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명동 성당(대전 북부지구)
본당 설립:2014.1.15/주보성인:가브리엘 대천사
+ 요한복음. 21,1-19 <또는 21,1-14>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시몬 베드로와'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지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질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버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말씀의 향기>
사도들의 증언 - 김재철 요한 보스코 덕산 주임
오늘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덧 아침이 되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전해 주는 귀중한 주님 부활 소식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최초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함께 빵을 나누신다. 불신앙을 드러내었던 토마 사도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데 숨을 불어넣으시고 함께 대화하시고, 함께 자리에 앉으시고, 접촉하시고, 함께 식사를 나누신다. 살아계심을 제자들은 분명 목격하고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소중하게 전해 준다.
부활시기에 우리들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증언과 활동을 또한 듣게 된다. 오늘 독서에서 그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최고 의회에 세워 놓자 대사제가 신문하였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고?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 하자 베드로와 사도들은 대답하였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묵시록에서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에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들도 사도들이 증언으로 전해진 주님 부활 소식에 놀라움과 동시에 경의를 표하며 엎드려 하느님을 찬미하자.
2016년 요한복음의 해
요한복음 이해하기(2)
성경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쓴 책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성경의 원저자는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원저자가 하느님일지라도 본문마다 쓰여진 시기, 장소, 환경, 목적, 저자 등에 따라 신학이나 표현양식 등이 특징적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원저자인 하느님께 진리를 쓰시지만 다양한 사람을 성경집필의 도구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글씨를 쓰더라도 종이의 재질이나 볼펜의 색에 따랄 다르게 쓰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요한복음의 해를 보내며 요한복음이 갖는 다양한 특징들을 알아보는 것은 더 올바르고 깊은 묵상을 하는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영적 복음서
모든 복음이 성령의 감도로 쓰여진 말씀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공관복음서들을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요한복음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영적인 복음서라고 강조하여 말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요한복음을 성령의 복음, 즉 정신적. 영적 복음이라고 불렀다. 공관복음서들의 복음사가들이 사실에 관한 것, 즉 예수님의 행적이나 가르침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사실들 안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 즉 영적인 부분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을 묵시록의 네 마리 동물들 가운데 '독수리'에 비유하는 이유도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들에 비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나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기 깊은 의미,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차원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일까?
요한복음이 담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차원은 요한복음의 목적에 부합되는 특징이다. 요한복음이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라고 본문에 직접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한낱 허울에 불과할 뿐이라는 영지주의적 이단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 즉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요한복음이 저술되던 시기의 환경은 영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단설이 심각한 위험을 야기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 이단설에 대항하여 공관복음들이 다루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 가르침 등이 담고 있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를 밝히기 위해 집필한 것으로 본다.
-대전교구 사목 기획국-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04)>
천국이란 이런 곳이다
주고받기 대신 주고 또 주기
열심히 돈을 모아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하와이 여행길에 나선 중년 부부, 며칠간의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아쉬운 발걸음으로 귀국하던 날이었습니다. 공항까지 부부를 태워다 주기 위해 마이크로버스 한 대가 도착했습니다.
버스에 오르자 다른 관광객들은 없고 부부만 달랑 앉게 되었습니다. 공항을 향해 가는 동안 버스를 운전하는 관광가이드 기사님과 중년 부부는 자연스럽게 인사말과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죠.
기사:여행 재밌으셨어요?
아내:그럼요, 너무너무 멋졌어요.
남편:기사님이 부러워요.
기사:네? 제가 왜요?
남편:이런 멋진 곳에서 일하면서 돈도 벌고..
아내:그러게요, 천국이 따로 없겠어요.
기사:허.. 잘 모르시는 말씀이세요.
부부:네? 무슨 말씀이신지..
기사님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이렇게 한마디 했습니다.
기사:아무리 좋은 곳도 돈 벌러 가면 그곳이 지옥이고,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곳도 돈 쓰러가면 그게 천국이에요.
손님들은 돈을 쓰러 왔으니 여기가 천국이고, 전 여기서 돈을 벌어야 하니 여기가 곧 지옥인 셈이죠.
우리 삶에도 기사님의 이 기막힌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요?
"인생이란 멋진 여행지에 사랑을 벌려고 하루를 보내면 그게 곧 지옥이고,
사랑을 베풀기 위해 하루를 보내면 그게 곧 천국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전적으로 내 선택에 달린 것 같습니다.
작은 사랑이라도 그 사랑을 아낌없이 쓰려는 사람에게 인생은 천국이지만, 사랑을 얻으려고만 하는 사람에게 인생은
웃을 일 하나 없는 지옥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대기의 바람
한 줌 한 줌
들숨 날숨
우리의
오늘 같은 생명
예수 부활하심의
증거입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 마당>
광야는? (「광야에 선 인간」, 송봉모)
언젠가 신부님 강론 중에 "광야를 원하시나요?" 하는 질문에 "예! 원합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모두가 광야를 거쳐야만 믿음의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는 말씀으로 이뤄집니다.
