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31

이창동·홍상수·봉준호 영화 속 ‘신령한 존재’를 사유하다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영화평론집 낸 문학평론가 임우기 입추 지나고 가을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던 날 오후 서울 홍익대 앞 솔출판사에서 임우기 대표를 만났다. 그는 박경리 ‘토지’를 비롯해 ‘카프카 전집’, ‘버지니아 울프 전집’, 김성동의 ‘국수’ 등을 펴낸 유명 출판인이자,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자적 혜안으로 한국문학을 해석해 온 문학평론가이기도 하다. 최근 그가 이창동·홍상수·봉준호 감독을 다룬 첫 영화평론집 ‘한국영화 세 감독’을 냈다. 영화를 잘 보지 않고, 영화이론도 공부한 적 없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어느 식당에서 ‘기생충’ 오스카상 수상 뉴스를 보는데 동석했던 한 영화평론가가 유역문예론의 시각에서 봉 감독 영화평을 써 보라는 권유를 했던 게 우연한 계기가 됐어요.” ▲ 문학평론..

창작·번역 이중주로…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 지휘한다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한국문학번역원장 곽효환 시인 ▲ 끊임없이 문학적 활동과 시세계의 상상력을 확장한 곽효환 시인은 한국문학번역원장으로서 영역을 더욱 넓히고 있다. 곽효환 시인은 우리 시단에서 ‘북방’이라는 상징적 키워드를 발굴하고 개척해 온 선구자로 유명하다. 그동안 펴낸 네 살 터울의 4형제 시집 ‘인디오 여인’(2006), ‘지도에 없는 집’(2010), ‘슬픔의 뼈대’(2014), ‘너는’(2018)에서 그는 인류의 시원(始原)을 찾아나서는 기행과 편력을 통해 이면의 역사를 탐구했고, 서정과 서사의 균형적 결속을 통해 궁극적 자기 긍정의 주제를 담아 왔다고 할 수 있다. “저는 북방을 단순한 심상지리 차원이 아니라 기원, 사랑, 존재 등과 동의어로 생각해 왔습니다. 북방을 통해 역사..

실존의 심연에서 건져낸 언어…견고하게 빚어낸 문학의 주름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나희덕 예술의 시간들 ▲ 최근 에세이집 ‘예술의 주름들’을 출간한 나희덕 시인은 원래 제목을 ‘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시인의 눈으로 예술을 읽어 낸 작은 오솔길 같은 책이랄까. 더위가 일찍 찾아온 초하(初夏)에 서울 종로의 한 식당에서 시인 정현종 선생을 나희덕 시인과 함께 뵀다. 건강하신 스승의 말씀을 들으며 식사를 하는데 나 시인이 연필을 선물했다. 언제나 무언가를 들고 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좋아하는 그는 미국에 사는 한국인 목사가 목수가 되어 만든 연필을 바다 건너 구입해 스승과 친구에게 나누어 줬다. 순간 ‘연필’이라는 상징이 세 사람의 글쓰기를 환하게 이어 주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나희덕만이 만들어 내는 순간이다. 그의 첫 시집 ‘뿌리에..

생가 바로 옆에 집 지은 ‘후기 안도현’… 낙향 아닌 상향을 꿈꾸다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시인 안도현의 귀향 ▲ 안도현 시인은 40년 동안 전북 전주에서 살다가 지난해 고향인 경북 예천에 터를 잡았다. 왼쪽부터 이병초 시인, 안도현 시인, 유성호 교수, 박태건 시인. ●초로의 귀향, 새로움의 출발 안도현을 만나러 경북 예천으로 간다. 그가 40년 가까이 살았던 전주 쪽에서 이병초·박태건 시인이 출발했고, 나는 나대로 서울을 떠나 그가 새롭게 안착한 모천회귀의 공간에 닿았다. 예천을 가로지르는 내성천의 굽이를 천천히 바라보면서 그의 집에 들어섰는데, 커다란 유리창 안으로 그가 오수(午睡)에 빠져 있는 게 보인다. 그 고요에 압도당해 나는 전주 쪽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시인의 낮잠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그 고요는 그가 차근한 노동으로 마련했을 돌담과..

시조로 읊어내는 시대정신… 세상의 어둠을 걷어내다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이정환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 40여년간 시조시단의 한복판을 걸어오며 “시조는 숙명”이라고 한 이정환 시인은 지난 3월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임기 동안 현대시조의 역사를 정리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빼어난 문화민족은 저마다 고유한 정형시 양식을 계승해 왔다. 영미 쪽의 소네트, 한자 문화권의 한시, 일본의 와카나 하이쿠 등이 그 사례다. 우리의 경우에는 시조가 오랜 사랑을 받아 왔다. 그리고 시조는 지금도 왕성하게 쓰이고 읽히고 있는 현재형이다. 이렇게 우리의 운문 양식 가운데 거의 모든 것이 소멸했거나 다른 장르로 흡수된 데 비해 시조는 민족문학의 장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면면히 이어 가고 있다. 시조시단의 종가인 한국시조시인협회는 이러한 시조시..

