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꽃 필 무렵 /권대웅
저녁밥 지으려
부엌에 갔던 엄마가
쌀독에 쌀이 떨어져
쌀 대신 뒷동산에서 꺾어온
싸리꽃
그 향기에 불을 켜지 않아도
마루가 환했고 더웠고
목이 메이던 봄
꽃은 땅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뭇가지 속에서 피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곳 속 저 너머 보이지는 않지만 봄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부신 햇빛이 내리쬐는 또 다른 공간의 버전 속 어딘가에서 오는 것이다. 전생에서 오는 것이다.
개나리는 노랑 길로 온다. 진달래는 분홍 길로 온다. 벚꽃은 연분홍 길로 왔다가 다시 온 길로 돌아간다. 꽃은 지는 것이 아니다.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봄이면 자기가 살던 그리운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시 저 공중의 꽃길을 따라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꽃들이 오고 가시는 길. 봄이면 얼었던 시냇물 풀어지듯 마음의 움막에서 견뎠던 슬픔들 풀어내고 얼굴에 연지 곤지 찍어 바르고 꽃등을 들고 당신이 오시는 그 길에 막걸리 받아 마중 나가고 싶다.
엄마는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가 되셨다. 그후 스물다섯 번의 봄을 맞이하고 돌아가셨다. 어느 봄날이었을까. 꽃나무 앞에서 젊었을 적 엄마의 흑백사진을 보다가 거기 그렇게 멈춰 있는 그해 봄꽃과 지금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젊은 그녀의 얼굴이 저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뭉클했었다.
그렇게 봄날이, 봄날들이, 꽃과 풍경과 시간과 햇빛과 바람들이...어느 공간에서 저장되어 있다가 내가 사라진 어느 봄날, 당신의 기억 속에서 꽃피는 시절로 또 한 번 돌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