아니라, 자신의 불완전함으로 다른 사람의 불완전함을 감싸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완벽하지 못함을 탓하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 또한 상대방에게 사랑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본인도 '크론병'이라는 질환을 앓고 있으면서도 소아과 의사로 살다가 나중엔 중증 환자들의 심리적 치유에 최선을 다한 '레이첼 나오미 레멘'의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란에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양으로 카펫을 짤 때 의도적으로 흠을 하나 남겨 놓습니다.

이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합니다. 인디언들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살짝 깨진 구슬 하나를 의도적으로 꿰어 넣습니다.

이것을 '영혼의 구슬'이라고 부릅니다."

 

한 치의 흠도 없는 양탄자는 결코 편안한 양탄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던 사람들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한 점의 흠집도 나지 않는 구슬로 꿰어진 목걸이에는 '영혼'이 깃들 수 없음을 알았던 사람들의 겸손 또한 놀랍습니다.

 

사랑하기 좋은 5월이 코앞에 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페르시아의 흠'에 기뻐할 때입니다. 살짝 깨진 구슬 목걸이를 상대방에게 걸어줄 용기가 필요할 때입니다. 넘쳐서 준 사랑 말고, 부족함으로 서로를 채우는 정말 '평범한' 사랑이 꽃피울 5월이 다가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주님

서로 사랑하라 하셨으니

 

빛을 보고

향기를 맡으며

순리를 따르고

바름으로 살아내는

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겠습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일분 지혜(읽고 1분 동안 생각하기) -앤소니 드 멜로-

 

기적

 

어떤 사람이 스승의 뛰어난 명성을 직접 확인하려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갔다.

 

"당신의 스승께서 어떤 기적들을 행하셨습니까?"

그가 한 제자에게 물었다.

 

"글쎄요, 기적 천지지요. 당신 나라에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시면 그걸 기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면 그걸 기적으로 생각합니다."

 

운명

 

자기 운명에 대해서 불평을 하는 부인에게 스승이 말했다.

"부인의 운명을 만드는 사람은 바로 부인 자신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자로 태어난 것은 분명히 제 책임이 아니잖아요?"

 

"여자로 태어난 것은 운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숙명입니다. 운명이란 당신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그것으로 무엇을 이루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짜

 

스승은 졸업 증서나 학위 따위에 감동되는 적이 없었다.

그는 증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한 번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새가 노래하는 것을 들을 귀가 있다면, 그 새의 자격 증명서를 볼 필요가 없다."

 

 

계시

 

이웃 수도원에서 수도자들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자 스승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스승이 어떤 무리에건 책임지고 사랑과 화목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번에 스승은 그 실력을 보여주었다.

"어느 때고 여러분이 누구하고 있거나 또는 누구를 생각할 때에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사람도 죽어가고 있다고, 그러면서 동시에 여러분이 말하고 있는 그 말의 진실을 체험해 보십시오. 여러분 각자가 이를 실천할 것을 동의한다면, 쓸쓸한 관계가 사그라지고 서로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하고서 그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