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3년 주보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2023년 12월 17일(나해)

모든 2 2023. 12. 17. 17:53

 

새터공소(신평성당) / 그림 안종찬(바오로)

 

 

+ 요한 복음 1,6-19-28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요? 엘리야요?"하고 묻자,요한은 "아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요?"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말씀의 향기>

 

더 나은 사람이 되어보자  - 윤달수 바오로 변동 주임

 

  대림 제3주일을 보내며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은,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을 반복하여 던지고 있습니다. 이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고 자신의 신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으며 요르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고 있는 요한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우쭐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자신을 한없이 낮고 부족한 사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요한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의 한 가지 역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은 사람이라 생각할수록 덜 나은 선택을 하기 쉽고 부족하다고 생각할수 록 부족하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더 나은데 어찌 더 나아지려 하겠습니까.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이런 노력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켜 주는 것 아닐까요?

 

  이러한 의미로 ‘set me free’라는 노래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미치려는 걸...”이라고 외치는 BTS 지민의 노래는 큰 울림을 줍니다. 대중음악가로는 이미 세계 최고의 위치에 올라 있으면서도 미친듯이 더 노력하겠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이는 현시대에서 더 많은 재물을 가지려 하거나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려는 태도와는 다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에 만족하거나 이만하면 괜찮다고 안주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이든 어떤 위치에 있든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삶의 태도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는 요한의 겸손한 고백 속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는 결연한 삶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는 순간까지 무엇인가를 선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부족한 것을 조금이라도 성장시키는 선택을 무엇이라도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현 순간에 우리는 한 번에 백 걸음을 걸을 수는 없습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 힘찬 한 걸음을 지금 당장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더 나은 우리 가정

 

5.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일찍일찍 좀 다녀~ 밤에 얼마나 무서운 일들이 많은데.” “에휴~ 내가 알아서 할게.” 늦은 시간, 귀가하는 딸에게 내 걱정이 앞서는 순간, 또다시 잔소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걱정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다 그만 긴 잔소리가 되고 딸은 토라집니다.

 

  사전에서 잔소리란 ‘쓸데없는 또는 필요 이상으로 듣기 싫도록 꾸짖거나 참견하는 자질구레한 말’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왜 자녀가 쓸데없다고 느끼는 잔소리를 계속할까요?

  부모가 ‘너를 위해서’라는 진심을 담고 부드러운 어조로 듣기 좋게 말을 해도 자녀가 잔소리라고 여길 때면 부모 입장에서는 막막하고 섭섭합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진심이 왜 잔소리가 될 수밖에 없는지 부모의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곧 부모가 자녀를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자녀를 부모인 나와 동일시하는 경우입니 다. 부모가 자녀를 자신과 분리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면 부모의 불안과 걱정을 자녀의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안정과 해결을 위해 부모의 일방적인 판단과 기준으로 자녀를 통제하려는 마음이 자동으로 작동합니다. 이 경우, 부모는 안정되고 해결이 되기까지 무의식적으로 지시와 통제적인 말을 반복하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두 번째는 부모 효능감입니다. 부모로서 ‘역할을 잘 하고 있다.’는 부모 효능감이나 부모 자존감이 낮은 상 태에 있으면 자녀가 요구하지 않아도 필요 이상의 역할을 하려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일방적인 개입, 관여를 하게 되고 부모는 도움을 주지만, 자녀는 간섭으로 여기는 상황을 초래합니다. 그래서 부모 스스로 자기 이해와 통찰이 선행될 때 비로소 자녀가 수용할 수 있는 잔소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 까?”(루카 2,49)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녀를 나와 분리하고 믿어줄 수 있는 부모로 살아갑시다. 이를 위해 부모로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와 나눔을 통해 긍정적 수용과 효능감을 경험해야 합니다. 부모도 한 사람으로 지지와 위로, 그리고 배움으로 마음의 허기를 든든히 채우고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피로와 스트레스를 구체적으로 살피고 관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안정될 때 자녀의 입장을 더욱 잘 고려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부모인 나에 대한 돌봄으로 잠시 잔소리 한번은 멈추시면 어떨까요?