IMF의 타격으로 남편의 조그만 사업장을 닫게 되었습니다. 자녀 넷을 두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걱정하고 전전긍긍하며 살다가, 어렵게 장만한 40평대 아파트의 대출 이자가 버거워서 전세가 싼 상가 2층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딸은 전에 다니던 본당에서 복사를 해야 된다고 자전거를 타고 빙판을 가로지르며 다녔습니다. '집이 춥다', '구조가 이상하다.''상가 주변이라 시끄럽자'등등 아이들의 불평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출애굽 여정에서 시나이산으로 가면서 야곱의 후손들이 불평하는 소리같이 느껴졌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살아야 했던 그 시절 출애굽의 불평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시간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까? 출애굽의 모세가 된 듯한 상황에서 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와 어렵게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늘 한 달 한 달 지출을 걱정하며 지내는 살얼음판의 시간이었습니다. 기도하러 기도회를 다니며 목놓아 주님께 의탁하였습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 코린 6,2)라는 말씀에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 속에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본당 활동을 하고, 기도회 다니며 부지런히 생활하였습니다.
그 결과 10여 년 만에 잃었던 것을 찾게 되는 안정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3-34)는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지면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어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광야의 삶을 통하여 말씀으로 성령께서 함께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들에게 자비와 사랑으로 함께 하신 임마누엘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광야가 주는 고통과 시련은 한 인간이 자기 발로 서기 위한 그리고 하늘과 진리를 섬기기 위한 교육과정이다.'라는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체험시켜 준 지난 세월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드립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속에 고통(광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은총의 시간을 허락해 주소서! 아멘"
-전애자 아가다/탄방동 성당-
투표도 영성이다. -'산 위의 마을' 박기호 다미아노 신부-
부활은 반대자들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고 오로지 제자들에게만 가능했던 영적 체험이었다.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 일화의 공통점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덤가에서, 엠마오 귀갓길에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도 몰랐다. '마리아야!' 불러 주었을 때, 빵을 축복하시고 떼어주었을 때, 고기잡이 기적이 재현되었을 때 비로소 알아본다. 영적인 눈이 깨이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험을 회상시키는 방법으로 영의 눈을 뜨게 하셨다. 부활은 이해가 아니라 영의 눈으로 보는 발견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다면 우리에게 '영적인 눈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사물의 내면을 보고 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을 영성(靈性)이라고 한다. 인도인들은 눈썹 가운데 '반니'라는 점을 찍는다. '영성의 눈, 신의 눈'으로 산다는 힌두교 이즘이다. 제자는 영의 눈으로 주님을 만나고 현존을 느끼며 뜻을 알고 따른다. 영성은 마음과 정신에 탑재된 믿음의 하드웨어다. 영성으로 살아가면 신앙이 되고 육신의 욕구로 살아가면 우상이 된다. 날마다 기도하고 성체성사를 모시고 살아가는데도 주님의 현존과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어떤 큰 힘'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일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 풍요와 편리한 생활과 고품격의 소비생활을 부추기고 인간의 본성적 욕구와 욕망을 예상케 하는 마케팅을 악령이라고 한다. 악령은 보이지 않지만 힘을 행사한다. 악령의 최고 능력은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다.
명품과 럭셔리한 용품과 고급 아파트와 승용차, 사치스러운 레저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보여주기만 한다. 또한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들에게 부자 정당에 투표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신에 대해 중산층보다 못할 게 없다고 믿게 만든다. 지금은 조금 어렵게 살아가고 있지만 머지않아, 또는 내 자식만큼은 부자가 될 것이고 상류층이 될 것임을 로망하게 한다. 나는 미래의 상류층이므로 지금부터 보수와 부자 정당의 지지자가 되게 한다. 그래서 권력과 가진 자의 편을 들고 종편 방송을 즐겨본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 셀프 마케팅이다. 영의 눈이 감겨 있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악령이 가장 잘 활용하는 논리는 신앙과 정치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 악령 들린 자가 일어나서 "왜 우리를 간섭하시는 겁니까?"하고 대들었다. 예수님은 "악령아, 썩 나가거라!"추방하셨다. 오늘날 왜곡된 정치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다. 심지어 거룩한 성전에 주일미사 오는 신자들 가운데도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이 본당마다 한두 명씩 있다. 예수의 진실한 제자라면 내 안에 속삭이는 악령, 내 곁에 앉아 있는 악령들린 교우를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되고 즉시 추방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본당 신부는 성전 입구에서 성수를 뿌려 악령을 추방할 의무가 있다.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니 악령아. 썩 나가거라!"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한 생명이시다. 세상에서 나와 내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아름다운 삶과 가치 구조를 만드는 것은 신앙만으로는 부족하다. 민주 국가에 살면서 정책과 정당을 식별 지지하는 정치 행위는 온전히 지혜이며 영적인 것이다. 투표는 영성의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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