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6년 주보

주님 수난 성지주일2016년 3월 20일(다해)

모든 2 2016. 3. 20. 22:30

변동성당(대전남부지구)

본당설립:1986.8.18/주보성인:한국 순교 103위 성인

 

+ 루카 복음 22,14-23,5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예수님께서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을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그러나 보라,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사람의 아들을 넘기는 그 사람!"

사도들도 자기들 가운데 그러한 짓을 저지를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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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떤 하녀가 불 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말씀의 향기>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길  - 이원순 마티아 논산부창동 주임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비가 담겨 있는 가장 거룩한 한 주간을 맞았습니다. 특별한 은총으로 가득차 있는, 이 성주간의 시작인 오늘,우리는 루카에 의한 긴 주님 수난기를 듣게 됩니다.

 

  좀 더 잘 듣게 하기 위해서,다른 주일과는 달리,몇 사람이 역할을 나누어 입체적으로 현장감 있게 봉독합니다.제가 사제가 된 이후에는 항상 예수님  역할을 맡았지만,신학생 때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말을 크게 외쳐야 하는 군중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전례연습 때마다 꼭 지적되는 말이,"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말을 크게 외쳐야 하는 군중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전례연습 때마다 꼭 지적되는 말이."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함께 맞추어 아주 큰 소리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수난기 봉독이 시작되면,큰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간혹 옆에서 아주 크게 외치는 신학생이 더러 있었는데,지금 생각해보면 그 신학생이 잘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신학생은 당시 군중의 역할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만일,당시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힘없이 아주 작게 말했다면,아마도 빌라도는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록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음성은 작을지라도,생활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다시 모욕하고,십자가에 못 박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예수님은 군중 앞에서 말씀하실때나 기적을 베푸실 때에 사랑과 힘이 충만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왜,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돌아가셨을까요? 그것도 온갖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면서 말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는 없었을 까?"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한 번쯤 묻게 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신비는 우리가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마음속 깊이 예수님의 사라을 느끼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과 같음"(필리 2,6)을 즐기지 않으시고,천상에서 지니고 계시던 모든 혜택을 비우시고,"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시어,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고...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9-11)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백성들이 예수님과 함께,걸어가야 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고해성사 다시 보기(7)>

 

보속,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의 체험

 

  고해성사의 마지막 단계는 사제에게 받은 보속(補贖)을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부 신앙인들은 경중을 떠나 보속을 '해야 하지만 못해도 그만'으로 여기는 듯싶다. 하지만 고해성사의 완결을 위하여 올바로 보속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오늘날과 같은 개별적인 참회 예식이 시작되기 전(적어도 6세기까지)에는 교회는 주교를 중심으로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공적 참회 예식'을 거행하였는데,이 참회에서는 참회자가 매우 무거운 보속을 다 마치지 않으면 용서가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참회자를 위한 '공동체의 기도'와 함께 '보속'을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는 필수조건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해성사 신학에 따르면 죄의 용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자비'에 근거하여 고해사제의 직무 수행(사죄경)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지만 죄를 용서받은 이후에도 그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는 여전히 남아 있다. 때문에 용서받은 사람이 다시금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보상'하거나 '속죄'해야 한다. 그래서 보속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죄가 남긴 어두운 그림자까지 지워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죄의 결과,곧 하느님과의 단절 혹은 그분의 사랑을 거부함으로써 생긴 이웃과의 관계 손상 및 단절,자기 소외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바로'보속'인 것이다. 그렇다면 보속을 어떤 마음으로 실천해야 할까?

 

  "우리의 보속,곧 우리 죄 때문에 치르는 보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 처지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다.'(필립 4,13)..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보속한다. 이러한 보속들은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한 번에 영원히 속죄하신 그리스도를 닮도록 도와준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60항)

 

  「교리서」에 따르면 용서받은 죄인의 속죄 행위(보속)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관계성 안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보속의 긍정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 보속은 용서받기 위해 우리가 억지로 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보속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깊은 일치 안에서 성실히 행할 때,보속은 우리의 빈약한 행동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운 그리스도의 빠스카 업적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한편,누군가에게 경제적.윤리적 피해를 끼쳤을 경우,고해소에서 그러한 갈등 상태와 죄를 고백하였다고해서 모든 문제와 어려움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 용서받은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가 화해해야 한다.또한 보속으로 요구된다면 자캐오의 경우처럼 피해를 끼친 사람에게 적당한 방법을 찾아 보상해 주어야 한다.(루카19,8) 이것이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고백의 종착점이다.)

 

-송인찬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성사신학)-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02)>

 

1:29:300의 법칙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미국의 한 여행보험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주로 큰 사고들을 분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약 5,000건의 큰 사고를 분석하면서 놀라운 법칙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인리히는 과학적 통계와 분석을 통해 자신의 법칙을 '1:29:300'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로 정리했고,그 법칙은 그후 '하인리히의 법칙'혹은 '1:29:300의 법칙'이라 불리며 재난예방에 매우 유용한 법칙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그 법칙을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번의 커다란 사건은 애초에 300번의 사소한 증후를 더러낸다. 그런데 그 증후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후 29번의 좀 더 규모가 큰 사건들이 발생하고,그것마저 무시하면 결국 1번의 돌이킬 수 없는 대형 사고가 생긴다."

 

  이 법칙이 큰 공감을 얻게 된 것은 우리가 겪게 되는 인생의'실패'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작은 문제들을 사전에 인지하지 않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되는 건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보이는 큰 사건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한 '하인리히'라는 사람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인리히와는 다른 방식으로 '1:29:300의 법칙'을 설명해 주시는 더 대단한 분이 한 분 더 계십니다.

 

  그분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작은 사랑이라도 한 번의 실천으로 스물아홉 번의 사랑이 만들어지고,스물아홉번의 사랑은 결국 삼백번의 위대한 사랑을 만들어 낸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분의 이 가르침을 300번이나 듣지 않았고,29번이나 무시했기에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돌이킬 수 없는 한 번의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실수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고 그분을 따라 새롭게 태어나려면,이제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작은 사랑 하나라도 온 마음을 다해 실천할 때입니다. '1:29:300의 법칙'혹시 이 법칙이 부활의 비밀을 알려 주는 신비한 공식은 아닐까요?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믿음의 길 따라

오늘을 떠나면

내일 어디쯤에서

수난의 주님을 만나

쓰린 마음 감싸안고

목 놓아

울어보리다.

 

글.그림 이순구 (베데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