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6년 주보

사순 제 5주일 2016년 3월 13일(다해)

모든 2 2016. 3. 13. 21:30

 

신평 성당(당진지구)

본당 설립:1975.4.10/주보성인:성요한

 

+  요한 복음,8,1-11

 

  <너의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말씀의 향기>

 

죄 없는 자 -김기만 알베르토 천안 두정동 주임

 

  "아직도 우리 성당에는 착하고 훌륭해서 존경할 만한 신자들이 참 많아." 교회의 한 어르신께서 해 주신 말씀이다. 그러나 모든 분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선거철에 사회적으로 매우 알려진 한 사람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나도 천주교인이다.'라고 할 때 '제발 저런 사람은 신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신자와 성직자 사이에서 늘 좋은 감정을 갖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본당 신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꼴도 보기 싫다고 하시는데 사실 신부님께서도 꼴 보기 싫다고 하시는데 사실 신부님께서도 꼴 보기 싫은 신자들도 있겠지만 신자 입장에서 꼴보기 싫은 신부님도 계시거든요."하고 말씀하시던 할머니 신자 분도 기억한다. 소위 냉담하고 계시는 한 분을 만나 성당에 나오시라고 권유를 한 적이 있다. 그분은 "성사에 참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강론을 들으면서 복음 말씀은 강론 전체의 십 분의 일도 되지 않는 것 같고 거의 절반은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거의 절반도 자기 자라에 불과한 것을 보면서 '적어도 저런 사람이 성직자고 교회의 지도자라고 한다면 천주교에는 하느님이 안 계시다.'라고 생각하여 더는 다니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절실히 인식하기는 쉽지 않은 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자신을 되돌아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반성할 줄 모르는 정신구조를 가진 사람도 있는 듯싶을 때도 있다. 함부로 말하고 때로는 소수의 잘못한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나머지 사람들까지 다 그런 사람들인 것처럼 인격을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조차 없다. 나아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며 자신의 직무가 요구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싶기도 하다. 죄 많은 자가 죄 없는 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꼴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모습은 다르다. 죄를 지은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은 참회하여 용서를 청한 것도 아니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받아주시며 단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격려까지 하며 돌려보내신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의 증명이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하나씩 자신의 죄를 기억하며 손에 쥐고 있는 돌을 내려놓고 떠나간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참 많이 그리운 모습이다.

 

 

<고해성사 다시 보기(6)>

 

고백과 용서, 그 가슴 떨린 해방감

 

  창세기 첫머리에 하느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에게 물으신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또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도 물으신다.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하느님의 이 질문은 사람에게 그 어떤 정보를 원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아미 다 알고 계셨다. 그분이 기다리신 것은 '그들이 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는 것' , 곧 '완전한 고백'이었다. 하느님은 그들을 위해 그들이 다시 진실 안에 살 수 있도록 고백하기 원하셨으나 불행히도 그들은 하느님께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아담과 카인의 모습은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이기도 하다.

 

  고백은 내적 완성을 지향하는 인간이 지닌 하나의 욕구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더욱더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엉킨 실타래 같이 복잡한 죄에 대한 경험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가운데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성찰하고 결심하였다고 해서 고해소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고백할 죄가 있어도 어렵고, 고백할 죄가 없어도 어렵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제대로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경험과 노력이 필요한다.

 

  우리는 무엇을 고백해야 할까? 크게 다음의 세 가지를 점검하길 권한다.

 

첫째,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둘째, 나와 타인과의 관계이다.

셋째,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고해자는 이 세 관계를 면밀히 검토하여 현재 자신이 이 관계들 속에서 어떠한 상태(긍정적 혹은 부정적 상태인지)에 있는지, 어떤 관계가 자신을 불만족스럽게 하는지 또는 어떤 관계에서 자신이 죄책감을 가지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어떨게 고백해야 할까? 다음의 네 가지를 유의하자.

 

첫째, 빠짐없이 고백하라! 가장 고백하기 힘든 죄목을 먼저 고백하는 것이 현명하다. 다음번으로 미루지도 말고 창피하다는 이유로 특정한 죄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둘째, 자신의 죄를 고백하라!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하거나 다른 이의 죄를 대신 고백해서도 안된다. 자신이 의지적으로 잘못한 것을 고백하는 것이 기본이다.

 

셋째, 분명하게 표현하라! 애매하게 표현해서는 안된다. 애둘러 말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 하지 말고 사제가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범죄의 횟수나 정도 혹은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 등을 표현해야 한다.

 

넷째, 간략하게 고백하라! 분명하게 표현한다고 해서 세부적인 이야기까지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만일 사제가 질문한다면 솔직하고 성실하게 답해야 한다.

 

  고해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코 떠나시지 않는다는 사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끌어안으신다는 사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조건없이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하는 체험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피를 흘려 마련하신 화해의 성사를 통해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절절히 체험하는 이는 얼마나 복될까?

 

-송인찬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성사신학)-

 

 

<이충무의 행복나침반(101)>

 

 

바람이 전하는 러브레터에 답장 쓰기

 

한 걸음이라도 사랑이어라

 

 

  "연애편지는 역시 손으로 써야 제 맛이야!"

 

  얼마 전에 막을 내린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일종의 '추임새'를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극 중에서 '만옥'이를 짝사랑하는 '정봉'이가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연애편지를 쓰고 답장을 애타게 기다리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편지 안에는 한 사람의 애절한 열망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장면에서 편지지가 노트북으로 대체되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마음먹은 대로 쉽게 수정하거나 편집해서 메일을 보내고, 수신 확인을 하면서 답장을 기다렸다면.. 생각만 해도 참 삭막한 느낌입니다.

 

  손으로 직접 쓴 연애편지에는 쓴 사람의 마음이 흥건하게 묻어나 있습니다. 편지를 쓰면서 손에 땀이 나는 것은 펜에 힘을 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 한 자라도 잘못 전달될까 노심초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해마다 봄이 되면 정성스레 '레브 레터'를 쓰십니다. 멀리멀리 씨앗을 날려서 대지와 사랑하게 하고, 발 없는 꽃가루에 날개를 달아 꽃들이 새로운 생명을 갖도록 하십니다. 봄바람은 '덕선'이가 되어 부지런히 사랑의 편지를 세상 곳곳에 전달하기 바쁩니다.

 

  하느님께서 전해 주신 사랑의 편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답장을 쓰신 분이 계십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사랑 아닌 걸음걸이가 없으시고, 한 마디 한 마디 사랑 아닌 말씀 또한 없으신 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보니 컴퓨터 앞에 앉아 무미건조하게 하느님의 러브레터에 응답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손에 땀이 나는 것이 귀찮아 쉽고 빠르게 답장을 적으면서도, 수신 확인만큼은 매번 빠지지 않고 체크해 보는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문장은 모두 삭제하고, 자기 합리화의 구실만 과장되게 적어나가는 엉뚱한 러브레터를 그만 접고, 올봄엔 단 한 자라도 진심이 담긴 사랑의 고백을 해 보렵니다. 그게 바로 부활을 준비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용서와 화해

 

내 아이와 같이

너그럽고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

 

너를 나처럼

이해하는 것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