예술의 경계 지우다 문학에 미술 입히다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문학과 미술 잇는 윤범모 시인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야심적 행사가 열리고 있다. 봄날 햇살 가득한 오후 참으로 오랜만에 덕수궁을 찾았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지인인 윤효 시인과 동행했는데, 윤 관장은 김인혜 학예연구실 근대미술팀장과 함께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김 팀장의 꼼꼼하고도 친절한 설명을 통해 이번 전시의 내용과 함께 1930년대를 전후로 한 한국 예술사의 빛나는 장면들을 충실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꽤 익숙한 문인들 사이로 가끔씩 돋을새김되는 생소한 이름의 화가들이 퍽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문학사와 미술사는 그렇게 한 몸이 되어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다. ▲ 미술평론가로서 미술계와 문단의 연결고리로..

詩 떠메고 봄 햇살 둘러메고 천생 시인, 천상에 들다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김형영 ‘시와 신앙의 삶 지난 15일 시인 김형영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다. 선생은 194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1966년 문학춘추로 등단한 이래 55년 동안의 시력(詩歷)을 쌓아 온 우리 시단의 대표 중진이다. 오랜 세월 ‘시’와 ‘신앙’이라는 두 바퀴로 조용조용 달려온 그의 정결한 생애를 두고 빈소에 모인 지인들은 깊은 추념과 안타까움을 나누었다. 시선집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문학과지성사)는 선생이 지상을 떠나던 그날 지상에 내려앉았다. 투병하던 당시 시인 스스로 그동안의 시집 10권에서 213편을 선정해 최종적으로 정본 작업을 완료한 시적 에센스가 영정 앞에 놓인 것이다. 비록 고인은 만져 보지 못했지만 그 책은 그 순간 선생의 몸이 되어 그가 천생..

여든셋 시인의 ‘창조적 긴장’ 그래서 웃을 수 있다 한국문학은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영원한 예술인 황동규 며칠 몰아쳤던 한파가 그치고 제법 포근해진 겨울날, 서울 사당동의 한 음식점에서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1938년생, 올해 여든셋이다.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64년 동안의 시력(詩歷)을 균질하게 쌓아 온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서 선생은 언제나 시단에 새로운 충격과 미학적 지평을 일관되게 부여해 온 ‘젊은 시인’이다. 이제는 노경의 삶을 은은하게 이루어 가면서 그만의 언어적 연금술을 균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쌓아 가고 있다.“벌써 그렇게 됐네요. 아마 서정시를 60년 이상 써 온 실례는 저 말고는 참 드물 거예요.” 한국 시사(詩史)에서, 아니 세계적으로도 그것은 선생이 거의 유일한 케이스일 것이다. ▲ 최근 한파가 다소 누그러진 겨울날..

북한·해외동포 작품까지 포괄… ‘한국문학 세계화’ 최전선에 서다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장 ▲ 지난 1일 열린 제1회 ‘스웨덴-대한민국 노벨상 메모리얼 프로그램’에서 만난 김사인(맨 오른쪽) 한국문학번역원장과 유성호(두 번째) 교수가 참석자들과 함께 서 있다. 야콥 할그렌(맨 왼쪽부터) 주한스웨덴 대사와 안데르스 헥토르 대사관 과학혁신참사관, 심하은 은행나무출판사 해외문학 편집장이 함께 문학세션에 참석해 시의 세계를 탐구했다. 지난 1일 이화여대에서 노벨문학상 120주년 기념으로 한국-스웨덴 노벨상 메모리얼 프로그램이 열렸다. 노벨문학상이 한국문학에 미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온라인 실시간 행사였다. 그 행사에서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잠깐 만났다. 오랫동안 한국 서정시의 빼어난 범례로서 ‘밤에 쓰는 편지’로부터 ‘어린 당나귀 곁..

한 권의 책은 예술이자 삶… 오늘도 또 다른 운명을 펼친다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45년째 책 만드는 출판인 김언호 ▲ 경기 파주출판도시 한길사 사옥에 있는 김언호 대표의 방엔 온갖 책과 자료가 넘친 다. 그는 자신의 일터를 ‘책 읽는 창고’라고 부른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서울 중구 한길사 ‘순화동천’에서 그를 만났다. 새삼 그를 만나기로 한 건 이번에 신작 ‘그해 봄날’이 나왔기 때문이다. ‘출판인 김언호가 만난 우리 시대의 현인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 책에는 한국 현대사의 최전선에 섰던 열여섯 분의 삶과 언어가 담겼다. 그 책에 관한 이야기, 걸어온 책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물론 김언호는 세상이 다 아는 우리나라 대표 출판인이다. 그는 1975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되고 그 이듬해에 한길사를 창립한 이래 45년 동안 우리 인문·사회·예술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