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공소(당진성당) / 그림 안종찬(바오로)
+ 마르코 복음 1,1-8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말씀의 향기>
믿을 교리와 사회교리 - 김용태 마태오 교구 정의평화위원장
“그것은 ‘믿을 교리’입 니다.”
이 말은 교리교육 현장 에서 “자꾸 묻고 따지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삼위일체’처럼 이 해하기 모호하고 난해한 교리를 설명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느님의 신비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 나름 수긍을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 교회의 신앙교육은 이런 식의 믿을 교리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의 신비라는 게 머리로 이해할 수 없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믿어 야 하는 대상일까? 천주교는 ‘계시종교’다. ‘계시’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믿는다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알기를 바라신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믿는 것은 ‘맹신’이 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보이는 세상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과 온갖 피조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교회와 7성사만이 아니라 세상 속 인간과 온갖 피조물들이 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징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 벽면만 바라보면서 믿을 교리만을 암송할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온갖 피조 물들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이 보인다.
교회의 ‘사회교리’란 그런 거다. 복음의 빛으로 세 상을 비추는 것이 바로 사회교리다. 믿을 교리의 하느 님은 사회교리를 통해 우리 곁에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 드러난다. ‘천주존재’와 ‘강생구속’은 세상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라는 사회교 리 안에서 밝혀진다. ‘삼위일체’는 갈라져 싸우는 모든 이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합하기를 바라면서 혐오와 배척에 맞서는 사회교리 안에서 드러난다. ‘상선벌 악’은 아무리 가난해도 착하게 살면 영예롭고 아무리 부유해도 악하게 살면 수치스러운 세상을 만들려는 공정과 정의의 사회교리 안에서 구현된다.
지난 10월 말, 어느 본당의 평일미사 주례를 맡게 되어 미사를 봉헌하면서 참석한 신자들에게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더니 한 신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는 절을 하면서 세상의 십자가는 외면해 버리는 모습이라니! 그런데 이런 신자들이 꽤 많다. 사회교리 교육이 더욱 절실한 요즘이다.
아직도, 여전히 또한 앞으로도
시노달리타스(15)
시노달리타스의 원천이자 목표인 친교(Communio)
현실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친숙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생소하기까지 한 단어나 표현들이 있음을 볼 수 있 다. 이러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 ‘친교’라는 표현이다. 교회 밖에서 활용되는 사례를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것이 ‘친교’가 종교 영역에서만 유효하고 적법한 제한적인 실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친교를 배우고 익힌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교회 밖으로 친교를 확장하지 못했음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친교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야 하는 신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교회헌장」 4항이 고백하듯이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이기에 하느님의 평화와 사랑이 온 세상 땅끝에 이르도록 모든 이들과 함께 일치하고 친교를 이루며 하느님의 친교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 그렇지만 친교를 이루기에는 너무나 많은 반대와 난관이 존재한다.
친교의 반대(反對)를 불일치 또는 갈등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친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갈등의 원인 자체를 제거하고 말살하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친교와는 전혀 다른 ‘획일화’일 뿐이다. 왜냐하면 차이 또는 다름을 다양성이 아니라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질적이고 이상한 것으로 여기며 없애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다름의 대상이 단순한 의견이나 생각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라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복음의 기쁨」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일치가 갈등을 이긴다.’라는 원칙을 통해 친교를 증진시키는 길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갈등에 대처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곧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이를 새로운 전진의 연결고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이러한 방식으로 차이 속에서 친교를 증진시키는 것이 가능해집니다”(227항).