 

-천주교대전교구 가정사목부-

 

『더 나은 우리 가정』을 마치며 그동안 연재해 주신 천주교대전교구 가정사목부에 감사드립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66. 미사 해설 - 성찬 전례(30) : 영성체 예식 : 영성체 전 기도


영성체 전 기도

131. 그다음에 사제는 손을 모으고 속으로 기도한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따라 성령의 힘으로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이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로
모든 죄와 온갖 악에서 저를 구하소서.
그리고 언제나 계명을 지키며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이 제게 심판과 책벌이
되지 않게 하시고 제 영혼과 육신을 자비로이 낫게 하시며 지켜 주소서.

 

  “사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구원을 얻도록 속으로 기도하며 준비한다. 신자들도 침묵 가운데 기도하면서 같은 준비를 한다”(로마미사경본 총 지침 84항).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할 때, 사제는 침묵 속에 위의 기도문에 따라 기도합니다. 이 부분을 “영성체 전 기도”라고 합니다. “영성체 전 기도”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성체를 모시기 전 바치는 사제의 침묵 기도는 성체를 모시기 위해 합당한 영적 준비를 위해 바치는 기도를 말합니다. 영성체 전 기도에는 두 가지의 양식이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간절한 청원을 함께 봉헌합니다. 둘째 기도는 부당하게 성체를 모시는 것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경고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 다(1 코린 11,27)”.

 

  이 기도는 사제의 침묵기도이기에, 신자들이 이 기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무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편을 통해서 영성체 전 기도를 소개해 드리는 이유는, 성체를 모시기 전 우리가 마음을 모으는 것에 대한 부분을 함께 성찰해 보자는 차원에서 입니다. 보통 성체를 모시고 나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성체를 모시기 전에 기도로써 합당한 마음을 갖추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성체를 모시기 전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해야 하고, 영성체송을 불러야 하며, 행렬을 준비해야 하는 등 외적으로 준비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외적인 준비만큼이나 성체를 모시기 전 내적인 준비 또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께 무엇을 청할 것이며, 거룩한 주님을 만나기 위해 합당한 마음을 갖추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신자들에게도 영성체 전 기도가 필요합니다. 위에서의 “영성체 전 기도”를 신자들이 봉헌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성체 전에 합당한 내적 준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영성체”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차장-

 

 

죽음과 가톨릭 상장례의 풍요로움

 

 

  오늘날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 공식 예식서인 「상장예식」은 이전 예식서인 「성교예규」와 달리, ‘죄’의 신학 중심이 아니라, 용서와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과 부활, 곧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중심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사람’인 죽은 영혼을 구하는 위령 기도(연도)는 한국 가톨릭교회 상장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정하상교육회관에서는 가톨릭상장례를 포함하여 국가자격증을 취득하는 장례지도사 교육, 위령 회원 양성을 위한 가톨릭상장례 전문교육(위령 회원 교육), 위령 기도를 익히고 지도하는 상장예식 연도 초급 교육을 함께 실시 하고 있습니다.

-글 관장 김민희 바오로 신부-

 

 

 

김용태 안드레아 신부의 학교 사목 이야기(12)

 

반가운 인사

 

  외부에서 온 손님들은 교정을 둘러보고 나면 꼭 하시는 칭찬이 있다. 대건고 학생들이 인사를 참 잘한다는 것이다. 학교가 크다, 시설이 좋다는 말보다도 그 말이 참 듣기에 감사하고 좋다. 사실 내가 보기에도 아이들이 인사를 참 잘한다. 하루에도 몇 번을 마주치건 늘 인사한다. 가끔은 좀 귀찮게 느껴질 정도로 잘한다(하는 아이들은 한두 번 인사하는 것이지만, 받는 사람은 수백 명에게 몇백 번 받는 것이니 약간의 귀찮음은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래도 그 마음이 고마워서 인사를 받아 주고 얼굴을 마주치고 안부를 묻는 것도 빼먹지 않으려 노력한다.