교회가 갈등을 이겨내며 친교를 이루는 길은 결국 삼 위일체 하느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친교가 일방적인 방식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기에 교회가 추구하는 친교 역시도 일방통행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관계를 맺으며 구체화되어야 한다. 친교는 다른 생각과 다른 모습이 표현될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하고 일방적으로 권위에 순종하며 모두가 똑같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상호 경청하며 함께하는 하느님의 백성이자 예 수님의 선교하는 제자다운 생활과 활동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R. Repolo(로베르토 레폴레) 대주교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각자를 분리되고 고립된 주체로 여기지 않고 교회에 봉사하는 형제애의 친교를 이루는 공동의 주체로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한산 주임-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65. 미사 해설 – 성찬 전례(29) : 영성체 예식 : 빵 나눔 (2)
하느님의 어린양 130. 그동안 아래 기도를 노래하거나 낭송한다.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위의 기도는 축성된 빵을 쪼개는 동안 되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평화를 주소서로 한다. |
사제가 빵 나눔을 하는 동안 교우들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하거나 낭송합니다. 이 기도문은 7세기경 동방교회의 예식에서 도입되었습니다. 이 기도는 기도 문에서 드러나듯, 하느님께 자비와 평화를 비는 것입 니다. 특별히 세 번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와 평화를 간절히 필요로 한다는 점을 드러내 주는 신학적인 요소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주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진 칭호 중 하나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을 ‘어린 양’으로 묘사했고(이사 53,5-10), 세례자 요한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하고 외쳤으며, 요한 묵시록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이라고 26번이나 부르고 있습니다(묵시 5,6; 12,11). 곧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상 당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 스도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례적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은 성가대가 노래로 할 수도 있습니다. 축성된 빵을 쪼개는 시간이 길어질 경우 반복해서 할 수 있지만 (“자비를 베푸소서” 부분은 계속 반복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는 언제나 끝 절인 “…평화를 주소서.”라는 기도로 끝내야 합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3항을 살펴봅시다.
“성가대나 선창자는 교우들과 화답하며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한다. 노래하지 않을 때는 적어도 큰 소리로 낭송한다. 이 간청은 빵 나눔 예식 때 함께 바치는 것이므로 예식을 마칠 때까지 필요한 만큼 되풀이할 수 있다. 마지막에는 평화를 주소서라는 말로 끝낸다.”
미사 안에서 성가대가 봉사할 경우, 성가대가 중심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을 시작하지만, 평일미사 때 해설자가 “하느님의 어린양”을 인도해야 할 때 언제 시작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시곤 합니다. 예식서에 의하면, “그동안 아래 기도를 노래하거나 낭송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사제가 빵 나눔을 시작할 때 노래나 낭송이 시작됨이 합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영성체 전 기도”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 사목국 차장 -
죽음과 가톨릭 상장례의 풍요로움
가톨릭 옛 예규인 「상장규구」에서는 선종하신 교황님, 주교님, 본당신부님, 옆 본당신부님, 본당회장님, 본당교우를 위한 기도와 애도의 기간을 구체적으로 정해서 기억하며 실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상례문답」에서는 이단을 숭상하다 죽은 천주교 신자의 시신도 소중히 다루고 존중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가톨릭 상장례의 전통과 예규 안에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 기념되는 사람과 기념하는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이자, 참 인간이 되게 하는 아름다운 죽음의 신비가 살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경계를 허무는 형제애/연민이 담겨 있고,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영혼에게 인애와 은혜를 선물하는 의덕과 애덕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정하상교육회관에서 가톨릭 상장례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배우고자 하시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 글 관장 김민희 바오로 신부 -
<이충무의 숨은 행복 찾기(70)>
매력적 오답 피하기
바깥 공기가 쌀쌀해진다 싶으면 붕어빵 말고 생각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대학입학고사’입니다. 올해 수능일은 그리 춥지 않아 학생들과 학부모 모두에게 다행이었습니다.
국가적인 행사인 대학입학고사에 대한 관심은 늘 뜨겁습니다. 그래서 날씨, 시험장 분위기, 각종 실수와 미담 등, 수능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 순간이 뉴스거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단연 초미의 관심사는 다름 아닌 ‘시험 문제’의 난이도일 것입니다. 시험 문제가 얼마나 어렵고 쉬운지에 따라 수많은 학생의 희비가 엇갈리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킬러 문항’을 배제한다 해서 한시름 놓을 줄 알았지만, 충분히 정답처럼 보이는 ‘매력적 오답’을 유도하는 문항들이 많아 수험생들이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매력적 오답이란 정답이라고 착각할 만큼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답입니다.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면 쉽게 ‘정답 아닌 정답 같은 오답’에 마음을 뺏기기 마련입니다.