 

  사실 아이들이 서먹하고 낯설 때는 인사를 하긴 해도 어쩔 수 없이 하는 느낌이 있다. 학년 초 막 입학한 아이들의 인사가 그렇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학교가 집처럼 익숙해질 때가 되면 아이들이 하는 인사에서 반가움이 느껴진다. 멀리서 지나치면 모르는 척할만한데, 그럼 더 큰 소리로 인사한다. 그런 인사를 받을 때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전해주는 인사가 사람의 마음을 참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살면서 그처럼 반가운 인사를 얼마나 주고받으며 살고 있을까?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반가운 얼굴로 웃으며 따스함을 전해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 사람이 많이 있는 분이라면 참 행복하게 사는 사람일 테다. 그렇지 않다면 거울을 한 번 보고 웃는 얼굴도 연습해 보고, 쑥스럽지만 ‘안녕하세요.’라는 말에 반가움을 담는 연습도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우리의 작은 일상을 바꾸는 힘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예수님도 부활하신 뒤 제자들과의 만남에서 늘 인사 하셨음을 떠올려 본다. 당신의 무덤을 찾아왔던 여인들에게 ‘평안하냐?’(마태 28,9)는 인사를 전하셨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평화가 너희와 함 께!’(루카 24,36)라고 인사하기도 하셨다. 또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친히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셨다(요한 20,16). 예수님께서도 인사만으로 기쁨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신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가 되니 그렇게 반갑게 인사 하며 지낸 아이들이 졸업하는 때가 다가온다. 삼 년이라는 시간을 울고 웃으며 보냈던 그들이 이제는 세상 속으로 나가 자신만의 꿈과 삶을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 끝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보낼 때가 되었다. 이제는 내가 떠나가는 아이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전해줄 때인가 보다. “지난 삼 년 고생 많았고 앞으로의 삶에서도 항상 웃음과 행복을 간직하길 기도 할게. 하느님께서 항상 너희를 지켜주실 테니 늘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바라. 고맙고 늘 행복해지자. 안녕!”

 

- 김용태 안드레아 신부 논산대건중.고교 교목-

 

 

 

<1분 교리>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1984년부터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내도록 정했습니다. 자선은 사랑의 한 가지 행위입니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당신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서로 돕기를 바라시며, 이웃 사랑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순 시기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기도와 자선과 단식을 훈련하도록 전례력을 마련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그리고 단식은 자신과의 관계를 위한 것이라면,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위한 것입니다.

  자선은 믿음과 더불어 천국에 갈 수 있는 한 가지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에너지 전환

 

+ 찬미 예수님

 

  최근 우리 성당 지붕에 태양열 패널을 설치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에너지 전환에 대하여 말씀드릴까 합니다. 에너지 전환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원자력이 경제성이 있다는 주장을 내세워 원자력에 중점을 두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태양열 패널 가격은 85% 떨어진 상태입니다. 원자력은 막대한 시설 비용과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일부 언론은 원자력이 200조 원 이익이 남는 시장이라고 과장하는데 그러면 미국, 캐나다, 일본, 프랑스 등은 왜 원자력을 포기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유럽은 기후 위기를 의제 1순위로 올리고 있습니다. 탄성력을 잃어버린 사회,기후 위기는 바로 이런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 위기, 미세 먼지 등은 잠깐 왔다가 가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기후 위기(극지방과 적도가 기온의 간격이 줄어드는 상태) 기온의 차이가 줄어들어 순환이 줄어드는 상황입니다. 인류 문명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심각하고도 시간이 없는 시기에 우리나라는 매일 경제만 외치고, 역행하는 환경 정책을 스스럼없이 내놓고 있습니다. 신자분들의 많은 관심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입니다.

 

-글, 사회 복음화분과 제공-

 

[재활용품 성당 수거일 안내] * 사회 복음화분과*

 

매월 셋째 주 (주일)

1. 우유 팩 (세척 후 잘 말려 펼침)

2. 아이스팩 (물 ×, 젤로 되어 있는 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