문제 출제자가 파 놓은 매력적인 오답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조언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그 조언들 가운데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됩 니다. “출제자의 의도를 너무 단순하고 쉽게 판단하지 말라.”입니다.
내 판단에 앞서 먼저 상대방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읽어 내는 것이 실수를 줄이는 지름길이라는 조언은 비단 수험생들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종종 인간관계로부터 발생되는 다양한 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곤 합니다.
하지만 정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엉뚱한 답을 정답으로 판단해 뒤늦은 후회를 하곤 합니다. 상대 방의 입장으로부터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데, 자꾸만 성급하게 내 입장에서 그 문제를 들여다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만 고수하면 정답처럼 보이는 ‘매력적 오답’의 유혹에 쉽게 빠지기 마련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는 그래서 어쩌면 내 안에 스스로 갇히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인지도 모릅니다.
-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교수 -
<1분 교리>
1. Q 헌금은 무엇인가요?
A) 미사는 백성 공동의 제사도 되지만 각 개인이 바치는 자기 제사이기도 하므로, 미사를 드릴 때 교우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제물로 봉헌 드려왔습니다.
이때 각 개인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예물로 드리는 봉헌금을 헌금이라고 합니다. 헌금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가진 것 중 최고의 것을 제물로 봉헌하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2. Q 교무금은 무엇인가요?
A) 교무금이란 매월 일정액을 성당(사무실)에 봉헌하는 예물을 말합니다. 주일미사 때 바치는 헌금이 본래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께 다시 돌려 드린다는 상징성이 있지만, 교무금은 교회의 유지와 운영에 필요한 비용으로 선교 활동비, 교육비, 가난한 이들과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쓰입니다. 이는 구약의 십일조 전통에서 유래합니다.
미세플라스틱
+ 찬미 예수님
오늘은 유해성이 큰 미세플라스틱에 관한 기사가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음은 기사 내용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수돗물, 생수(먹는 샘물), 하천·호수·강·해양 등과 해산물에서 미세플라스틱이 확인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생활환경과 수산물 등에서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되고 있습니다.
섭취를 통해 체내로 들어올 수 있으며 플라스틱의 원재료 자체의 독성은 낮으나, 제조시 사용되는 가소제·난연재 등의 첨가제가 추출되거나 환경 중독성 물질이 미세플라스틱 표면에 흡착되어 생물 체내에 축적되는 것이 우려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해산물 섭취로 인체에 유입되는 미세플라스틱에 의한 위해성은 낮다고 판단하지만, 플라스틱의 사용량과 환경 배출을 고려할 때 사전 예방적으로 플라스틱과 미세플라스틱 관리가 필요합니다.
해산물을 통해 먹이사슬에 들어가는 것 외에도 사람들은 공기에서 미세플라스틱을 흡입하고, 물에서 섭취하고, 피부를 통해 흡수될 수 있습니다.
미세플라스틱은 다양한 인간의 장기와 심지어 신생아의 태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미세플라스틱의 화학물질이 특히 여성에게 심각한 건강 영향과 관련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 화학물질은 다른 건강 문제 중에서도 인간 유전학, 뇌 발달, 호흡률의 변화를 포함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재활용품 성당 수거일 안내] * 사회 복음화분과*
매월 셋째 주 (주일)
1. 우유 팩 (세척 후 잘 말려 펼침)
2. 아이스팩 (물 ×, 젤로 되어 있는 팩)
'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 > 2023년 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림 제4주일 2023년 12월 24일(나해) (1) | 2024.01.02 |
---|---|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2023년 12월 17일(나해) (2) | 2023.12.17 |
2024년 사목 교서 (2) | 2023.12.08 |
12월 (1) | 2023.12.08 |
대림 제1주일 2023년 12월 3일(나해) (1) | 2023.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